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입지적 대전환 : 변방에서 HUB로 !
송도국제도시, 인천공항, 인천대교 그리고 경제자유구역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치밀하게 기획된 사업이다.
이 거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한 장본인인 박 국장의 설명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이 프로젝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기 위한 지도 바꾸기’ 사업이며 그 목표는 대한민국을 세계의 변방(far east)에서 동북아의 허브(Hub)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
거의 20세기 말엽까지 서방의 언론은 대한민국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far east’라는 표현을 썼다. 글자로는 극동이었지만 문맥상으로는 변방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지역 위치상으로나 국가적 위상으로나 세계적으로 공공연한 명칭이었던 ‘far east’에서 보듯이 ‘변방’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냉전시대의 대한민국은 서슬 퍼런 중공과 소련 그리고 휴전상태의 적국 북한으로 가로막혀 있는 물리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이었다.
대한민국은 수출입국과 공업진흥을 기치로 걸고 온 국민이 똘똘 뭉쳐 한강의 기적을 일구면서 배고픔을 면하고 신흥공업국으로서 희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저임금에 기대어 공장을 돌려야 하는 상황으로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표현대로 넛크래커에 낀 호두알 신세를 걱정하고 있는 시기였다.
무엇인가 국가의 미래를 위한 특별한 방안이 있어야 할 때였다.
박 국장이 책임을 지고 있는 도시 인천은 상황이 최악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좋은 공업기반을 가지고 있고 시의 재정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문가인 박 국장이 보기에는 인천은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였다.
130만의 인구를 가진, 대한민국 4대 도시인 인천직할시로 통하는 광역도로 인프라는 경인고속도로 4차선, 경인국도 4차선, 수인산업도로 2차선 단 3개뿐이었다. 시민들의 해묵은 숙원 첫 번째가 경인고속도로를 6차선으로 확장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이루어질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인천이라는 도시형성의 기반인 인천항도 외항선을 보기가 어려웠다. 국제 해상 물류는 부산에서 끝나고 있었던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 올 이유가 없었다.
도시를 지탱하는 일자리의 중심인 공장들은 미래가 차단당한, 인프라가 열악해만 가는 인천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인천의 부지를 팔고 교통 좋은 수도권 외곽지역으로 가면 두 배로 확장된 새 공장을 지을 수가 있었다.
나날이 떠나는 기업이 많아지고, 그 자리는 열악한 수준의 아파트나 연립주택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정부의 ”수도권 억제정책“이었다. 수도권 억제정책은 당시 정부의 최상위 정책이었고, 누구나 공감하는 성역이었다. 이것은 없앨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이었다.
수도권에 위치한 인천의 운명이었다.
인천은 서서히 데워져 가는 가마솥 안의 개구리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박 국장은 문제를 인식했고 도시계획국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하였다.
그리고 해결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이 해결방안은 인천의 지역적 민원이나 어려움의 해결, 또는 지역발전을 요구하는 차원으로는 결코 풀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국가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획기적인 방안이되 인천이 그 역할의 중심이 되는, 그래서 그 막중한 수도권 억제정책마저도 재고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방안을 찾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대한민국이 변방에서 허브(HUB)로 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지도 바꾸기 프로젝트“였다.
박 국장은 이것이 실현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단 하나의 조건을 예측하였다. 그것은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개방된다’는 미래예측이었다.
그래서 정책의 별칭도 ”포스트 홍콩 전략“이라고 명명했다.
이 예측은 적중했고 이 프로젝트는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의 국가경영계획으로 채택되어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가 탄생되고 인천은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간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그와 함께 대한민국도 변방의 시대에서 허브(HUB)의 시대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