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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젤리 Nov 04. 2024

19. 에르메스와 재활용 플라스틱 책가방

다가오는 남편의 생일에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넥타이를 선물하기로 결정하였다. 평소에 전혀 쇼핑을 즐기지도 않고, 자잘하게라도 돈을 잘 쓰지 않는 남편은, 대신 잘 모아 2~3년에 한 번 좋은 원단으로 양복 한 벌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한 벌 정도는 맞출 수 있는 여유가 될 것 같아 얼마 전에 집 근처 테일러샵을 방문하였다. 친절한 테일러와 좋은 옷감, 그리고 한국과 비교했을 때 괜찮은 가격을 고려해서 한 벌 맞추기로 결정하였다. 상담이 끝난 후 남편은 매장 한 켠에 진열되어있는 넥타이를 뒤적거렸는데, 그 모습을 보니 넥타이는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눈치였다. 출근 시간 마다 넥타이를 고르다 나지막히 툴툴거리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윤기가 흐르는 양복에 비해, 그의 넥타이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생일 선물로 그의 좋은 원단의 양복과 어울리는 비싼 넥타이를 선물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브랜드 저 브랜드 알아보다가 결국엔 명품의 최고봉(?)이라는 에르메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다. 에르메스에서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은 넥타이인 것처럼 보였다. 지금 현재 소득이 없는 내 상황에서는 조금 과한가 싶었지만, 그래도 이번엔 한 번 지르기로 했다. 작년 생일엔 휴직한다, 이사한다, 정신없다는 이유로 대충 초콜릿으로 생일을 떼운 것이 아직까지도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지만, 독일의 택배 시스템을 100%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매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내가 사는 도시의 백화점에는 한국인들이 알만한 해외브랜드가 전혀 없는, 그 흔한 Zara 매장도 없는 곳이다. 이 쇼핑 불모지 같은 곳에 에르메스가 있을리 만무했다. 1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대도시인 뒤셀도르프로 향했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 어떤 복장으로 매장을 가야하나 꽤나 고민했다. 아무래도 명품매장이니만큼 TPO를 갖추지 않으면 입뺀(?)을 당하지 않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왕 멀리 뒤셀도르프에 가는 김에 (우리 도시에는 없는) 한국 빵집에서 단팥빵도 사고, 한인 마트에서 김치와 여러 반찬들도 사서 오고 싶었다. 장을 본 후 기차까지 타고 집까지 돌아오려면 삐딱구두를 신고, 미니백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운동화를 신고, 인도네시아의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활용해서 만들었다는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입장을 거절 당하면, 그냥 다른 선물을 사는 게 낫겠다는 Plan B까지 마련해두고선 말이다. 


다행히 매장에서는 책가방을 멘 나의 행색으로 입장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넥타이를 사러 왔다고 말하니, 직원은 40분 정도 대기하면 된다고 안내해주고, 매장을 편하게 둘러보며 기다리면 된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모 브랜드의 오픈런을 위해 새벽부터 줄 서본 이력이 있는 나로서는 40분 정도는 기다릴만 하다고 생각했다. 입구컷을 당하지 않는게 어디인가 싶어서 천천히 매장을 둘러보았다. 매장을 잘 둘러보는데는 20분이면 충분했다. 어찌저찌 40분이 지났지만 내 차례는 아직도 멀어보였다. 여전히 셀러들은 분주했고, 나보다 늦게 왔지만 더 비싼 것을 구매하려는 손님들은 (기존에 예약이 되어있었는지) 먼저 응대 받았다. 그렇게 1시간... 1시간 20분... 시간이 흘러갔다. 매장에 진열된 브로슈어도 이미 3번 이상을 꾸역꾸역 훑어보았고, 더 이상 구경할게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서로 마주칠 지 모르는 시선을 조심하며 매장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구두쇠로 유명한 독일에서, 고가의 명품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독일에 와서 보니, '독일인은 가난하다'에 대한 논쟁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원래도 중위소득에게 부가되는 세율도 상당히 높아(42%), 연봉에 비해 가처분 소득이 높지 않은 편이었는데, 코로나, 러시아 전쟁을 겪으며 물가, 에너지 비용의 상승으로 중산층의 부담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한다. 먹고 사는데는 크게 지장은 없어도, 사치품을 살만한 여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특히나 올해 독일 경제성장률은 극히 낮은 수치를 기록 중이며, 빈부격차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뉴스들을 볼 때면, 우리가 알고 있던 '잘 사는 나라, 독일'은 이제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경제적인 지표에서 보여지는 것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내가 마주하는 독일인들도 딱히 부(富)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보였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성실하게 경쟁하여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이동해야한다는 인식은 약해보였다. 한 번은 독일어 수업 때, 휴직기간동안 주식 투자를 잘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독일인 선생님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혹여나 부를 축적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과시하는 일은 더더욱 보기 힘들었다. 물론 내가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이 유학생 혹은 이제 막 은퇴한 세대에 한정되어있고, 내가 부자가 아니니 부자와 어울릴 수 없어 그들의 삶을 모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소득수준이 독일 내에서 그리 낮지 않은 편인데도, 화려한 차림으로 럭셔리 상품을 소지하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은 정말로 드물었다. 가끔 도로에서 좋은 차를 발견한 적은 있었지만, 바람막이 점퍼에, 배낭을 메고, 헬맷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인상이 내게는 흔한 독일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에르메스 매장에 비싼 가방을 사러 오는 사람들의 차림새는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매장에서 고가의 가방을 구매하는 사람은 그래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일테니 말이다. 매장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동아시아인, 독일인으로 추정되는 백인, 중동계로 추정되는 사람들... 인플루언서 같아 보이는 몇몇의 중동계 여성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옷차림은 나와 크게 다를바가 없어보였고, 나의 차림으로 입뺀을 걱정한게 무색할만큼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은 드물었다. (물론 독일인들이 세계적인 패션테러리스트로 유명한 터라 그게 최선으로 꾸민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중년 남성이 신은 스니커즈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에르메스 로고가 박혀 있었고, 한 할머니가 든 빈티지 가방은 세월과 함께 그녀의 손때가 묻어나서 더 멋스럽게 느껴지는 아주 작은 버킨백이었다. 다른 고객들도 다들 보일듯 말듯하게 고가의 명품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 매장에서 운동화에 재활용 플라스틱 책가방을 멘 채로, 에르메스 상품을 전혀 몸에 지니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독일에서는 부를 보여주거나, 일부러 나타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워렌 버핏, 빌 게이트, 일론 머스크처럼 미국의 갑부들의 이름은 아주 익숙하면서, 나름 경제대국 중 하나인 독일의 억만장자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재벌가 총수들의 경영이슈부터 사적인 가십거리들까지 거의 일거수 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반면에, 독일에서는 기업 총수 한 명을 특정한 뉴스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독일의 갑부들은 범죄의 타겟이 될 것을 우려해 극도의 노출을 꺼리며, 외부 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극히 소수의 자산가들의 모습을 다수의 대중에게 전시하지 않으니, 독일에서 사치품을 소지한 사람을 보기 아주 어려운 것은 당연해보였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총수가 사용한 립밤까지도 대대적으로 유행이 되는 곳인데 말이다. 놀랍게도 이렇게 자신의 부를 감추고(?) 싶어하는 경향은 비단 억만장자들만의 일이 아니라고 한다. 2015년 한 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의 40% 이상이 배우자의 재정상태를 서로 모른다고 하니, 결혼할 때 상대의 경제상황을 오픈하는 것이 필수가 되어버린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결혼 풍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이런 사회분위기가 마냥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독일인들에게 부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물려받는 것으로, 그래서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계층의 사다리가 발전하지 않아, 그리 경쟁적인 사회가 아니다. 다이나믹한 한국사회에 비해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래서 다른 한 편으로는 아주 침체되어있어 보일 때도 있다. 이 단점들이 결국 누적되어 현재 독일이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어가고 것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저히 짧은 기간동안에만 머무는, 독일의 장기 성장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방인인 나에겐 이런 독일 사회는 오히려 마음의 편안함을 준다. 남편에게 어떤 비싼 명품을 선물 받았는지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며 괜히 주눅들 필요 없었다. 주식 투자로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잃었는지 서로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독일에 오기 전, 나는 부를 향한 경쟁과 압박에 조금 지쳐있었다. 이 곳에서는 나의 친환경 책가방과 장바구니면 충분했다. 매일 출퇴근할 때 입었던 복장들도 이 곳에서 입기에 조금은 과해보였다.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사고 싶다는 물욕도 없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부를 과시하고 싶은 본능이 잠재되어있는 한국인이었다. 견물생심이라고, 에르메스 매장에 가서 1시간 이상을 앉아있다보니, 주위에 디스플레이 되어있는 많은 가방들이 너무나도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가방이 사고 싶어졌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졌다. 내 머릿 속에선 어떻게 하면 부의 사다리를 탈 수 있을지 여러 시나리오를 가동해보기 시작했다. 물론 내 안의 상상으로만 머물 수 밖에 없는 맹랑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내 씁쓸해졌다. 주재원 와이프로 살면서 하고 있는 수많은 고민의 종착지는 결국 '어떻게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로 귀결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화목한 가정과 자기 효능감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돈은 거기에 가장 기본 전제 조건이었다. 이런 내게 지금은 '부는 운명이다' 라는 독일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적용해봐야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사치품이 내 가치를 올려줄 수 있다는 다소 불순한 마음을 버리고, 그냥 지금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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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 뒤셀도르프 에르메스 매장]


*내용 참고

-유튜브 콜드걸 독일법인 님의 '왜 우리는 독일의 부자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가?

https://youtu.be/lAOYv_XR-ic?si=UKXTdkfpIYXuH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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