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앞 챕터에 이어) 타절과 재하도급 제한 관련 개론
① 타절
타절(打切). ‘깨뜨려 끊어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한자어의 잔재라고 합니다만… 노가다판에서 일본식 용어 바꾸는 건 일개 법무담당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냥 보편적인 용어 쓰겠습니다.
뭐, 저도 법 배웠으니 법률적인 용어 병행할 수는 있습니다. 법률적으로는 ‘(하)도급계약 해지’가 되겠죠. 기존에 공사 진행한 걸 다 들어내고 소급무효로 다루는 ‘해제’는 아니고, 장래 이행분에 대해서만 계약을 종료하는 걸 말합니다.
민법 교과서 해제해지 편에 나오듯이, 해지는 ‘합의해지’와 ‘법정-약정해지’가 있습니다. 합의해지는 양 당사자의 의사합치로 해지하는 것이고, 법정-약정해지는 법률 또는 계약에 정한 바에 따라 일방당사자의 의사만으로 (상대방이 반대하더라도) 해지하는 것이겠죠. 교과서 상으로는 구분하기 쉽습니다. 밥 아저씨의 명대사 ‘참 쉽죠?’가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현실은… 합의가 합의가 아닙니다. 약정사유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과연 계약상 해지사유인지 모르겠고, 계약상 해지사유도 절차 제대로 지켰는지 모르겠으며, 내가 과연 법무담당자인지 어느 한여름 밤의 황금나비인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타절. 이건 ‘노가다판에서 전문공사업체 하나를 들어내는 작업’입니다. 매일매일 일용근로자 상대하면서 잔뼈가 굵은 업체 사장님과 그 부하직원들을 상대로 ‘당신들이 공사 제대로 못하고 이대로 가면 우리 원청사까지 다 죽으니 당장 나가슈!’라고 얘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진심 레알 트루 리얼리 ‘조오온나 빡센 일’입니다.
물론, 우리 법무담당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전문업체 관계자들과 몸싸움 해 가면서 들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문송하게 인문계열 나와서 법조문 좀 본 건 아무 의미 없겠죠. 가아끔 ‘법무도 현장 회의 들어가라!’고 할 때가 있지만, 그런 때에도 법조문과 계약에 있는 얘기만 하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하청업체가 포크레인 끌고 와서 현장사무실 뽀개 버린 현장’에 열흘 가량 내려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얘기는 다른 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현장에서 직접 업체와 협상하는 건 현장부서 분들께 맡기기로 하고. 우리 법무담당자들은 ‘법률과 계약에 근거한 타절(해지)사유’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법무담당자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민법상 ‘법정 해제해지 사유’로 두 가지가 나옵니다. 이행지체로 인한 해제해지. 이행불능으로 인한 해제해지.
(불완전이행에 대한 학설도 있지만 그건 현실에서 거의 적용할 일이 없더군요. ‘이행거절을 이행불능과 동일하게 본다’는 건 자주 써먹습니다.)
이행불능 상황이면 간단합니다. 계약이행을 못하는데 바로 해지해야죠. 법인의 경우 파산 내지 이에 준하는 절차가 개시된 경우 이행불능으로 볼 수 있고, 대다수 계약서에서도 일방이 법정관리 개시되면 별도 통지 없이 해제해지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행지체면… 민법상으로는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최고한 후 그 최고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이행을 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해제해지 할 수 있습니다. 상당한 기간이 얼마인지는 민법에 안 나와 있지만 대략 상관행으로 결정하면 되겠죠.
물론, 해제해지 관련 민법 조항들은 임의규정이기 때문에 이와 달리 정할 수 있습니다. 즉, 이행지체의 경우에도 ‘별도 최고 없이 즉시 해제해지한다’는 조항을 계약에 반영할 수 있고, 건설공사계약에서는 ‘공사예정일에 비해 ~일 지연되었을 때’ 내지 ‘공정율이 당초 예정보다 ~% 떨어졌을 때’를 기준으로 하여 즉시 해제해지할 수 있게 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런데 말입니다.
앞 챕터에서 ‘하도급법의 강행성’을 강조했었습니다. 일반 건설공사계약에서는 이행지체시 최고 없이 해지하는 조항을 두어 민법의 임의규정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만, 하도급계약에서는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하도급법이 적용되는 하도급계약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행지체시 최고 없이 해지한다’는 조항을 두면 안 됩니다. 그런 조항 두면 ‘민사법상 하수급인의 의무를 부당하게 가중하는 조항’으로서 부당특약이 되겠죠.
그리고, 공정위는 각 사업유형 별로 ‘표준하도급계약’을 발표합니다. 이 표준하도급계약에는 당.연.히. ‘이행지체시 상당기간을 정하여 최고하고 그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해제해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표준하도급계약이 ‘부당특약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응의 기준이 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결국, 하청업체가 공사를 제대로 못하고 미적거려도 바로 해지할 수 없습니다. 현행 하도급법과 공정위 표준하도급계약과 민법 이행지체로 인한 해제해지 규정을 종합하면 그렇게 해석됩니다. 이렇게 미적거리더라도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최고’한 후 해지해야 합니다.
거기에 또 하나. 앞 챕터에서 ‘모든 계약 및 지시 서면 작성’도 강조했었죠? 하청업체가 공사를 미적거린다는 사실, 그에 대한 입증자료 등등을 모두 원청업체가 만들어서 공문으로 하청업체에 통지하고 거기에 상당한 기간을 부여하여야 하며 최고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식 해지통보 날려야 합니다. 서류상으로도 꽤 할 일이 많아집니다.
거기에 결정타. 하청업체가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하게 공사 지연되는 경우는 그나마 낫지만, 가끔 경우에 따라서는 [고의로 태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외로 꽤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고의태업하는 업체들은 이미 상당한 분쟁경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공사를 방만하게 하면서 ‘공정위 신고 선빵!’을 날리기도 합니다. 원청의 갑질로부터 나약한 중소기업을 보호해 주라고 만들어 놓은 하도급법이 ‘을질의 선빵 수단’으로 바뀌는 거죠.
(이걸 노리는 전문변호사도 있습니다. 일단 공정위 산하 조정원에 조정신청한 뒤 ‘과징금 벌점 무섭죠? 관급공사 계속 하고 싶으면 빨리 합의해요. 조정 결렬되면 바로 공정위 신고 들어갑니다.’ 라는 건 기본 업무 프로세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러한 고의태업은 ‘현장점거’와 병행해서 이루어집니다. 일은 안 하면서 현장에 눌러앉아 퇴거도 안 하는 상황. 원청업체는 공사지연시 하루에 지체상금 몇천만원씩 손실 봐야 하는데 현장 뽷 틀어쥐고 버티는 상황. 이것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고의태업 + 공정위신고(조정) + 현장점거 삼단콤보 들어오면… ‘건설업자가 조폭과 결탁하는 이유가 이런 거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 합니다. 공사현장 근처에 나와바리 갖고 있는 조폭이 찾아와서 팔뚝에 잉어문신 보여 주고 ‘1억 주시면 제가 싹 들어내겠습니다’ 라고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응?)
물론! 법무담당자가 그러면 안 되겠죠. 법무담당자는 ‘법대로, 계약대로’ 해야 합니다. 공정위에서 표준하도급계약 만들었으면 거기에 따라 상당기간 정해서 최고하고 그 상당기간 경과할 때까지 기다려 준 후에 다시 해지공문(타절공문) 날려야 합니다.
업체가 반발할 경우에 대비해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고 그 증거들을 공문에 첨부하는 것도 챙겨야 합니다. 최초 작성한 예정공정표를 잘 이해하고, 업체가 이 예정공정표대로 공사를 못하고 공사지연이 발생했다는 점을 소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며, 해당 공사지연 만회대책을 합리적으로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업체 측이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잘 해야죠. 그런 거 하라고 회사에서 법무담당자 월급 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타절 얘기를 여기서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한 가지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타절 이후 조치’에 대한 것입니다.
전문공사 시공하는 하청업체들도 다들 사업자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성실하게 계약이행하려 합니다. 대부분 그러합니다.
그런 전문업체들이 공사 제대로 못하고 타절까지 왔다면, 이건 이미 자금사정이 매우 악화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어디서 뭘 하면서 돈 날려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미 돈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 업체와 거래한 ‘제3자’들도 돈을 제대로 못 받았겠죠?
가장 치명적인 게 ‘노무비 체불’이었는데, 이는 최근 [노무비닷컴]이라는 노무비 직불 전산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상당부분 완화되었습니다. 물론 100% 해결은 안 되지만 어지간하면 노무비는 별도 처리되어 지급됩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죠.
대신, 현장 함바식당 식대 / 하청업체가 사들인 자재대금 등이 미납(체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업체가 돈을 미리 지급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못 갚은 거죠.
이 함바식당이나 자재업체들은 모두 원청업체에 돈 달라고 뛰어옵니다. 당연히 원청업체는 안 주려고 하죠. 하청업체에 줄 돈 다 줬는데 추가로 돈 더 내보내면 앉은 자리에서 손해 보잖아요.
가장 좋은 것은, 하청업체에 줄 돈을 유보하여 함바식당/자재업체 쪽에 지급하는 겁니다. 일종의 채권양도가 이루어지는 건데, 건설업에서는 ‘직불’이라고 합니다.
물론 직불로 완전한 해결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럼 뭐… 또 현장점거 문제로 넘어가야죠. 법무담당자가 어디까지 개입하고 지원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② 하도급/재하도급 제한 관련
종합건설사에서 법무업무를 하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영역이긴 한데, 하도급관리 중에서 ‘재하도급 제한’과 관련한 일도 법무담당자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전문건설사 법무라면 필수항목이구요.
간단히 설명하면, 하도급 / 재하도급을 할 때 건설산업기본법 및 시행령에 정한 다음 각 요건을 지켜야 합니다.
ⅰ) 전체 공사금액의 20% 범위 내에서
ⅱ) 특허, 신기술 등 전문적인 기술능력을 보유한 전문업체에게
ⅲ) 발주자 등 상위사업자의 승인을 받아
하도급을 해야 하고, ‘재하도급’이 일어날 경우에는 위 요건에 더해 대금지급에 대해 지급보증 + 문제 발생시 직불합의 등등의 요건을 추가로 충족시켜야 합니다.
종합건설사는 이 하도급/재하도급 제한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원도급인인 종합건설사가 각 전문건설사에게 1차 하도급을 줄 때에는 대부분 위 요건을 충족합니다. 전문공사 별 금액이 전체 공사금액의 20%를 넘기는 어렵고, 해당 전문업체는 당연히 전문기술이 있으며, 발주자 등도 업체 상대 양호하면 쉽게 승인해 줍니다.
실제 문제는 ‘재하도급’에서 자주 일어나죠.
발주자-원청(종합건설사)-하청(전문건설사) 구조에서, 하청이 다시 재하청을 줄 때가 있습니다. 재하청이 재재하청을 주는 경우도 있구요. 옆 나라 일본 같은 경우에는 9차 하도급까지 나올 때도 있다고 합니다.
현행 건산법은 이러한 재하도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위 ‘20% 범위 + 전문기술 요건’ 등등의 요건 하에서 엄격하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법령은 그렇습니다. 법령은.
그러나 현실은…
이 재하도급 문제는 건설업의 고질적인 관행이고, 현장 오야지(십장. 시공참여자)의 품떼기 계약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다만 이 글은 ‘개론’이므로, 위 건산법상 요건만 살펴보는 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공사관리 부분 개론설명이 끝났네요. 이제 다음은 ‘준공승인’과 ‘하자보수’입니다. 하자보수 부분도 길게 쓰려면 엄청 내용이 많지만, 개론에 맞게 간략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