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니 Jun 18. 2024

선의 예술

반도체 인문학



네덜란드의 화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an은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대명사로 가장 근원적인 요소 인 점, 선, 면으로만 작품을 만들어 냈다. 수직선과 수평선으로만 표현되는 자신의 작품을 ‘우주의 진리, 근원을 표현한 것’이라고 지칭했다. 선과 선이 만나 공간을 만들며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표현하려 했던 ‘신조형주의’는 현대 건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단순한 기하학적 구조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반도체 또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창 시절 연구실에서 설계 도면에 해당되는 TCAD를 처음 본 경악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수만 개의 선이 서로 얽혀 있고 그 하나하나가 하나의 소자를 동작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보니 미세하고 초정밀한 모습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경외심을 들게 했다. 더 나아가 이 정교한 예술 작품을 정말 작은 회로 기판에 새겨 넣어 하나의 공학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니 상상이 잘 안 되었다. 그리고 이 회로를 내가 직접 그려 과제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학부 시절 공부를 위해서 레이아웃Layout을 직접 그리며 설계의 감을 익혔지만, 최근의 회로 설계와 레이아웃을 만드는 과정은 거의 대부분 코딩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진행되며 그렇기에 칩 하나에 약 200억 개의 소자를 그려 넣는 것이 가능하다.


최적의 배치를 찾는 예술가들


선의 연결 형태가 같아도 어떤 굵기와 크기, 그리고 배치에 따라서 작품의 예술성이 달라지는 것과 같이 반도체 또한 회로 디자인의 형태에 따라 그 특성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선과 선이 만나는 곳은 전자가 통할 수 있는 통로로 저항의 성분이 결정되며, 나란히 달리는 선의 간격은 선 안에 달리는 전자의 속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로를 디자인한 후 실제 실리콘으로 구현하기 위한 배치는 너무나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어떤 배치가 더 아름다운지 찾는 예술가들처럼 레이아웃의 구조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성능 향상을 위해 아이데이션Ideation만 하는 엔지니어도 존재한다.


간단한 CPU를 구현하기 위한 회로(Columbia univ)


반도체 산업은 하나의 설계도면을 가지고 수많은 칩Chip으로 만들기 위해 웨이퍼Wafer에 인쇄하는 산업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웨이퍼는 네덜란드어 wafele에서 변형이 되었는데 이는 벌집을 뜻하는 중세 독어 waba와 엮어서 짜다 뜻을 가진 wafen 가 합쳐졌다. 이쯤 되면 우리는 머릿속으로 와플waffle을 떠올릴 수 있는데 같은 어원에서 온 단어가 맞다. 와플은 원형의 얇은 반죽 위에 벌집무늬로 되어있는 빵인데 웨이퍼가 딱 이 모습이다. 웨이퍼는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원형으로 두께는 대략 750um의 얇은 판으로 그 위에 설계도면을 벌집모양으로 여러 개 인쇄하여 마치 와플처럼 보이게 된다. 반도체 산업 초기 웨이퍼의 크기는 2인치(50mm) 언저리 크기에서 개발이 되었지만 빵의 크기가 클수록 먹을 부위가 많이 있듯 생산성을 고려해 볼 때 웨이퍼 크기도 커져갔다. 똑같은 공정을 진행하는데 크기가 커질수록 인쇄된 칩의 수는 많아져 더 많은 칩을 팔 수 있었고 이에 반도체 산업은 4인치(100mm)를 시작으로 8인치(200mm), 12인치(300mm)까지 자연스레 크기가 커졌다. 더욱더 큰 웨이퍼 산업으로 가기에는 물리적인 문제가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더 큰 웨이퍼는 열에 의한 변형이 더 많아지고, 두 번째는 크기 변화 시 모든 장비와 소재 심지어 반도체 공장의 건물까지 바뀌어야 하는 산업구조의 큰 변경으로 현재는 12인치 웨이퍼에 수렴하고 있다. (물론 더 큰 크기의 웨이퍼 연구는 진행형이다.)


AMD x86 이 실제 wafer에 구현된 모습 (AMD)


선들이 만난 이 모습은 공학 집합체의 예술 조각품이다 


입사 후 처음으로 반도체 라인 안에서 웨이퍼에 새겨진 칩을 실제로 봤던 경험이 떠오른다. 회로가 새겨진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몇십 분 동안 웨이퍼만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던 적도 있다. 수백 개의 공정 중 어떤 공정 상태에서 보느냐에 따라 색과 회로의 모습이 가지각색이라 다른 점을 찾아보는 묘미가 있었다. 어떤 상태에서 볼 때는 루비 색상에 매우 단조로운 패턴이 새겨져 있는 반면, 또 다른 상태에서는 오묘한 사파이어 색상에 좀 더 복잡한 패턴이 덧대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계도에서 봤던 그 수만 개의 직선들이 눈에 정확하게 들어오진 못하지만 웨이퍼 위에 모습은 보석과 같이 영롱하게 빛나며 수많은 별들이 얽혀 있는 우주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선과 선이 만나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수많은 전자들의 이동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이 모습은 인류가 발전시켜 온 총체적 공학 집합체의 예술 조각품이다.




이전 03화 스몰 마인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