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기의사 Nov 19. 2024

셋이 되었다가 둘만 남은 나의 출산기록

  36주 1일 차 아침,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더니 갑자기 양수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분홍빛 액체가 흘러나왔다. 보자마자 양수가 아닐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전화해 서울에 올라가자고 했다. 출근하자마자 정리하고 퇴근해야 하는 남편을 한 시간 정도 기다려 아기를 낳고 심장수술을 하기로 했던 병원에 도착하였다. 병원에 오자마자 나는 응급 제왕절개수술이 잡혔고 아기는 받아 줄 병실이 없어 낳고 나서 전원해야 한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병원의 순리를 잘 알기에 감정에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 다행히도 없는 자리를 겨우 만들어 내어 신생아중환자실 준비가 되었다고 듣고 나는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급하게 올라온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월의 어느 날, 오후 3시 20분 우리 아기는 첫울음을 터뜨렸다. 잘 울고 있었고 심장박동이 괜찮았는지 예상치 못하게 수술실에서 나에게 얼굴도 보여주었다. 그 후로 나는 수면마취로 잠이 들었고 세 시간가량 흐른 것 같았다. 남편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아기의 소식을 몰랐다. 나는 산부인과 병실이 없어 남편과 떨어진 채 보호자가 상주할 수 없는 집중치료실에 혼자 있었고 남편에게 아기가 그래도 태어나서 잘 울었다고 전했다. 우리는 희망적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소아과 전공의와 면담을 했고 산소포화도가 잡히지 않아 저산소성 뇌병증으로 장애가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임신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아기에게 장애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 나는 너무 힘들고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아."

내 질문에 남편이 얘기했었다.

"그래도 우리 아기잖아. 사지 멀쩡해도 사람 구실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아기가 좀 아파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잘 보살피고 키우면 돼. 남한테 봉사하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 아기인데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때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남편은 임신 기간 내내 아기가 생긴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자고 했었는데, 건강한 아이를 바란 것만으로도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고 있나 싶었다.




  그 이후는 예상에 없던 전개라 더욱 충격이 컸다. 수술을 하는 소아심장외과 교수님은 폐혈관들이 얇고 폐의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을 하더라도 계속 다른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수술을 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셨다. 소아심장과 교수님은 선천적으로 폐혈관의 발생이 덜 된 것 같아 보인다고 했고 무리해서 수술을 진행했던 이전 케이스들의 경우 몇 달간 고생 후 모두 예후가 좋지 않았다고 하셨다. 외과의가 수술을 못한다고 말씀하신 거라면 우리가 치료를 더 요청하는 건 아기가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라는 판단에 DNR(연명의료중단)에 동의하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에 튼튼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무리해서라도 치료를 요청했어야 했나 잠시 간 후회도 하였다.


  새벽 4시가 갓 넘은 시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아기가 많이 안 좋아서 당직의가 사망 선고 전에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는 전화였다. 분만장에서는 아직 내가 보행을 하면 안 되는 상태라 침대 채로 나를 신생아중환자실에 데려다주었다. 의료진은 아기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고 이후에 우리가 안을 수 있게 시간을 준다고 했다. 튼튼이가 떠나기 전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지금 안아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아기에게 달려 있던 라인과 기관삽관한 것을 모두 빼고 심전도 리드만 단 채로 튼튼이를 안았다. 아기의 심장은 예상보다 오래 뛰어 주어 마음에 담아 온 말을 모두 전해 줄 수 있었다.


"튼튼아, 사랑해.

엄마 아빠한테 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우리 정말 행복했어.

먼저 가서 아프지 말고 즐겁게 지내고 있어.

엄마 아빠도 좋은 모습으로 천국에 꼭 만나러 갈게.

아무것도 못해줘서 너무 미안하고 사랑해."


  2분 정도 흘렀을까. 당직 전공의가 사망선고를 하였다. 튼튼이를 한동안 더 안고 울다가 보내주었다. 우리 아기지만 너무 예뻤다. 너무 예뻐서 더 속상하다고 남편과 얘기했다. 그래도 고통받지 않고 편안하게 눈감은 모습으로 보내주어 다행이라고. 아기는 나와 남편을 반씩 빼닮은 채 세상에 나와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눈을 감고 미소 지으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튼튼이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다음날 소식을 들으신 산부인과 교수님은 산전 초음파에서는 혈관발달이 잘 되었다고 하셨고 태어나 바로 폐혈관의 수축이 심하게 온 것으로 보인다고 하셨다. 소아심장과 교수님과는 다른 판단이었지만 이래나 저래나 우리 아이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나도 이 병원 아니면 못 살릴 것 같아 무조건 여기서 낳게 만들었는데 다른데 전원 보내고 잘못되었으면 한동안 마음이 안 좋았을 것 같아요. 여기서 불가능한 거면 어디서도 안 되는 거니 미련 없이 보내줍시다. 살면서 맞을 매 중에 제일 큰 매를 젊었을 때 미리 맞았다 생각하기로 하고." 교수님이 위로의 말씀을 전해주셨고 깊이 생각해 주셔서 감사했지만 그 말씀이 그때는 그리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튼튼이를 보내고 나서 계속 이게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꿈을 꾸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내가 입원 당시 요청한 1인실이 없어 모자동실을 하지 않는 환자로 옆자리 환자를 배정해 주었지만, 새벽 댓바람부터 다른 병실의 신생아들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잠에서 깨었다. 다음날 1인실이 나서 병동에서 병실을 옮길지 물어보았으나 나는 내 몸조리가 우선이 아니었고 아기도 없이 호사를 누리고 싶지 않아 그대로 2인실에 남았다. 저녁에 내 옆자리로 다른 산모가 입원하였다. 밤새 진통을 겪다가 응급수술에 들어가 아기를 출산한 옆자리 부부의 기쁨을 고스란히 전해 들으며 나는 밤새 숨죽여 울었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아이와 사별한 소아과 의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