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부터 내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었다.
내 눈의 상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 부어오른 뒤였고, 결국 난 학교를 조퇴한 뒤 병원으로 행했다.
처음에는 지훈도 나를 걱정했다.
"눈 많이 아파?"
지훈의 말에 난 항상 괜찮다고 웃기만 했다.
지훈은 이런 내가 답답하지도 않은지 한숨만 푹푹 쉬어대며 아무 말하지 않는다.
난 사람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고, 눈치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지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지훈은 나를 학교 후문 앞까지 데려다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점심시간 전에는 꼭 돌아오고."
"알겠어."
난 손을 흔들어 지훈에게 답가를 보내고서 길을 나섰다.
눈가가 점점 빨개지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니 시야가 흐려졌다.
마치 무언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난 그렇게 비틀대며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대의 병원에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사람이 거의 새떼처럼 득실득실하게 병원 로비를 가득 채웠고, 그 바람에 난 병원 저 구석에 있는 의자에 쭈그려 앉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티브이 옆 모니터에 나오는 순서 표를 보면서 내 차례를 초까지 세어가며 기다렸다.
한시라도 더 빨리 이 부어오른 눈을 치료하고 싶었다.
난 오른손 검지로 내 눈을 비비며 부푼 눈꺼풀을 확인했다.
여전히 흉하고 끔찍한 몰꼴이다.
드디어 내 진료 차례가 되고, 난 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래끼 같은데요?"
"다래끼요?"
"네, 안약만 꼬박꼬박 넣으면 나을 거예요. 잘 회복 안되면 그때는 병원 다시 오세요."
난 간단한 설명과 진찰만 받고 병원을 나왔다.
내 손에는 진료 확인서라는 서류만 달랑 들려있었다.
난 내 서류에 적힌 짧은 글을 보며 약국으로 발걸음을 내디뎠고, 안대 하나를 사 눈에 착용했다.
시야의 반이 막히니 중심을 못 잡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마치 왕복 6시간인 차 안에서 술을 마시는 느낌.
난 그런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안대를 마저 제거하지는 않은 채 집을 향해 비틀 대며 걷고 있었다.
어느덧 집에 도착하고.
시간은 벌써 1시였다.
난 지금 학교에 가도 밥은커녕 국물조차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대충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맨 쌀밥만 대충 먹기 시작했다.
밥 배만 든든하게 채우니 아까보다는 그나마 몸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집에서 계속 쉬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난 다시 학교를 가기 위해 책가방을 등에 업고서 집을 나왔다.
마치 벌이라도 받는 듯 기분이 축 처진다.
나에게 학교란 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학교라는 지옥에서 벌로 공부만을 죽도록 시키는 그런 지옥.
그리고 이런 내 생각에 민지와 서진이도 공감했다.
민지와 서진이 둘 다 공부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민지는 성적이 높은 편이었지만 성적만 높을 뿐 의지는 없었고, 서진이는 의지는 있었으나 공부 실력이 안 따라 줬다.
완전 정 반대인 둘은 그래도 서로 잘 맞았다.
둘과 함께 노는 것은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그냥 그뿐이었다
어쩌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따듯하고 신날지도 모르겠다.
난 그 둘과 자주 함께 놀았고, 학교에 가는 이유의 반의 반도 그 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난 학교 정문에 발을 들이고 나서 온몸에 기운이 쏙 빨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당장이라도 왔던 길을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학교 건물 내에 들어왔을 때, 모두가 가방을 메고 학교 계단을 오르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난 그 시선을 견디며 무사히 교실까지 도착했다.
가방을 책상 옆에 걸어두며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고 북적인다.
지훈은 그 아이들에 섞여 자연스럽게 대화나 나누고 있다.
지훈은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얌전하지 않았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이상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 때문에 지훈이 평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지훈이 내가 병원에서 돌아온 것을 본 것인지 아니면 못 본 것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훈은 날 바라보지 않았다.
친구들 곁에서 바쁘게 입이나 움직인다.
난 그런 지훈을 좋게 보진 않았다.
물론 그런 지훈 앞에 당당히 다가가 불만을 주르륵 탑 쌓아 놓진 않았다.
보다시피 난 이 반의 아이들과 별로 친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난 누구 한 명에게도 말을 잘 걸지 않는다.
지훈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지훈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친구들의 곁에 남아있었다.
아무리 친구가 좋을 나이라지만 내가 지훈의 부모님도 아닌데...
지훈이 나와 놀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우리의 사이에 벽이 있는 것인지.
난 그 사실을 몰랐다.
사실 알려고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
보통 지훈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을 때, 난 교실 밖을 나가거나 잠을 잤었다.
난 수면 시간이 6시간 이상도 안 되었기에,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쪽잠을 자 둬야 했다.
아니면 수업시간 내내 꾸벅거리며 졸아버렸으니 말이다.
지훈은 가끔씩 이런 나에게 자신이 내 엄마라도 된 듯 잔소리를 해댔다.
물론 지훈도 수업시간에 졸거나 잔다.
하지만 어째선지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역할은 내가 다 한다.
나도 연인 관계에서 그런 역할을 맡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지훈은 나에게 모조리 그런 역할만 떠 맡기고서 자신은 똑똑하고 청결한 척, 온갖 잘난 척만 해댔다.
난 그런 지훈이 못마땅했다.
당연했다, 누가 멍청이 짓을 하고 싶을까.
지훈은 친구들과 한참을 떠들다가 나를 보았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도 고개를 휙 돌린 채 나는 쳐다도 안 본다.
난 혹시라도 내가 뭘 잘못한 것인가 싶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돌아보더라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난 화가 뻗쳐 당장 교실을 나왔다.
단순 내 오해일 수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다.
가뜩이나 눈 한쪽이 안 보여서 미치겠는데 되는 일 하나 없고...
난 민지를 찾아갔다.
다들 내 모습을 보고 놀란 눈치다.
"해적왕이네!"
서진이가 날 보며 웃기 시작했다.
서진이는 나에게 해적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는 그다음 날도 해적왕이 되어주라며 부탁했다.
난 그런 서진이가 어이없고 웃겨 웃음을 터트렸다.
그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친구들과 놀 때면 항상 지훈이 나타나 나를 빤히 쳐다보았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인지, 지훈이 나를 따라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항상 지훈과 눈이 마주쳤었다.
그러고 나서 지훈은 나에게 온갖 속상한 말들과 행동들을 던졌다.
그냥 던지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강하게, 아프게 던졌었다.
지훈은 질투가 매우 심한 아이였다.
서진이나 진희와 친하게 지내는 꼴만 보이면 나에게 다가와 꾀죄죄한 말만 늘어놓았고, 난 그런 지훈에 때로는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지훈이 결코 싫지 않았다.
지훈을 만났던 많은 여자 아이들은 이런 지훈에 질려 떠났지만 난 남을 싫어하지 않는 성격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지훈을 받아줄 수 있었다.
난 가끔씩 생각한다.
내가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면 지금쯤 지훈과 헤어졌을까,라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강훈은 이렇게 자주 싸우는 우리 둘을 보고 심히 내적으로 갈등했다.
눈동자에 진희 말곤 담아둘 게 없어 보이는 강훈이 내적 갈등을 하는 게 참 의아하겠지만 강훈은 이래 봬도 꽤나 감성적이고 예민하다.
지훈과 나의 사이가 틀어질 때면 무덤덤해하는가 싶다가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멍청해 보인다.
"둘 다 내 친구인데, 헤어지면 곤란하잖아. 누구 한 명의 편을 들어줄 수도 없고. "
강훈은 항상 이런 말을 해 왔었다.
난 사실 전혀 지훈과 헤어질 마음이 없는데 말이다.
난 오른쪽 눈의 통증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학교로 돌아온지라 학교는 매우 짧고 간결하게 끝난 느낌이 든다.
하루종일 학교에 틀어박혀 있던 다른 아이들은 달랐겠지만 난 그 어느 때 보다도 발걸음이 가볍고 산뜻했다.
비록 눈이 쑤셔왔지만 삶에 작은 고통 하나쯤은 있어야 된다 생각해 별 신경이 가지 않는다.
난 집에 도착한 후, 침대에 누워 안대를 벗었다.
빨갛게 부은 눈이 거슬린다.
난 부은 눈은 내버려 둔 채로 잠을 청했다.
똑똑똑
얼마 안 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뒹굴거리는 동생들 중 아무나 가 주문한 음식이겠거니 하고서 침대 위 한 톨의 먼지만 바라보는데.
내 전화가 울렸다.
난 즉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것은 서진이었다.
서진이는 문을 열라며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서진이의 목소리 틈새에서 차분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또박또박 들렸다.
"정지윤 문 열어."
이지훈이었다.
난 어서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 앞에는 서진이와 지훈이 서있었다.
아주 어색하고 딱딱하게.
서진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흘러들어왔다.
서진이는 이렇게 뭐든 어색한 기류를 깨버린다.
서진이 특유의 새초롬한 목소리 덕분인지 내 마음이 조금은 녹았다.
서진이에 잇따라 지훈도 내 방 안으로 몸을 들였다.
서진이와 지훈이 왜 같이 있었는지, 왜 날 찾아온 것 인지 난 의문을 갖고서 지훈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가 궁금하겠지."
마침 서진이가 내가 하고 싶었던 답을 꺼내기 시작했다.
"요즘에 좀 안 좋은 일이 많았으니까~ 스트레스 좀 풀려고 찾아왔더니.. 네 집 앞에서 이지훈이랑 마주쳐버렸지 뭐야."
서진이는 입을 가리고서 호호 웃었다.
난 지훈을 바라봤고, 지훈은 내 눈치를 보며 눈동자만 굴렸다.
난 그런 지훈을 따끔하게 째려보곤 말았다.
서진이는 이어서 노래방에 가자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지훈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나와 서진이를 따라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난 어벙벙한 상태로 서진이와 지훈을 따라나섰고, 역시나 도착한 곳은 내가 평소 가던 노래방이었다.
한참 노래를 부르던 때, 지훈이 잠시 전화를 받겠다며 노래방을 나갔다.
서진이는 이제야 어색한 기분이 풀린 것인지 말이 온통 쏟아져 나왔고, 노래를 부를 때에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목소리를 변형시키는 등의 장난을 쳤다.
그때, 노래방 문이 갑자기 열렸다.
지훈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뭐야, 비명 소리가 들리길래 와 봤더니.."
곧이어 우리는 웃음을 빵 터트렸고, 지훈 또한 웃음을 감출 수 없어 거의 울다시피 했다.
서진이와 지훈은 그다지 친분이 있지는 않았지만 어째선지 지금, 조금 어색함이 풀린 듯했다.
난 둘을 보며 마음 한편이 뿌듯하고 따듯해짐을 느꼈다.
덕분에 나 또한 지훈과의 어색한 감정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서진이와의 친밀도를 더 높일 수 있었다.
역시 서진이는 좋은 친구였다.
그리고 지훈은 좋은 남자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