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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항녀 Aug 20. 2024

지퍼를 안 올리고 나왔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신나게 미역국을 끓이고 주인님들 밥도 챙겨주고 잠깐 넷플릭스로 ‘지구마불’도 보고 신났었다.


오늘은 신나는 날이다! 하며 매일 가던 카페를 가지 않고 빵이 맛있는 개인카페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옷은 편하게 흰 티 위에 원피스.


등에 지퍼가 있는 풍덩한 통짜 원피스다.


예전에 이 원피스를 입고 올리브영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외국인이 나에게 와서 어떤 물건을 달라고 했던가.


앞치마같이 생겨서 유니폼 같긴 하다.


그리고 한쪽 겨드랑이에는 영자신문, 반대쪽에는 책을 두권 넣은 가방.


아무튼 어제 분명 덜 먹기로 새끼손가락까지 걸었지만 새끼손가락을 잠시 풀어두고 어떤 빵을 먹을까 설레하며 나섰다.


오늘도 역시 날은 무지하게 더웠지만 발걸음은 신이 났다.


카페에는 이미 손님들이 몇 테이블 있었다.


혼자 먹는 것에 어려움이 없지만 혼자인데 웃으며 빵을 고를 수도 없기에 내 나름 도도한(?) 표정으로 카페 한가운데 있는 빵 매대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빵을 골랐다.


그리고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 시크하고 도도하게 하지만 속은 신나게 영자신문을 읽으면서 소보로빵, 소금빵, 스콘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즐기고 있는데 한 테이블에 있던 아주머니가 뭔가 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그 아주머니를 쳐다보지 않아도 시선이 느껴졌기에 나에게 온다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내 원피스가 탐나서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려는 걸까?’하는 생각과 함께 어디서 샀었는지 기억해내려고 했다.


주책같지만 나는 내가 좋다고 느낀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이 원피스는 가격도 품질도 좋았다.


생각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그렇게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나를 톡톡 치셨다.


예상했다는 듯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고 아주머니는 민망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시면서 말했다.


“뒤에 원피스 지퍼가 안 올라가 있어요..”


”어머 어머, 어떡해요. 감사합니다. “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민망해하자 아주머니께서는 내 지퍼를 올려주시며


”안에 옷 다 입었는데 뭐 어때요 ㅎㅎ“ 하셨다.


그렇지.


섹시백(Sexy Back)은 아니었다.


이렇게 내가 호들갑을 떤 순간 느꼈다.


내 표정이 얼마나 확 풀렸는지.


가끔 시크하게 혼자 길을 걷다가 발을 삐끗하면 시크했던 게 더 민망해서 인상을 쓰며 발을 이리저리 살필 때가 있다.


너무 아프지만 신발에 문제가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럴 땐 그래도 다른 사람과 눈빛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으니 끝까지 시크를 유지를 할 수 있긴 하지만 부끄럽다.


아무튼 그런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가면을 썼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가면이 나쁘거나 심각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니지만 확 벗겨지려 할 때의 그 민망함.


어쨌든 다행히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


오늘 내 원피스 지퍼는 다른 사람에 의해 올려졌다.


기분이.. 감사하다(?)


내 원피스 구매처를 알려드릴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한번쯤 외롭다 느껴지면 옷을 덜 마무리하고 외출을 해보셔라.


누군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줄 것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억수로 부끄러움의 후유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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