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내가 가진 감정을 모두 소진한 느낌.
이번 주에 할머니 장례식이 있었다.
93세로 아픈데 없이 서서히 여정을 떠나셨다.
호상이라 부를 수 있는.
그래서 장례식장에 모인 이들이 함께 웃을 수도 울 수도 있는 각자의 감정대로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과 3일을 내리 함께 지내며 할머니와의 추억을 공유하고, 아빠 형제들의 어릴 적 이야기도 하고, 사촌언니 오빠와 삶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 할머니를 보내드린 것으로 슬퍼하고, 또 서로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에 또 눈물이 맺히고.
천주교식으로 진행된 장례식이라 성당 노래를 부를 일이 꽤 있었는데 노래를 계속 틀리는 엄마와 음정이 안 맞는 사촌오빠야 덕분에 엄숙한 분위기에 웃음을 참느라 배를 부여잡고 볼을 깨물기도 하고.
틈틈이 장례식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수육과 편육을 먹으며 웃음과 함께 서로 살쪘다고 잔소리도 하고.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할머니 덕분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 가족들의 리유니언 시간이랄까.
아무튼 간 앞에 말했던 것처럼 다시 볼 수 없는 할머니가 그리워 가슴이 아프다가 또 친척들과 웃었다가 감정의 폭이 컸다.
3일장이라는 일정 상 피로가 쌓여 감정적으로 행동할 여력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즐겁고 아프고 슬프고 행복하고 간극이 큰 감정들을 오가다 보니 내 감정의 보유량을 모두 소진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평소 같았으면 감정 때문에 힘들었을 상황에 별 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막연한 공허함과는 다르고, 써야 할 무언가가 담긴 통이 텅 빈 느낌.
그렇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전자기기의 배터리를 충전할 때도 배터리를 끝까지 쓰고 충전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요즘 배터리는 모르겠지만..)
감정을 싹 다 써서 충전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이제 다시 채워줘야 하는데 이렇게 감정을 다 써버린 느낌은 처음이라 어떻게 채워줘야 하는지는 장례식이 끝난 지 약 4일이 지난 오늘도 모르겠다.
웬만하면 밝은 빛으로 된 감정에너지들을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감정을 충전시켜 봐야지.
아무튼 흥이 많고 사랑이 넘치던 할머니는 장례식을 통해 우리 가족들을 모아 행복을 나눠주셨다.
할머니 고마워요!
감정은 아마 책으로 채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