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피는 꽃

by 기영

라일락(Lilac)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이다. 꽃은 작지만 한 줄기에서 많은 꽃들이 피어나 제법 큰 무리를 이룬다. 은은한 향기에 매료되는 사람이 많아 섬유유연제나 향수 등에도 자주 등장하는 매력적인 꽃이다. 봄을 환영하는 나팔처럼 봄이 오면 바로 활짝 피는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쑥스러움이 많은지 4~5월 늦은 봄에 피는 꽃이다.


나는 작년 라일락 같은 학생을 만났다. 오늘은 그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학생을 L라고 칭하겠다.


L과의 첫 만남은 이질감과 걱정이었다. 1학년부터 계속 학교에 다녔던 학생들과 다르게 다른 곳에서 전학을 왔고, 수업시간에 하는 일은 자는 것 뿐이었다. 한번은 자다가 밥 때를 놓친 적도 있었다. 원래 있던 아이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와 수업태도는 이질감을 불러왔고, 배울 기회를 잃어버림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특이한 건 지각은 하지 않고 매번 일찍 학교에 등교했다는 것이다. 잠이 많은 학생들은 대게 아침잠을 못 이겨 지각을 했기에 이런 차이점도 눈길을 끌었다.


중학교의 담임은 반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반 학생일지라도 관찰할 기회가 얼마 없다. 나의 교과 시간, 조종례. 그래서 이 짧은 시간을 빌어 L과 열심히 상호작용했다. 밥은 먹었는지, 수업은 잘 듣고있는지, 학교 올때는 어떻게 오는지 등등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물음이었지만 L에게는 다행히 나의 마음이 잘 전달된 것 같았다. 학교가 조금은 편해진 덕분일까. 잠자는 시간은 줄었고, 나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은 늘었다. 아침 조회 때 교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교탁으로 와서 자신이 어제 뭐했는지 그리고 나의 대한 질문으로 15분을 가득 채우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짧은 15분이 즐거웠다. 누군가의 질문과 관심이 하루를 즐겁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되었고, 굳은 아침을 편하게 풀어주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L은 하교하기 싫어 종례 후 학교에 남을만큼 학교를 좋아하게 되었다.


1학기가 지나고 어느덧 2학기가 왔다. 중학생은 정말 매분매초 성장한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난 후 아이들은 모두 성장하였고, 내가 부르는 '애기~'라는 명칭은 그들과는 많이 어색해졌다. 2학기 초반에는 1학기와 마찬가지로 정말 즐겁게 보냈다. 아침을 풀어주는 15분간의 대화, 학교에서 오래 노느라 집에 안들어왔다는 학부모의 연락. 더할 나위 없이 신나는 학교생활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찾아오고 L에게도 겨울이 찾아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잠이 많아지고 다른 선생님들의 입에서는 L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우리의 대화도, 즐겁던 친구와의 놀이도 멈춘 채 L은 자신이 파놓은 구멍으로 들어간 듯 했다. 가끔의 대화에서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은 L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너무 궁금했다. 정말 걱정했다. 그리고 소망했다. 다시 돌아오기를


이유를 알게된 건 뜻밖의 전화 덕분이었다. 한창 생기부 정리로 바쁠 와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번호의 주인은 L의 어머니였다. 어머님은 L을 조퇴시켜 달라고 하시며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른들 사이의 갈등, L이 겪었던 힘들었던 일, 마지막은 L이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까지. 아직까지 정확한 내면은 모르지만 이야기를 들었을 때 L이 버텨야했던 고단함이 상상되어 눈물이 났다. 내 눈에는 아직 어리숙한 애기들이었는데, 모르는 사이 많은 것을 버티고 속으로 삼켜야했구나.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너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주었을텐데.


L은 이사를 갔다. 학교에서 한시간 이상 걸리는 곳으로.

학교를 얼마동안 나오지 않았다. 예상되는 다음 단계는 전학이었다.


하지만 2주 뒤, L은 학교로 돌아왔다. 굳은 아침을 풀어주는 15분의 대화와 함께.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L은 전학을 가기 싫어하여 지하철로 한시간이상 걸리는 거리를 매일 등하교했다. 그런 와중에도 힘든 기색없이 잘 지냈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했다. 가장 큰 변화는 꿈이 생겼다는 것이다.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생겼으며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L은 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싶어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관련된 고등학교를 모두 찾아보았고 여러번의 상담을 진행했다. 비록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고등학교를 찾고 상담하는 과정에서 공부에 대한 열의가 생겨 L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졸업식 당일 L은 머리를 염색하고 왔다. 한국인 90%가 어울리지 않는 샛노란색으로..

사실 잘 어울리진 않았지만 노란 머리가 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같아서 미소가 지어졌다.

L은 그렇게 갔다.


라일락은 화려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은 아니다. 하지만 늦은 봄. 서서히 피기 시작하여 은은한 향기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매력적인 꽃이다. 빨리 핀 꽃은 비바람에 쉽게 흩날리고 짙은 향기는 바람에 날라가 버린다. 하지만 라일락은 늦게피고 오래 남아 사람들 마음 속 봄을 오래 지속시킨다. 그리고 그 향기는 여러 방식으로 보관되어 사람들에게 행복을 퍼트린다.


L은 라일락이었다. 늦은 봄에 피어 오래 향기를 남길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화려한 봄을 오래동안 지속시키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때'는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모두가 봄이 왔는데 자신은 꽃 피우지 않았다고 좌절해서는 안된다. 너는 늦게 피어 오랫동안 향을 남길 수 있는 꽃이니까. '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좀 더 버티고 좀 더 웃으며 살자.




스승의 날, L에게 문자가 왔다.

너의 문자는 나의 인생에 길고 긴 향기를 남기는구나.

언제 어디서든 꽃피고 어느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향기를 남기며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막 속 꽃 피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