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그릇

by 루아 조인순 작가

몇 년째 매실액을 담았던 항아리를 다음 해부터 된장을 담그려고 비웠다. 처음엔 귀찮아 새로 하나 살까 했는데 생각을 접었다. 이제부터라도 어지간하면 살림을 늘리지 않을 생각이다. 집에 있는 것들을 재활용하며 조금씩 짐을 줄여나가려고 한다.


가족이 많든 적든 사람 사는 것은 같아 집안에 늘어나는 것이 자질구레한 살림이다. 사람의 심리는 우선 불편하면 그것을 모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건들이 늘어난다. 아무리 안 사려고 해도 계속 눈에 들어와 결국에는 언제 샀는지도 모르게 집안에 그것들이 들어와 있다.


조금 늦는 감이 있지만 줄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3년 이상 입지 않는 옷과 낡은 이불들을 모아 옷은 재활용함에 넣고, 이불은 쓰레기 봉지 큰 것을 사서 넣어 버렸다. 옷은 버리는 것이 아니고 불우한 이웃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다. 덕분에 장롱 서랍이 할랑할랑 해졌다. 머지않아 나도 모르게 또다시 빼곡히 채워지겠지만 지금은 널찍한 장롱을 보니 마음도 넓어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젊은 시절 질그릇을 좋아해 정신없이 사들였다. 그렇게 들여온 여러 가지 항아리와 질그릇들이 구석구석 쌓여있다. 그냥 버리자니 아까워 나처럼 이런 그릇을 좋아하는 친구를 불러 이것저것 챙겨줬다. 어른들이 나이가 들면 질그릇이 무거워 쓰지 못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 난다. 나도 이젠 50대가 되니 손목이 아파 불편하다. 나머지는 모아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좋다고 냉큼 가져갔다. 다른 그릇과 달리 질그릇은 물로 우려내 아무거나 담아도 되고, 어항이나 화분으로 사용해도 운치 있어 좋다.


된장을 담그려면 항아리에 물을 담아 채우고 비움을 반복하며 일 년 정도 우려내야 한다. 장맛은 항아리가 중요하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새로 갈아 주는데 오랫동안 매실청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한 달이 지나도록 물에 달달한 냄새가 나며 작은 벌레들도 생긴다. 제때 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시큼한 냄새가 나며 검다. 새로운 것을 품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몸을 깨끗이 닦고 있다. 그렇게 일 년이란 긴 시간을 견뎌내야 비로소 과거를 잊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장이라는 귀하고 소중한 음식을 품을 수 있다.


사물인 그릇도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향기가 다르듯 사람도 그 주위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른들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보니 아무리 친구를 가려 사귀고, 바른길을 가고자 노력해도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심연을 들여다보면 혼탁해져 있다. 환경의 영향을 받아 그렇다고 변명해 보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린 시절 저녁을 먹고 평상에 누워 어둑한 하늘을 쳐다볼 때 은하수 기차가 끝없이 지나가고, 옥구슬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 별을 삼태기로 퍼서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부을 것 같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마음속 그릇에는 무지개가 가득했었다.


성장과 함께 어른이 되면서 그 그릇에는 온갖 추악하고 부끄러운 욕심과 이기심, 시기심과 아집으로 가득 찼다. 항아리를 우려내 새로운 것을 담는 것처럼 마음속 그릇도 깨끗이 우려내 어린 시절 담았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를 다시 담을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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