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1.
나는 어늬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읍니다.
<나의 님은 어데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겄읍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서요 검이여>
<너의 가랴는 길은 너의 님의 오랴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읍니다>
<너의 님의 오랴는 길을 너에게 갖다 주면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데도 너의 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서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 보겠읍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랴는 길에 주어라. 그리 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리 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읍니다>
검은 <그러면 너의 님을 너의 가슴에 안겨주마> 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 주었읍니다.
나는 나의 님을 힘껏 껴안았었읍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나의 두 팔에 비여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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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용운 선생님의 님의 침묵 정본에 나오는 시들 중 하나입니다. 잠 없는 꿈을 꾼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잠 없는 꿈이란 무엇인가요.. 잠과 꿈이란 불과분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단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齊物論(제물론)에서 장자는 말하고 있다.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아주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잠을 깨니 틀림없는 인간 나였다. 도대체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이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인간 莊周(장주)와 나비와는 분명코 구별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物化(물화)라는 것이다.” 장자는 또,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이 생기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만물이 하나로 된 絶對(절대)의 경지에 서 있게 되면, 인간인 장주가 곧 나비일 수 있고 나비가 곧 장주일 수도 있다. 꿈도 현실도 죽음도 삶도 구별이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으로 느끼고 하는 것은 한낱 만물의 變化(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胡蝶春夢(호접춘몽), 莊周之夢(장주지몽)’이라고도 한다. 莊子(장자)
불과분의 떨어지지 않는 관계가 잠과 꿈이다. 오죽했으면 호접몽 胡蝶春夢(호접춘몽), 莊周之夢(장주지몽)이라는 고사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잠이 없는 꿈이라니 재목부터 표현에 맞지 않는다. 잠을 자지 않고 꿈을 꾼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 시의 시작은 이러하다.
나는 오늬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날 밤에도 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고 자지 않고 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라는 한용운 선생님의 님에 대한 표현이다. 이 표현의 함축적 의미 즉 오늬 날 밤에 잠 없는 꿈으로 대변한 것이다. 이 그리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선생님의 이 님의 침묵에 대한 의미 즉 군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또한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 군말 즉 발문은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생의 대상인 석가, 칸트의 대상인 철학이 말해 주고 있다. 예를 든다면 칸트 철학은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감히 스스로 생각하는’(Sapere Aude) 계몽주의적 주체의 철학적 완성이다. 님에 대한 그리움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온 시 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로의 끊임없는 성찰의 대상이 바로 남이며, 이 님이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아가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그리워 해 본적이 있는가..
<나의 님은 어데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겄읍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서요 검이여> 라고 님을 찾는 표현이 나온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 주세요 나에게 라며 간절함을 호소한다.
그리워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간절한 마음 하나가 마음을 흔든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읍니다>
이 구절은 님에 대한 확고한 의지이자 마음을 드라낸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기만 하면 됩니다. 라는 것에서 나는 마치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음을 느낍니다. 라는 것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나는 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음을 느낀다는 표현을 잘 사용하는 편인데, 이것은 그리움을 표현하는 문장에는 이것만큼 마음을 잘 어우르는 표현은 없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대상이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대상이 없는 그리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는 대상이 있는 그리움이야 말로 서로가 서로를 그려낼 수 있는 미학 중에 가장 높은 단계의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시 잠 없는 꿈은 한용운 선생님의 숨겨진 백미라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그대가 그립습니다.
오늘 하루 잠 없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 하나 던져 보며 이 글을 쓴다.
*이 간절함의 주체는 이 시가 완성된 시기로 보면 1926년 일제 강점기 시절이니, 조국의 강제 병탄에 대한 울분의 마음 즉, 해방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