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아기의 태명을 정할 때 나는 6개월 전 떠나보냈던 까꿍이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아기집과 난황이 예상보다 늦게 보여 불길한 예감에 나는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남편은 다음 진료 때는 아기가 까꿍하고 나타날 거라며 까꿍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까꿍이는 우리를 금방 떠나 하늘의 별이 되었다.
우리는 몇 달 후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떠났고 여행 후 바로 두 번째 아기천사가 찾아왔다. 건강하라는 마음을 담아 아기의 태명은 튼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임신 초기에 약간의 질출혈 및 실신을 겪기는 했으나 튼튼이는 20주까지 무럭무럭 잘 자라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밀 초음파부터는 대학병원에서 다니려고 초진을 보았는데 밝게 맞아주시던 교수님의 목소리가 떨리고 정적이 흐르면서 이상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글쎄... 좌심방으로 들어가는 혈류를 못 찾겠어요."
그렇게 의뢰서를 받아 일주일 후 서울의 내로라하는 상급종합병원에서 다시 한번 진단을 확인하였다.
남편에게 물었다.
"튼튼이는 왜 튼튼하지 않을까?"
남편이 말했다.
"나는 우리 튼튼이가 심장병이 있다는 걸 잊기로 했어. 튼튼이는 그냥 건강한 아기야. 수술 한 번만 받으면 돼. 다른 데는 다 괜찮다고 하셨잖아."
계류유산을 한 번 했을 때까지도 다섯 명 중 한 명은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확률이라는 생각에 슬픔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튼튼이가 심장병 진단을 받았을 때는 '도대체 왜 나한테만?'이라는 생각이 드디어 들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기의 질환은 10만 명 중에 5-6명의 확률로 생길 수 있는 드문 질환이었는데 출생 직후 수일 이내에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병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미리 진단이 되어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의학을 공부할 때 인구 집단 전체로는 아무리 낮은 발병률이어도 당사자는 100%로 질병을 겪는다는 개념을 중요하게 배웠었다. 이미 환자가 된 이상 확률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기를 심장병으로 떠나보낸 보호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환자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들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병원에 있으면서 내 일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었는데,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임신 중 슬픔이 불쑥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었다. 초짜 전문의를 어찌 그리 믿고 손주를 데리고 매주 두 번씩 힘들게 찾아오시는 할머님을 뵙고 나면 점심시간 내내 울기도 했다. 아기가 아프면 다시 복직하지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새 단골 아이, 보호자들과 정이 들어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우울했다. 비교적 건강한 아이들이 경증의 질환을 진료하러 나를 찾으나 그 환자들을 보면 어김없이 슬퍼졌다.
‘우리 아기도 남들처럼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늘 맴돌았고 주위의 꽃을 보아도 눈물이 났다. ‘우리 튼튼이가 퇴원하고 이 예쁜 꽃들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즈음 유독 여러 명의 심장병 환아들을 만났다. 그동안 지나쳤던 심장수술 자국을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보호자들이 먼저 병명을 얘기해 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가 청진하면서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꼭 물어보았다.
"TAPVR로 수술받았었어요."
"폐동맥협착이요."
"수정대혈관전위로 수술받고 경과관찰 중이에요."
수술받고 나서 건강해졌거나, 완치는 못했더라도 집으로 퇴원해서 나에게 오는 환아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잘 될 거라고, 걱정 말라고 되려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