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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다움 Jul 03. 2024

인생은 살 만한 것

몇 년 전 병원일에 많이 지쳤던 시기가 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며 환자분들을 만나는 것이 좋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밝게 빛나는 시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분이 극변하고 분노 조절이 되지 않는 환자분이 뱉어내는 인신공격적인 발언들은 병동에서 차분함의 대명사였던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환자분의 증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사람인지라 화가 날 때도 있고 때론 감정 조절이 어려워 근무 중에 화장실에 가서 눈물 한 바가지 쏟은 후 다시 나가서 환자분을 응대하고 간호한 적도 있었다. 물건집어던지거나 사람도 때리려고 하는 등의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환자분들이 자주 입원할 때는 근무시간 내내 잔뜩 긴장하는 시간들의 연속이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많을 때는 병원 밖에서 휴식을 취하며 리프레쉬하는 시간도 필요한데 하필 그 시기에는 인력 문제로 한참 동안 근무 스케줄도 매우 빡빡했다. 병동 근무는 한 달 단위로 근무 스케줄 표가 짜여서 나오는데, 몇 달 동안 오프(쉬는 날)지 않아 5일 근무 후 하루 오프에 바로 다시 근무하길 반복이었다. 그나마 있는 휴일마저 나오이(나이트/오프/이브닝)여서 밤새 나이트 근무 후 아침에 퇴근하여 잠자고 쉬다가 다음날 바로 다시 출근을 해야 했기에 병원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휴식을 즐기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다음 달 근무표가 나왔는데 3일 오프,  3일을 연속하여 쉬는 날을 받게 되었다. 귀한 3일 오프를 그냥 보낼 수 없어서 나는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러나 같이 여행을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3일 오프가 평일이었고 근무표가 평소보다 늦게 나와서 바로 며칠 뒤에 3일 오프 일정이었기에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급하게 휴가를 쓰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같이 여행을 갈 사람을 찾지 못했지만 그때의 나는 무조건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여행을 가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나는 여기를 벗어나서 제주도로 가야 했다.
가뜩이나 사람들에 치여서 지냈기에 '혼자 가는 여행도 오히려 좋아' 라며 나를 찾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때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묵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며 친목도모하는 것이 유행할 때였다. 나도 마침 혼자 여행을 하게 되었지만 나는 나를 찾고 나를 만나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 그런 술자리없는 숙소를 예약했다. 그러나 그런 술자리나 모임이 없어도 숙소 내에서 우연히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온 한 사람과, 친구와 여행 왔다가 친구는 먼저 가고 혼자 조금 더 여행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우연과 인연이 얽혀서 그렇게 각각 혼자였던 세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각자 혼자 제주도를 오게 된 이야기를 하며 어디를 다니거나 다닐 예정인지, 무엇이 맛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나는 제주도에 오면 꼭 먹고 싶었던 김밥집이 있었는데 전화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하지만 전화연결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은 식당이었다. 운 좋게 나는 한 번의 시도로 전화통화에 성공했고 그 어렵다는 예약이니 골고루 맛보자는 생각에 혼자지만 김밥을 3종류나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나는 예약한 시간에 가서 김밥을 받아와서 그들과 함께 나눠먹었다. 나는 함께 나눠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들은 예약하기 힘든 김밥집인데 먹어볼 수 있어서 고마워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것이 셋 다 아무런 일정도 계획도 없이 제주도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이 일정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차를 한 대 렌트하여 함께 다니기로 했다. 각자 별 계획은 없었지만 한 명이 알고 있는 예쁜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고 또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근처 맛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풍경 좋은 곳을 가보는 등 우리는 함께여서 하루를 채울 수 있었고 즐거움은 덤이었다.

셋 중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 감사하게도 운전을 해주셨고 나는 보조자석에 앉았고 가장 나이가 어렸던 막내는 뒷자리에 배낭들과 함께 앉아서 이동하곤 했다.

그날따라 유독 새파란 하늘이었다. 보조자석에 앉아서 바로 앞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완벽했다. 푸른 하늘에 너무나 예쁘게 피어난 흰 구름, 쭉 뻗은 도로 양 옆으로 펼쳐진 초록잎들의 나무들, 살짝 연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상쾌한 공기. 씽씽 쾌활하게 달리는 드라이브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약간의 흥분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농담들.
그 순간 떠올랐다. '인생은 살 만한 것'. 나는 이 순간을 꼭 기억하기로 했다.

'인생은 살 만한 것.'
이 생각과 느낌을 고이 접어 내 마음속 기억의 유리병에 고이 넣어두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언제든 꺼내서 생생히 펼쳐볼 수 있도록.
그리고 힘든 시기를 지나는 이 시점에 나는 자주 그 기억을 떠올린다.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느꼈던 그 느낌, 감정, 공기, 분위기를 모두 떠올려본다.
지금은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이 힘든 생을 왜 해야 하나 싶기고 하지만, 분명 인생은 살 만한 것이었다. 지금의 나모르겠지만 그때 느꼈던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느낌은 분명 진실이었다.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나를 살게 만든다.
나의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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