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과 만남이란
하교할 시간이 되고, 난 지훈과 함께 집에 돌아갈 준비를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아주 당당하고 가냘픈 목소리로.
"야 정지윤!"
날 부른 사람은 다름아닌 나민이였다.
나민이는 여러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내앞에 발을 들이밀었다.
하교시간이였던 터라 교실은 텅 비어있었고 나민이의 눈앞에는 지훈과 나, 둘만 덩그라니 서 있던것이였다.
난 나민이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과거 나민이의 갖가지 만행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겨 나민이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렸다.
나민이는 제 옆에있는 친구들과 실컷 떠들어대며 지훈과 날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훈은 날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 봤다.
지훈은 매우 침착하고도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괜찮겠어?"
"괜찮아."
지훈의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이 좀 풀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착각이였다.
"어제 일어난 일 알고있지?"
"뒤에서 내 말을 얼마나 하고 다녔으면 그래?"
난 마른 침을 삼켰다.
목이 건조해서 목소리가 절로 갈라지고 떨렸다.
지훈은 옆에서 그런 날 바라보며 나민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설령 뒤에서 네 말을 꺼냈다고 하더라도 과장까지 했겠어?"
내 말에 나민이와 그의 친구들은 제 이마를매만지며 탄식했다.
"너 진짜 뻔뻔하다. 어떻게 사과는 못할 망정 그런소리를해?"
나민이의 친구중 한명이 말했다.
난 그 아이의 말에 헛웃음이 나옴을 느꼈다.
나민이는 완벽하게 피해자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잘 짜여진 대본이라도 있는지 뻔뻔하게 잘만 떠드는 저 얇은 입술을 보았다.
그재서야 꺠달았다.
아, 난 지금 나민이가 주인공인.
내가 나쁜사람이 되어야 하는 그런 연극을 하고 있는거구나.
나는 정말 그동안 멍청하게도 나민이가 설계해 놓은 무대위를 칼을 휘두르며 뛰어다녔던 것이다.
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순간은 친구, 또 한 순간은 웬수.
나민이의 이야기 속에서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나민이는 그다지 잘나가는 아이가 아니였다.
마음속으로는 치마 줄여입는 아이들 처럼 되고싶어 했지만 겉 껍데기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나민이를 피하고 무서워 할만한 이유가 딱히 존재하지는 않았다.
있다고야 한다면 과거에 나민이에게 시달려 생긴 트라우마 정도?
"너 2학년 때 민지랑 같이 나 괴롭혔었잖아."
나민이의 어처구니 없는 말이 들려왔다.
내 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한심하고 어이없는 발언에 한숨만이 나왔다.
지훈은 옆에서 나를 계속해서 주시했다.
"그건 네가 나랑 진희랑 민지 괴롭히고, 뒷말도 많이 하니까 민지랑 내가 자발적으로 피한거지."
내 말에 당당했던 나민이가 조금은 움츠러 들었다.
"내가 언제 그랬는데?"
곧이어 들리는 나민이의 당당하고도 뻔뻔한 말이 들려왔다.
나민이는 자꾸 뒤돌아보며 자신이 데리고 온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겠다고 되는대로 아는 사람대로 전부 끌고 온 나민이.
나민이는 지금 본인 무덤을 판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만약 이곳에서 나민이의 과거를 밝힌다면 나민이의 친구들은 나민이의 과거를 알게될 것이고 그동안 자신들이 알고있던 사실들이 전부 거짓이였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럼 나민이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난 나민이의 뻔뻔한 태도와 화를 부추기는 목소리에 나민이의 과거를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려했다.
그러나 지훈이 내 앞을 막아서며 동시에 내 말문도 막혔다.
"진정해."
지훈의 짧고 굵은 한마디를 끝으로 나민이와 나의 말싸움이 끝났다.
나민이가 이번에도 거짓말을 칠진 몰라도 선생님과 상담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나도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했다.
나민이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당장 선생님을 만나러 가자고 했고, 지훈이 나민이를 말렸다.
아무리 기세등등하고 당당한 나민이지만 자신보다 키가 20센티는 더 큰 친분없는 남자애에게 까지 감히 대들 수는 없었다.
지훈은 아무도 없는 과학실 앞으로 날 데려가더니 말했다.
"너 정말 괜찮겠어?"
지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고 별로 안정되지는 않았지만 나민이와 대면하고 있는 상황보다는 백배 더 나았다.
난 거의 기어들어가듯 싶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난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았다.
내 목소리는 몹시 떨렸고 눈은 뜨거웠다.
난 최후의 수단으로 민지를 찾아갔다.
"민지야, 우리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찾아가 봐야할것 같아."
"왜? 무슨일이라도 생겼어?"
민지는 놀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곧이어 지훈이 민지에게 아까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민지와 난 계단을 한칸씩 내려갔고 저 멀리에 있는 교무실에서 나민이와 선생님의 모습이 비춰왔다.
난 잔뜩 긴장한 채로 침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목구멍 안이 말라 갈라져있어 따가울 뿐이였다.
교무실 안에서 우리들은 나민이의 쪽, 나의 쪽으로 갈라졌다.
선생님은 우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셨다.
"너희가 사귄댔나?"
선생님은 지훈과 나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찌푸리셨다.
나와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나민이와 민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2학년 때 내가 너희를 상담한 바로는 너희 각자의 의견이 분명히 나뉘었었어."
나민이의 표정과 태도가 아까와 달리 온순했다.
민지와 난 그런 나민이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지훈은 선생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듯 싶었다.
그렇게 허무하게도 선생님의 말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렇게 난 완전히 나민이와 갈라섰다.
집에 돌아오니 텅빈 방이 눈에 띄었다.
동생이 있으면 뭐하는가.
잘 맞지도, 대화를 하지도 않는 걸.
난 좁지도, 넓지도 않은 침대에 몸을 맏겼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가나 싶었는데.
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들어 부쩍 연락이 없던 지훈이였기에 지금 지훈에게 연락이 온다는 것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였다.
난 핸드폰을 집어들고 지훈의 전화를 받았다.
지훈은 내 전화를 받으며 축 쳐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어떘어?"
"그냥 그랬지 뭐. 아까 나 도와준건 고마워."
"당연한거잖아."
난 지훈의 말에 조금 안정과 위로를 받았다.
지훈은 친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에게 전부.
하지만 내가 말하는 대로 전부 바뀌어 줄 수 있는 사람이였고, 꽤나 믿을만 했다.
그런 지훈이 왜인지 최근들어 힘이 없어보인다.
"내일은 뭐해?"
내가 지훈에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훈의 질문이 날아왔다.
"아마 서진이 일 좀 해결해야할 것 같은데."
사실 아까 선생님께 상담을 받을때, 지훈이 서진이를 곤란하게 만드는 발언을 뱉었다.
나민이와 서진이의 통화를 몰래 엳들음으로 알게된 나민이의 정보를 나민이와 그의친구들 앞에서 대담하게 말해버린 것이다.
나민이와 그 친구들은 이마를 탁 짚으며 서진이를 그 자리에서 욕해보였고, 그 떄 이후로 서진이는 나민이에게 갖은 압박과 괴롭힘을 받기 시작했다.
서진이는 지훈의 실수로 자신이 궁지에 몰려졌다는 것을 민지에게 전해 듣고 지훈을 원망했다.
서진이는 아슬아슬 절벽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 누구도 닿지 않는 높이에서 혼자.
그런 서진이를 달래주는 것은 항상 나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혼자 남겨진 서진이를 도와야했다.
"음, 요즘 많이 바쁜가봐?"
"그렇지 뭐."
지훈의 목소리는 어딘가 씁슬하고 외로운듯 보였다.
하지만 난 당장 지훈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신경써야했다.
내 주변에서 모든 사람들이 화살이 되어 나를 겨냥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난 한숨을 쉬었다.
지훈도 무언가 가슴 한쪽이 답답한듯 나를 따라 한숨을 쉬었다.
"넌 나 아직 좋아해?"
"응?"
지훈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해댔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 그냥... 나한테는 너가 전부인데. 넌 아닌 것 같아서."
지훈은 계속해서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다.
마치 나를 의심하는 듯이.
"너 왜그래...?"
내 말을 끝으로 지훈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라..! 그냥 다 내 잘못인것 같고 너무 죄책감들어."
"네 잘못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아는데.. 서진이 힘들어 하는 것도 내 잘못이고, 네가 이렇게 곤란해 진것도 다 나 때문이잖아."
난 수화기 너머로 지훈이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눈물이 많은 지훈이니 이런 상황에서 우는 것이 당연하긴 했다.
"네가 나한테 화냈을 때, 그때 다 끝났구나 싶었어."
"무슨 소리야?"
지훈의 말은 참 이상했다.
애초에 내가 하는 연애란 진지하지 않는 이상 시작조차 하지 않고, 끈끈하지 않는 이상 이미 헤어졌을 것이다.
내 행동 하나 때문에 이렇게 쩔쩔매는 지훈도, 그의 울음도.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난 감정표현을 할 수 없는 인형인가 싶었다.
내 감정 하나라도 드러내면 바로 고장나 버리는 그런 인형이 된 기분.
난 이런 내 처지가 불쌍하고 억울해 짙어지는 눈물을 애써 눌러 참아가며 지훈의 말에 대답을 했다.
"넌 나랑 헤어지고 싶은거야?"
"당연히 아니지. "
내 질문에 지훈이 답했다.
지훈은 매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난 그런 지훈의 목소리를 들으며 숨죽여 눈물을 한방울 흘렸다.
오늘은 정말 거지같은 날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천장을 보았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 옅은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 지긋지긋한 밤은 더욱 깊어져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모두의 과녘판이 되어 모두의 화살을 받아내고, 그 화살마저도 삼켰다.
그 많은 화살을 받아내어 몸도 마음도 지친 나에게 일격을 날린 것은 제일 가까웠던 지훈이였다.
지훈은 활을 조준해 정확히 내 급소를 노려 노련하게 그곳을 관통시켰다.
그만큼 지훈의 화살은 강력하고도 날카로웠다.
진희가 쏜것,민지가 쏜것, 서진이가 쏜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과 쓰라림이 내게 닥쳐왔다.
그리고 난 항상 그 화살을 품어야했다.
겉으로 삐죽 나오지 않게, 내 화살이 그를 향하지 않도록.
"미안해, 내가 너무 이상한 말을 많이했다."
"아니, 괜찮아 별로 이상한 말도 아니였어."
난 멍한 목소리로 말하는 지훈에게 답햇다.
어느새 지훈의 화살은 내 마음 속에서 나의 화살로 변해 나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지훈이 밉지만은 않았다.
왜일까?
인기가 많아서?
키가 커서?
손이 예뻐서?
그 어디에도 정답은 없었다.
"나 버리는거 아니지...?"
지훈의 한마디로 내 마음의 화살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래, 이거였다.
동정심과 사랑 그 사이 어딘가의 감정.
이 때문에 난 지훈을 쉽사리 버린다거나 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왜 버리겠어, 좀 마음을 가다듬고 내일 만나서 이야기 하자."
"응..."
그렇게 지훈과의 통화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