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7월 말이 되었고, 우리는 개학을 맞이했다.
짧은 방학이었지만, 일주일을 넘게 쉬다 보니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우리는 피곤함에 절여져 있었다.
그런 우리의 사이를 파고 서진이의 생일이 들어왔다.
7월 말에 있는 서진이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난 또다시 인터넷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난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 파티룸을 발견했다.
사진으로 보니 깔끔한 베이지 컬러의 방과 큰 소파, 음악 디스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방을 사용하는 시간 동안은 노래방 기기 사용을 무제한으로 할 수 있어 놀기에 딱 좋아 보였다.
난 이러한 조건으로 이 파티룸을 예약하려 했다.
그리고 진희, 강훈, 지훈, 현택, 성혜까지 모여 서진이를 어떻게 놀라게 해 줄지 계획까지 세우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제각각으로 입 밖에 나왔지만, 줄지어 봐도 좋은 방법은 없었다.
강훈이 내민 방법은 꽤나 신박하긴 했지만...
원래부터 좀 폭력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강훈이 내민 방법은 그리 평화적이진 못했다.
서진이에게 가짜 케이크를 준 다음 진짜 케이크를 얼굴에 던진다나 뭐라나.
케이크를 던지는 사람 역을 강훈이 맡는다면 서진이의 코뼈가 부러지고도 남을 것이다.
난 이런 방법을 제시한 강훈을 무시하곤 인터넷으로 드레스를 구매했다.
서진이를 위한 것이었다.
서진이의 생일날은 서진이가 주인공이 되어 더욱 돋보였으면 싶었다.
나 또한 그런 내 생일날을 원했으니까.
서진이가 입을 파란색 드레스를 구매한 후, 잠시 침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무언가 계획을 짜고 실행하다 보면 눈과 손이 피로하기 마련이다.
난 그럴 때마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서 눈을 감는다.
가끔은 잠들어 버릴 때도 있지만, 이런 휴식 방법이 제일로 효과적이고 편하다.
물론 학원 숙제를 하다가 눕기는 어렵다.
학원 숙제를 하다 눕는다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으니까.
그때, 내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웅...
난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화면을 응시했다.
하얀색 바탕 화면에 말풍선 몇 개가 올라왔다.
진희와 강훈은 마치 현실에서 대화한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지훈은 계속해서 의견에 동의하기만을 반복했다.
단체방은 말 그대로 대환장 파티.
생일 파티가 아니라 이딴 난장판 파티에 참여할 판이다.
난 친구들의 혼란스러운 대화를 보며 머리가 아파왔다.
이 와중에 다행인 것은 진희와 강훈이 파티룸을 꾸밀 풍선과 재료들을 사 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나마 지훈과 내가 맡을 일이 줄어 한숨 쉬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니 각자에게 할 일이 주어졌다.
진희와 강훈은 먼저 파티룸에 모여 풍선으로 룸을 꾸미는 역을 맡았고, 나와 강훈은 케이크와 테이프를 사 오는 역을 맡았다.
성예와 현택이 별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것에 조금 불편했지만, 서진이의 생일파티에 참여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기에 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후, 서진이의 생일이 다가왔다.
우리는 모두 예쁜 옷을 차려입고, 각각 다른 시간에 파티룸에 모였다.
다들 오늘은 한껏 꾸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와 지훈이 파란색 박스에 케이크를 담고서 파티룸에 도착한 후,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강훈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 거지 같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이밀며 아주 반갑게 인사해 주는 모습을 보니 내 주먹이 부들부들거렸다.
진희는 그런 강훈과 우리의 모습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옛날 같았으면 강훈을 나무라며 우리를 지켜줬을 진희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강훈에게 반쯤 물들어 버린 것인지 이제는 이런 강훈을 지켜보며 멍하니 웃는 진희다.
난 그런 진희에게 실망한 티 하나 내지 않고 웃어 보인다.
가끔은 나에게 너무 폭력적인 강훈의 행동을 일러바치고는 한다.
그럼 강훈도 억울한 표정을 한채 진희에게 딱 달라붙어 우는 체를 한다.
난 매번 그렇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강훈의 배를 주먹으로 쳤었다.
멍청한 강훈...
곧 성예와 은탁이 파티룸에 도착했다.
성예와 현택은 평소와 매우 비슷한 모습으로 파티룸에 등장했다.
둘은 진희네 커플을 돕겠다며 뱀 허물처럼 흐물흐물한 풍선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벽에 영어로 된 생일 축하 문구도 붙이고, 불도 전부 끄고 난 뒤.
드디어 서진이가 파티룸 안으로 들어왔다.
팡!!!!
강훈이 서진이가 모습을 비추자마자 폭죽을 크게 터트렸다.
서진이는 깜짝 놀라 특유의 얇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강훈이 터트린 폭죽 기둥 안에서는 옅은 무지개 색의 색종이가 나와 파티룸 안을 온통 무지개 색으로 물들였고, 서진이는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앞으로 어떻게 저 많은 색종이들을 치울까 눈앞이 깜깜해진 지훈과 난 마른세수를 하며 돌아섰다.
진희와 강훈은 놀란 서진이의 모습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듯 마냥 웃어댔고, 성예와 현택은 냉장고에 든 생일 케이크를 생각하며 케이크의 맛을 상상해 보았다.
이제 다음으로는 서진이가 드레스를 입을 차례가 되었다.
서진이는 드레스를 보자마자 놀라는 듯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네가 입을 옷이지."
난 드레스를 서진이에게 넘겼다.
서진이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드레스를 보며 동그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서진이는 겉으로는 놀라서 쓰러질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너무 좋아서 이미 쓰러져 있을 것이다.
서진이는 옷을 갈아입고 난 후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이고...'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이것이 무슨 의미로 뱉은 감탄사인지는 오직 서진이만이 안다.
서진이가 푸른색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으니 정말 동화 속 공주 같았다.
우리는 서진이를 중심으로 모여 케이크를 든 채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또 하나의 추억이 깊게 남았다.
서진이는 이 아름다운 우정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서진이는 애초부터 눈물이 많은 아이여서 서진이의 눈물에 놀랍지는 않았다.
서진이는 손가락 안으로 눈물을 훔치고서 케이크의 초를 불었다.
'16' 친구에게 감동하고, 울고, 웃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곧이어 초 심지의 불이 흔들리며 짙은 연기를 남겼다.
마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흩어질 우리들처럼 불씨는 꺼지고, 그 틈에 생긴 연기도 점점 흩어져 흐려졌다.
난 이 모습을 보며 왜인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저 작은 초만으로 우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슬픔을 느낀 걸까.
짝짝 짝짝
모두의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 차려졌다.
난 옆에 서있는 진희를 따라 다급하게 박수 세례를 날렸다.
짝짝 거리는 소리가 멈춘 뒤, 현택의 배에서 큰 울림소리가 들렸다.
마치 배 고동 소리처럼 길고 큰 소리가 마치 거대한 배를 보는 듯했다.
우리는 그 소리에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식사 비용은 이곳에 있던 유일한 어른인 우리 엄마가 부담하기로 했다.
엄마의 옆에서 적극적으로 메뉴를 고르는 강훈 옆으로 진희가 껴 있다.
저 둘은 항상 이럴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가 해결할 일이 없으니 편하다.
그리고 엄마는...
"너희 식비로 5만 원도 넘게 나왔어. 이런 엄마 또 없다?"
"알아, 안다고."
"그럼 엄마한테 효도나 해. 이년아!"
항상 이렇다.
물론 이런 엄마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맙다.
하지만 어째선지 자꾸만 짜증이 난다.
물론 엄마에게 해가 안 되는 선에서만 짜증을 낸다.
뭐...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난 그런 엄마에게 대충 대답이나 해준 뒤, 친구들과 대화나 한바탕 벌였다.
이거 완전 생일파티가 아니라 잡담 파티이다.
수다 떠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서진이와 진희는 게임을 몇 가지 하자며 나섰다.
"우리 진실게임이나 할까?"
"우리 서로 다 아는데 뭘..."
"그렇지만 재밌으니 하자!"
진실 게임이란, 서로 질문을 하며 그것에 대한 진실된 대답을 해야만 하는 게임인 것이다.
말 그대로 진실 게임.
친구를 처음 사귄 후, 친해지고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그래서 친해진 지 몇 년은 더 된 우리에게 진실게임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나와 지훈은 이 게임에 처음 동참된 사람이기에 잔뜩 긴장하며 아이들의 틈에 끼었다.
"진영아 너랑 강훈이는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갑작스럽게 성예의 질문 공격이 시작되었다.
진희는 멋쩍게 웃으며 질문에 맞받아칠 준비를 하였다.
"우리는 이미 키스까지 다 했죠."
놀라운 사실이었다.
진희와 강훈이 그 정도로 깊은 사이일 줄도 몰랐고, 이 나이에 벌써 입맞춤을 한다니..
그것도 강훈과 진희 같은 숙맥들이.
난 너무 놀라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진희는 부끄러운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서 웃기만 했다.
물론 진희의 귀 끝이 조금 빨개지긴 했지만.
질문을 받은 진희는 이제 도로 질문을 할 기회를 얻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 뒤통수를 강하게 내려치고 지나갔다.
난 머리를 긁으며 진희의 질문 공격을 받을 사람이 누군지 속으로 예측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윤아~ 너랑 이지훈 씨는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어쩐지 진희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더라니...
난 눈살을 찌푸린 채 더듬더듬 말을 해나갔다.
"우리는 뭐... 포옹 정도지. 너희 만큼 만나지는 않았잖아."
진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피해 얼른 서진이에게 질문을 날렸다.
서진이는 갑작스레 옮겨진 시선에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서진아, 넌 누구 사귀어 본 적 있어?"
서진이는 입꼬리를 내리며 동시에 몸도 축 늘어뜨렸다.
우리는 그런 서진이를 보며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서진이는 거의 땅속으로 기어 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니... 어렸을 때, 인터넷에서 만난 것 빼곤 없어."
서진이의 말에 강훈이 '풉' 하고 입에 공기를 가득 물었다.
지훈도 둥지에서 떨어진 안쓰러운 아기 새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서진이를 내려봤다.
나 또한 지훈과 같은 표정으로 서진이를 바라봤다.
진희는 특유의 어른스러운 말투로 서진이를 위로했다.
하지만 서진이의 슬픈듯한 표정은 다시 바뀌기에 시간이 꽤 걸렸다.
언젠가 멋진 남자친구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서진이었지만 그게 마냥 쉽지는 않았는 모양이다.
성예와 현택은 그런 서진이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서진이는 그런 우리 사이에서 잔뜩 기가 죽어 한숨만 쉬었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 나 빼고 전부 커플들이잖아?"
서진이는 뭔가 깨달은 것인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희는 그런 서진이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애정행각이라도 안 하는 게 어디야... 앉아."
진희의 말에 불만을 가득 품은 채로 자리에 도로 앉는 서진이었다.
다음으로 서진이의 공격 차례가 되었다.
서진이는 뜻밖의 인물을 공격했다.
그 인물은 바로... 현택이었다.
현택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서진을 빤히 쳐다봤다.
은택의 그 불만 많아 보이는 얼굴이 서진이를 향하니 서진이는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돌렸다.
"서현택 넌.. 성예랑 진도 어디까지 나가고 싶어?"
"난 키스까지..."
현택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점점 붉어졌고, 우리는 그런 현택을 보며 경악했다.
물론 더 경악할 일은 따로 있었다.
현택이 진희에게 질문하고, 진희가 나에게 질문하고 난 뒤.
나에게 질문을 할 기회가 날아왔다.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훈을 놀리는 데에 쓰기로 했다.
"지훈아, 너 강훈이 좋아하지?"
그러자 지훈이의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강훈의 표정은 밝았고, 심지어 얼굴이 점점 빨개지기까지 했다.
진희는 그런 강훈의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서진이는 '어머어머' 하며 온갖 감탄사를 다 끄집어냈다.
"너, 너... 얼굴이 왜 빨개지냐?"
지훈은 놀라며 강훈의 얼굴을 가리켰다.
강훈은 아니라며 손을 휘젓고, 주방에서 세수까지 하고 나서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난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깔깔댔다.
그러자 강훈의 내 머리를 때리려 나에게 위협하며 다가왔지만 지훈의 제지로 피를 볼 일은 없게 되었다.
게임을 하며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다 같이 소파에 앉아 노래방 기기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소파의 크기가 우리 모두가 앉기에 좀 좁아 난 지훈의 무릎 위에 앉고, 진희는 강훈과 완전히 밀착하여 앉기로 했다.
성예와 현택은 거의 그냥 친구인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앉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성예와 현택은 커플 같지 않아 보였다.
커플이라기엔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고...
그렇다고 친구라기에는 둘의 사이에 뭔가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성예와 현택은 친구도, 연인도 아닌 그저 그런 관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다 같이 앉아 한참을 노래만 부르고 있는데, 어느덧 시간은 10시에 달했고.
우리는 파티룸을 나가게 되었다.
파티룸을 나가니 뭔가 아쉬운 듯한 마음이 남았다.
다시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즐겁고 행복했던 아까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이런 아쉬운 밤이 찾아오니 어째선지 저 골목에 있는 깜빡거리는 노란빛 가로등마저도 아련하게 보인다.
성예와 현택은 함께 어디론가 먼저 사라져 버렸고, 엄마의 차 앞에는 진희, 강훈, 서진, 나, 지훈만이 남았다.
우리는 엄마의 작은 차 안에 몸을 구겨 넣어 전부 탑승하기 위해 서진이를 먼저 조수석에 앉힌 후, 두 쌍의 연인들이 뒷 좌석에 모두 탑승하기로 했다.
난 지훈의 무릎 위에 앉아 자연스레 창 밖을 구경했다.
진희와 강훈은 무언가 불편한 듯했지만 지훈과 난 평소 밖에서도 자주 이렇게 스킨십을 했었기 때문에 매우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내 목소리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
딱히 목이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어째선지 걸걸하고 잘 나오지 않았다.
아까 노래 부를 때 무리한 것인가.
난 물을 마셔도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에 전에 성대결절에 걸렸던 민지를 떠올렸다.
성대결절이 그리 무섭지는 않았지만 민지처럼 되기는 싫었다.
이 재밌는 친구들 사이에서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버티겠고...
말은 하지 않아야겠고...
내 속에서는 다양한 갈등이 서로 부딪히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따가운 스파크가 지훈에게도 튀겼는지 기분이 매우 언짢아 보인다.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내 질문에 지훈은 묵묵부답.
난 이런 지훈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지훈의 눈은 평소와 달리 매섭고 날카로웠다.
마치 나를 향해 날카롭고 뾰족한 칼날을 들이미는 것 같았다.
난 그런 지훈에 속이 상해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은 지금 당장 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맞아, 지윤이란 지훈이는 이따가 잠시 나 따라서 나와줄래?"
엄마는 나와 지훈을 보며 말했다.
나는 놀라며 지훈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 왜?"
"아~ 현이 이모 알지? 그 이모네 집에 잠시 좀 들르려고."
엄마들은 왜 항상 자신의 친구나 지인에게 '이모'라는 호칭을 붙여서 부르게 하는 것일까.
물론 이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줄곧 이것에 관해 의문을 품어 왔었다.
"알겠어. 그런데 우리는 왜 데려가?"
"받을 게 있어서, 너희는 짐꾼이지 뭐!"
난 짧게 엄마를 째려보고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곧 창 밖으로 화려하고 큰 아파트의 입구가 보였다.
딱 봐도 몇십억은 넘어 보이는 건물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자 군데군데 스포츠카가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 우리 셋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몇 층을 올라간 걸까, 엘리베이터에서 음성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엄마는 잠시 현이 이모네에 들어갔다 오겠다며 발걸음을 옮겼고, 그동안 나와 지훈은 멀찍이 떨어져 어색한 공기를 잔뜩 품어냈다.
난 이때까지도 지훈이 왜 내게 화가 난 것인지 몰랐다.
아니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조차 몰랐다.
지훈은 나를 힐끗 보며 한숨을 쉬었고, 나도 그런 지훈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한참 수다를 떨고 나서 양손에 가방을 든 채 나타났다.
지훈은 두 개의 가방을 혼자 전부 들고는 먼저 앞장서 엘리베이터에 발을 올렸다.
난 그런 지훈을 총총걸음으로 따라갔다.
지훈은 대충 트렁크에 가방을 놓은 후 다시 차에 탑승했다.
긴 시간 후에, 집에 도착하고 나서...
지훈은 잠시 나를 불러 세웠다.
"너 오늘 왜 그렇게 무리한 거야?"
"뭐가..?"
"목 안 좋잖아. 다들 말하지 말라고 하는데.."
"난 괜찮아."
난 지훈에게 한번 인상을 썼다.
지훈도 그런 나를 보고는 헛웃음을 내지 었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하..."
"... 그래, 미안해."
난 지훈에게 못 이겨 끝내 사과했다.
솔직히 지훈을 이겨 꺾고 싶지 않았다.
한다면 할 수야 있지만...
최대한 지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말 좀 잘 들어."
"알겠어."
난 휙 돌아 지훈을 지나쳐갔다.
그 모습에 지훈은 상처받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난 그런 지훈을 보며 한숨만 쉴 뿐이었다.
"왜."
지훈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씩 흘려보냈다.
지훈은 눈물이 많았다.
내가 슬퍼하면 나보다 더 슬퍼하며 눈물까지 비처럼 내릴 정도로 눈물이 많았다.
그만큼 공감능력도 좋았지만, 잘 울지 않는 나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난 이제 지훈이 우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난 당장이라도 집에 들어가서 자고 싶은데 지훈은 내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지훈을 달래야 할 것 같고...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울지 마, 눈물 닦고."
지훈의 대답대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제 집에 가."
지훈은 발걸음을 멈춘 채 나만을 바라봤다.
여전히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채로.
"나 싫어 이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질렸어? 버리는 거야?"
난 이런 지훈의 태도에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솔직히 난 이런 상황에서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지훈이니 어쩌겠는가.
난 어쩔 수 없이 점점 올라가는 나의 분노 게이지를 꾹꾹 누르며 화를 식혔다.
지훈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울고만 있었다.
내 마지막 인내심으로 지훈을 집에 보낸 후, 나도 겨우겨우 집에 들어갔다.
정말...
난 지훈에게 불만만 쌓인 채 풀지 못하고 혼자 스스로 화를 식혔다.
물론 지훈에게 나의 입장을 이야기 하긴 했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진 않았다.
오늘은 왜인지 그런 아련하고 속에 불 집히는 날이었다.
풋내기 초록빛 사과처럼 아직 익지 않은 채로 시장대에 올라버린 그런 사과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날.
이런 날이 있으니 훗날 빨갛게 익은 완벽한 사과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