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자유주의에서 경제적 효율성으로

유럽 경쟁법 철학의 변천과 사전규제의 등장 그리고 글로벌 수렴 현상

by 날개

유럽 경쟁법의 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형성된 질서 자유주의(ordoliberalism)에 닿아 있다. 초기의 철학은 거대 자본의 권력 집중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억압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기 판례들은 시장 구조 자체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중소기업이 거대 기업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데 집중했다. 이 시대의 경쟁법은 경제적 효율성보다는 '시장 통합'과 '기회의 평등'이라는 정치·사회적 가치를 수호하는 파수꾼이었다.


이러한 질서 자유주의적 철학이 정점에 달한 지점이 바로 Hoffmann-La Roche(1979)와 같은 초기 판례들이다. 지배적 사업자의 리베이트를 행위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위험시했던 '형식주의'(formalism)는, 강자가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왜곡할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지였다. 이때의 경쟁법은 독점 기업에게 마치 공직자와 같은 수준의 '특별한 책임'을 지우며, 그들의 효율성보다는 그들이 시장에 미치는 위협적인 존재감에 주목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지식 기반 경제가 도래하자, 경쟁법의 철학은 '무형 자산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새로운 숙제에 직면했다. Magill(1995) 판결은 사유재산권인 저작권조차 시장의 역동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때는 경쟁법의 규율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사법부는 곧바로 Bronner(1998) 판결을 통해 과도한 개입이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을 수 있다는 '인센티브의 논리'를 수용했다. 이는 유럽 경쟁법이 단순한 기회의 평등을 넘어, '혁신을 위한 자극'과 '사유재산권 보호' 사이의 정교한 균형점을 찾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Microsoft(2007) 판결은 유럽 경쟁법 철학이 '생태계의 공생'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상호운용성 정보를 공개하라는 명령은, 네트워크 효과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독점 기업의 폐쇄성이 어떻게 후발 주자의 혁신을 질식시키는지를 간파한 결과였다. 이제 경쟁법은 단순히 가격이 비싼지를 감시하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와 기술의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시장의 동맥경화를 뚫어주는 '플랫폼 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게 되었다.


마침내 Intel(2017) 판결에 이르러 유럽 경쟁법은 '효과 중심 접근법'(effects-based approach)이라는 현대적 옷을 입었다. 이는 미국의 시카고학파가 강조해 온 '소비자 후생'과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를 유럽식으로 수용하고 승화시킨 결과다. 이제 법은 "독점 기업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나쁜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그 행위가 실제로 효율적인 경쟁자를 배제하여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었는가"를 정밀한 경제 데이터로 묻는다. 형식과 도그마의 시대가 저물고, '실증과 데이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유럽 경쟁법 철학의 변천사는 '구조의 보호'에서 '혁신의 보호'를 거쳐 '효율의 입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질서 자유주의의 엄격한 도덕적 기틀 위에 현대 경제학의 과학적 도구가 결합된 지금의 유럽 경쟁법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면서도 정교한 규제의 칼날을 보유하게 되었다. 마길이 던진 공정의 화두는 인텔이 세운 효율의 기준을 만나 더욱 단단해졌으며, 이 철학적 토대는 앞으로 다가올 AI와 초거대 플랫폼의 시대에도 변함없이 시장의 질서를 수호하는 헌법적 가치로 작동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텔 판결 이후 CJEU는 지배적 사업자의 행위가 실제 경쟁을 제한하는지를 정교한 경제 데이터로 입증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유럽 집행위원회(EC)는 빅테크 기업을 조사할 때마다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경제 분석 보고서와 AEC 테스트 결과를 제출해야 했다. 문제는 디지털 시장의 속도다. 구글 쇼핑 사건이나 안드로이드 사건에서 보듯, 규제 기관이 경제적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 수년을 소요하는 동안 독점적 플랫폼은 이미 시장의 생태계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즉, 사법적 엄격성이 강조될수록 규제의 적시성은 상실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최근의 Google Shopping(2021)이나 Google Android(2022) 판결을 보면 일반법원과 사법재판소는 여전히 효과 중심 접근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법원은 구글의 행위가 단순히 경쟁자에게 불편을 준 수준을 넘어, 실제로 인접 시장의 경쟁 구조를 왜곡했는지를 치밀하게 따졌다. 이러한 사법적 태도는 피조사 기업에게는 강력한 방어권을 보장하지만, 규제 기관 입장에서는 '사후적'(ex-post) 규제만으로는 빛의 속도로 변하는 플랫폼 시장을 통제하기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사법적 과부하와 집행의 지연이 바로 디지털 시장법(DMA) 입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DMA는 인텔 판결이 요구한 복잡한 '효과 분석' 과정을 통째로 건너뛴다. 특정 규모 이상의 플랫폼을 '게이트키퍼'로 지정하고, 이들에게 '자사우대 금지', '데이터 결합 제한' 등의 의무를 사전에 부과한다. 이제 집행위원회는 해당 행위가 시장에 어떤 나쁜 효과를 미쳤는지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저 금지된 행위를 '했느냐 안 했느냐'라는 사실관계만 확인하면 된다.


결국, 인텔 판결로 대표되는 효과 중심 접근법의 '지나친 정교함'이 역설적으로 "법원에서 매번 증명하다가는 시장이 망하겠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입증 책임을 아예 제거해 버린 사전 규제(ex-ante) 체제로의 대전환을 이끌어낸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판례법이 쌓아 올린 논리의 탑이 너무 높고 정교해진 나머지, 실무에서는 그 탑을 우회하는 새로운 고속도로(DMA)를 건설한 셈이다.


한편, 유럽과 미국의 경쟁법은 오랫동안 ‘구조와 공정’을 중시하는 유럽식 모델과 ‘효율과 소비자 후생’을 우선하는 미국식 모델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 보였으나, 최근 디지털 경제가 초래한 전례 없는 독점 양상 앞에서 양측의 논리는 급격히 수렴하며 서로를 보완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유럽 사법재판소는 인텔 판결을 통해 미국의 시카고학파가 견지해 온 경제적 실증주의와 ‘효율적 경쟁자 테스트’를 과감히 수용함으로써 법리의 과학적 정교함을 더했고, 반대로 미국은 최근 빅테크 규제 국면에서 과거의 방임적 태도를 탈피하여 유럽이 선도적으로 구축한 ‘게이트키퍼의 책임’과 시장 구조 보호 논리를 적극적으로 이식하고 있다. 이러한 사법적 수렴은 양대 진영이 ‘소비자 후생’이라는 공통의 종착지를 향해 한쪽은 경직된 형식주의를 탈피하고 다른 한쪽은 시장 만능주의의 함정을 경계하면서, 국경을 초월한 거대 플랫폼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범지구적 표준의 법적 인프라를 공동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작가의 이전글리베이트의 위법성 판단 기준과 효과 중심 접근법의 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