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큰아들의 아들

학연(學緣) 만들기

by Marisol

청담동에 사는 엄마들은 자식들의 교육에 열혈적이라고 들었다. 어린 자식들의 영어교육에 과감하게 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조기유학을 보내는 지역에도 권위와 부를 자랑하는 도시가 따로 있다고 한다.


학부모들도 대부분 일류대학 출신이고, 남편들의 직업도 의사나 변호사, 교수 등 우리나라에서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훌륭한 집안의 자식들이 조기유학으로 모이는 곳으로 새로 부상하는 도시.


미국의 얼바인이라는 도시는 한국의 대치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담동 엄마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남편을 폐인 기러기 아빠로 만들면서 모여드는 곳이라고 한다.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좋은 집안의 자식들과 인맥을 만들기 위해.


춘자는 성당에서 만나는 자매님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들의 며느리가 손주들을 데리고 호주니 뉴질랜드니 캐나다에 갔다며 그게 진정한 교육이 되겠냐며 쯧쯧 혀를 차며 불만스러워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통감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그중, 이사를 오게 되어 처음 인사를 한다는 한 자매님이 그 불만에 한 소리를 거들고 있다.


“아이고, 자매님들. 제 며느리는 미국의 뭐라나… 조기 영어교육의 신천지라고 불리는 얼바인이라는 도시로 간다고 서초동 아파트를 팔았다네요. 곧 손주들을 데리고 간다고 며칠 전에 인사 왔더라구요. 내 아들은 기러기 아빠가 되고, 이젠 내 손주가 아니라 해외 동포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자식을 미국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부모들이 내 자식만은 아니구나 하고 춘자는 며칠 전 큰아들 내외와의 대화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고 남편이 지내던 방을 정리하고 있는 데 큰아들과 며느리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남들도 다 보내는 영어 조기교육에 손주 태광이도 보내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니 새끼 니가 보내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말리겠냐 하면서 우물쭈물하는 며느리를 쳐다보았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얼굴이라.

그래 돈이 많이 들겠구나 했더니 바로 그 대목에서 때를 놓칠세라,

갑자기 코맹맹이 소리로 바뀐 며느리 박씨.


“그래서요 어머님. 다른 아이들은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큰 도시로 가는데요,

태광 아빠 사업이 요즘 부진한가 봐요.

부동산 경기가 안 좋은 건 어머님도 아시죠?

보내긴 해야겠고 해서 대도시에서 좀 떨어진 시골도시로 보내려구요.

그리고 알아봤더니 부모가 유학생이면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낼 수가 있다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학교에 다니면서 태광이 공부시키려고요.

제가 힘들어도 아들을 위해 같이 고생해야죠 뭐~”


“그래? 시골 도시 이름이 뭐냐”


“어머님은 들으셔도 모르실 거예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예요.

얼바인이라고요”


청담동 엄마들이 모여든다는

얼바인…


며느리 이게 날 등신으로 아나.

하고 며느리의 움찔거리며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입술 끝을 보면서 무슨 꿍꿍이가 있구나 하고 춘자는 얼굴을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마침 세계의 아름다운 도시를 설명하는 프로그램에 호주의 멜버른의 광경이 펼쳐졌다.


나도 저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지.

그런데 난 저런 아름다운 아니, '아름답다고 하는' 광경을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성당에 다니는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어 보겠다고 며느리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천주교의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견진성사까지 받고 미국에 가겠다며 며느리는 샐 샐 거리며 춘자에게 태광이와 자신의 유학에 쾌히 찬성해 주길 부탁했다.

춘자의 큰아들을 혼자 두고 가니 염치가 없어서일 테다.


춘자는 며느리의 교활한 욕심을 알아채고 있었다. 아마도 지 아들 태광이 교육을 핑계로 며느리 자신의 유학생활이라는 욕심을 시꺼먼 뱃속 어디엔가 숨겨두고 있으리라.


니 새끼 인생이니 니들이 알아서 하거라.


견진성사를 받은 며느리는 마치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를 한 선수처럼 만세를 부르듯, 손자 태광이를 데리고 손을 흔들며 미국으로 떠났다.


춘자의 큰아들은 그렇게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처자식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나니 이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며, 이참에 자기도 대학원에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간만에 집밥이 먹고 싶어서 왔다는 큰아들이 밥을 씹으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는데 대학원에 들어갈 수가 있나? 하는 춘자의 물음에 안그래도 큰 눈을 부릅뜨고는 젓가락을 딸그락, 난폭하게 내려놨다.


"엄마! 요즘 대학교는 공부 가르치는 곳이 아니야! 대학원은 더 그렇구.

대학교 졸업을 안 해도 회사 임원이나 사장이면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대학원이 많거든!"


큰아들이 운영하는 기획 부동산과 같은 업종의 회사 사장들은 거의 대학교에서 전공으로 부동산학과를 졸업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최종학력이 대졸이 아닌 큰아들이 그 무리에 끼어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들보다 상위의 학벌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먹을 식탁에 꽝! 내려치면서 두 눈에 힘을 빡! 주고 춘자를 쳐다보는데, 춘자는 호랑이 눈깔이 바로 이런 눈 일거라고 생각하며 가슴이 뜨끔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으니 정식으로 학위를 받을 수는 없지만, 거액의 등록금을 내고 서울 모대학의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에 들어갔다며, 뒤늦은 나이에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강의를 들으려니 힘드네, 하면서도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부동산 회사 사장들과 인맥을 만들어 나가면 사업에 좋은 인연이 될 거라고 짐짓 자신의 결정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혈연(血緣), 지연(地緣)의 복이 없는 큰아들에게 학연(學緣)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큰아들은 혼자 밥 먹기가 쓸쓸하다며 불쑥 춘자를 찾아오는 날이 잦았다.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 며느리와 태광이가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두서없이 이런저런 일들을 떠들어대곤 했다.


얼바인에는 한국에서 유학온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의 엄마들이 같이 온 경우가 많았는데, 그 엄마들은 주말에 교회에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취미를 통한 사교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현지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태광엄마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꽤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며 주절주절 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자식의 이야기를 술잔에 담아 자신의 고독과 함께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기는 모습을 보면서 춘자는 속에서 부글부글 부화가 치미는 것을 느끼곤 했다.


가족들을 끌어들여 축하를 받는 '호들갑'을 떨며 성당에서 견진성사까지 받은 이벤트는 며느리 자신과 태광이의 미국유학에 탐탁지 않게 생각한 춘자에게서 찬성 '한 표'를 받기 위한 '쌩 쇼' 였던가.


며느리 박 씨는 진정으로 나를 등신으로 알고 있군.


춘자는 큰아들만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큰딸과 박사장의 사기행각으로 큰아들은 아직도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유령사업으로 사기를 주도했다는 오명을 벗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 시작한 사업의 명의도 새로 이사 간 아파트의 명의도 자동차 명의도 큰아들의 명의로 하게 되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든 명의는 며느리의 명의로 되어있다.


큰아들 ‘서종태’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춘자는 큰아들에게 어떤 파국이 다가올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광이가 태어나기 전에 꾼 춘자의 꿈이 태광이의 태몽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일이 계속 발생했다.


춘자의 손바닥 가득 묵직하게 느껴진 커다란 고추가 삽시간에 검게 썩어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던 그 꿈.


태광이의 태몽이 맞았다.


검게 썩어버린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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