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3학년 중후반, 어째선지 친구들과 멀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멀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생긴 후의 난 교실 밖도 잘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개인적인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난 진희보다도 훨씬 더 남자친구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이제 나에게 친구 보다 남자친구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지와 다른 친구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그들에게 다가갈 때면 전과 달리 거리감이 보이고 어색해진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난 이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P시에 와서 느낀 것과 배운 것이 많았으니까.
배운 것 중 첫 번째로, 친구 관계에 목매달 필요는 없다는 것이 있다.
사실상 친구와 나는 거의 남이다.
아니, 그냥 좀 친한 남일뿐이다.
각각 개인이고, 그 개인들에게는 생각과 성격, 인지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개인인지라 각각 전부 다르니.
그들이 날 좋아하든 말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남이고, 개인이니 신경 쓰지 말고 내 인생을 살면 된다는 것...
이게 내가 P시에 와서 배운 것 중 가장 쓸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쓸모 있는 것은.
친구는 어차피 멀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세월에 따라 달라지고, 또 변화한다.
친구라는 관계는 이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격이 예전과 달라졌다던지.
외모가 바뀌었다던지.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인지 나쁜 방향으로인지는
모른다.
친구라는 관계에서 방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방향이 어떻든 간에 친구 관계는 누군가 바뀐 그 순간부터 차차 무너져간다.
물론 무너지는 방법도 다 제각각이다.
그 이유 또한 전부 다르다.
이것은 결국은 모두가 개인이고, 커다란 하나의 공동체와는 다르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난 이미 친구 관계에 대한 열정을 식힌 지 오래였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학교라는 이 작은 사회에서 경험하고, 또 좌절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밥 좀 먹지?"
허공을 응시하던 중, 지훈이 내게 말을 걸었다.
흐렸던 시야 안으로 지훈이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훈은 줄곧 밥을 먹지 않는 나를 위해 빵이나 간식등을 사 오곤 했다.
지훈의 입장에서는 밥을 먹지 않는 내가 걱정될 것이다.
하지만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지훈이 아무리 나와 친밀한 사이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서 내 신체까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난 내 입에 빵을 물리는 지훈을 보며 눈을 피했다.
평소와 달리 심각하게 날카로워진 눈빛을 피하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내가 이럴 때마다 지훈은 내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고정시킨다.
이게 정말 내 남자친구가 맞나 가끔은 의심이 된다.
나와 지훈은 이제는 거의 절친처럼 붙어 다니고 서로 장난도 친다.
완전히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편해진 느낌.
난 이 느낌을 느끼기 위해 여태 지훈과 친분을 쌓아왔던 것일까.
사실 난 썸이라는 것을 잘 타지 못한다.
서로의 마음이 어떤지 확신 치도 않으니 함부로 행동하지도 못하고...
마치 아슬아슬 줄타기하듯 장난치는 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한다 착각하기 딱 좋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설레는 썸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연애 전 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렘이 좋다나 뭐라나.
지훈도 그런 썸을 즐겼던 것 같다.
난 지훈이 준 빵을 한 입만 먹고 책상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아, 맞다. 저번에 서진이가 이야기해 준 게 있는데 들어볼래?"
"뭔데?"
지훈은 내 앞자리에 앉아 몸을 돌렸다.
내 앞자리는 응원단 단장 여자애의 자리였는데, 지훈과 예전부터 매우 친했는 듯하다.
하지만 난 이 여자애를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쳐다본 적도 없다.
내가 원래부터 질투를 잘 안 하는 타입이기도 하고...
이 응원 단장의 남자친구가 우리 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둘은 평소에 별로 붙어 다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와 지훈과 달리 쉬는 시간에도 각자의 친구들과 놀기만 했다.
아마 친구였다가 한순간에 한 사람의 고백으로 연인이 되어서 그런 듯하다.
그 둘이 어쩌다 한번 같이 붙어있을 때가 있으면 왠지 내가 다 마음이 흐뭇하고 따듯해진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그런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아침부터 기분도 꿀꿀한데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많이 마주쳐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쉬는 시간, 난 화장실에 가고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 앞에서 우연히 나민이를 발견했다.
나민이는 여전히 얄밉고, 멍청했다.
큰 거울 앞에 서서 마치 제가 잘 나가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살랑살랑 춤이나 춰댔다.
나민이의 행동은 막 나가는 여자애들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해대는 나민이는 정작 친한 친구가 5명도 안 되는 학교에 소문난 멍청이일 뿐이었다.
그런 나민이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민이는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나를 보고는 옆 친구와 속닥거렸다.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곤 말이다.
난 친구 관계에 그다지 진심인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내게 해를 입히는 것은 참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 끝난 후, 국어 시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평소에는 자유시간을 잘 주지 않는 국어 선생님이었지만 다른 반 보다 한참은 더 수업 진도가 빠른 우리 반이었기에 자유시간을 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난 자유시간에 지훈과 함께 마주 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 아까 기분 나쁜 일 있었는데."
"무슨 일?"
"글쎄.. 나랑 사이가 안 좋은 애가 날 째려보더라."
"뭐... 걔가 누군데."
"나민이라고.. 있어."
지훈은 내 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는 거야?"
"나민이라는 애한테 가려고."
"왜? 하지 마!"
"너 기분 상하게 했다며."
지훈은 이 한마디를 마친 후 교실을 나갔다.
난 지훈을 붙잡았다.
지훈이 나민이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나민이 와 우리의 일은 이미 작년에 끝났다.
아주 흐릿하고 뿌옇게 이야기의 한 부분만 지워진 채로.
하지만 꾹꾹 눌러쓴 글씨는 지우개로 지우더라도 자국이 남는다.
그대로...
난 지훈의 앞을 가로막고 서 보고, 지훈의 팔을 잡아당겨도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지훈은 가끔씩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내가 다그치면 원래대로 돌아오긴 하지만 특유의 신념과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지훈은 나를 그대로 놓고는 떠났다.
"금방 갔다 올게. 일 크게 안 키우고 잘 해결할 테니까 걱정 마."
이따위 자신만만한 말 한마디만 남기고서.
그때 그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람은 언제, 어느 순간에서나 후회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이 했던 잘못이나 실수를 깨닫지 못한다면 인생의 길을 바로 잡지 못할 것이다.
난 이때 지훈의 손을 놓은 것을 후회한다.
그렇다면 다민이는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또, 생각에 잠길까?
"정지윤, 큰일 났어!"
서진이가 저 멀리서 후드집업 소매를 흔들며 달려왔다.
서진이의 눈동자가 매우 빠르게 흔들렸다.
특유의 빠른 목소리와 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불안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무서웠다.
서진이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학교 뒤편 주차장이었다.
그곳에는 많은 시선들이 모여 뒷말들을 나르고 있었다.
난 그 시선들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 그 둘을 맞이했다.
빨간 눈가와 초롱초롱한 눈빛, 지훈은 나를 쳐다봤다.
지훈이 고개를 듦과 동시에 나민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난 애써 울음을 참으며 둘에게 다가갔다.
"이지훈, 너 뭐 하는 거야?"
나민이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지훈은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그 눈에 맺힌 눈물도 나와 눈이 마주치며 슬슬 나온 것이다.
나민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너 왜 이렇게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난 가슴이 쿵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절로 지능이 낮아지고 인지능력 또한 저하되는 듯한 느낌.
더럽고 불쾌한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난 뭘 할 수 있지?
이 많은 인파와 시선들, 입들, 귀들.
이들 사이에서 난 할 수 있는 게 없다.
난 멍하니 지훈만을 바라봤다.
나민이는 지훈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옆에서 입을 가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서진이와 함께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난 지훈을 보며 눈을 흘겼다.
"우리 얘기 좀 해야겠다."
지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넌 무슨 생각으로 나를 뿌리치면서 까지 나민이 한 테 간 거야?"
"미안해, 난 그냥 네 일을 해결해 주고 싶었어."
"아니... 내 일을 네가 왜 해결해?"
난 마른세수를 하며 지훈을 쳐다봤다.
이리저리 검은 눈동자를 잘만 굴리며 내 눈치를 본다.
일을 벌여놓고 눈치만 보며 아무 말 못 하는 지훈을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지훈을 이해해 보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사실 남의 일에 그다지 발 벗고 나서는 편이 아니었다.
지훈은 남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내 기준에선 어쨌든 남이 맞았다.
난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는 지훈을 내버려 둔 채로 자리를 떠났다.
난 곧장 민지에게 갔다.
민지는 이럴 때마다 나를 잘 도와주고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줬었다.
민지는 말 그대로 해결사였다.
민지와 서진이 사이에 끼어 아까의 사건을 내 시점으로 설명해 주고 있었다.
민지와 서진이도 마침 나민이에게 갔다 오는 참이라며 한숨을 쉬어댔다.
나만 힘들어도 됐었는데...
난 일단 교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교실에 가니 지훈이 내 자리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내가 교실로 들어가 문을 닫으니 지훈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지훈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불안한듯한 몸짓과 표정, 아무 말하지 않고 굳건하게 닫혀 있는 입술.
모든 것이 지금의 나에겐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그런 지훈을 무시한 채 내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
"아냐, 됐어."
지훈은 내 소매를 잡았다.
줄곧 이랬다.
무언가 불안하거나 슬프면 내 소매를 잡고 늘어뜨렸었다.
그때의 난 그런 지훈을 마냥 귀엽게만 봤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난 팔을 확 잡아 빼며 지훈을 밀쳤다.
" 아, 좀...! 오지 마."
지훈은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울렸다.
이 종이 누군가에겐 수업을 알리는 종이였겠지만.
나에게는 지옥을 알리는 종과 다름이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지훈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피했다.
난 그런 지훈에 머리가 아파졌다.
왜 나를 곤란하게 만들어 놓고..
지훈은 나를 더욱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다.
내가 지훈에게 화를 내긴 했지만 결코 지훈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를 낸 것은 내 잘못이 맞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날 궁지로 몰아내 놓고 나를 피해버리기까지 하는 것은 지훈의 잘못이다.
난 지훈 덕분에 소문이 안 좋게 퍼지고, 친구 사이에도 스파크가 튀길 것인데.
그런 나에게 하나 남은 지훈, 그런 지훈마저 나를 피해버리니 사람이 이보다 더 비참해질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미안해."
난 지훈에게 먼저 다가가 지훈을 붙잡았다.
"뭐가? 넌 미안할 게 없잖아."
"아니, 화내서 미안하다고."
지훈은 빨개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응... 나 싫어하는 건 아니지?"
"안 싫어해. "
지훈은 못 믿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난 얼마든지 확인해 보라는 듯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봤지만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듯했다.
지훈은 의심도 많고, 자신감도 낮았다.
울음도 많고... 항상 졸리고 우울해 보였다.
그런 지훈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그 많은 여자아이들은 이런 지훈을 매몰차게 버려버린 것이다.
밴드부 주장이라는 그 권위와 겉 껍데기만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는 자기 최면을 건 것일까.
아니면 그냥 지훈의 부정적인 성격이 잘못된 것일까.
난 순간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이 멍청한 애를 달래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훈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을 없었다.
아무리 말로는 서로 믿는다고 해도 속은 항상 다른 법이니까.
결국 모두가 개인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서로를 믿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참 모순적인 말.
우리는 이런 모순적인 사회와 제도 속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나와 지훈 또한 속해있다.
지훈은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지 않을 정도로만 간당간당하게 눈물이 차고 올랐다.
지나가는 아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의 지나친 시선, 관심보다는 당장 앞에 놓인 이 아이가 중요하니까.
지훈의 눈물은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눈물이 많은 탓인지는 몰라도 지훈의 눈물은 정말 끊임없이 반짝였다.
지훈을 달랜 후, 교실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다들 나와 지훈에게 관심이 없었다.
난 그나마 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학교가 끝나고 바로 뒤였다.
민지와 서진이, 진희, 강훈이가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장소는 우리 집, 아마 중요하고 진지한 회의를 하기에는 이만한 장소가 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민지가 첫 타자로 입을 열었다.
다음 타자는 누구일지 정말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글쎄.. 나도 이 상황이 정말 황당하다."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서진이는 곤란한 표정으로 민지와 날 번갈아가며 쳐다봤고, 진희는 그 똑똑한 머리로 열심히 해결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강훈은 별생각 없이 바닥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이나 하고 있다.
누워있는 꼴을 보니 여기가 아주 제 집 안방이다.
서진이는 일단 상황을 엿보기 위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전화를 시도했다.
전화를 받은 나민이는 매우 화가 나 보였다.
우리 앞에서 하지도 못하고 쭈글대는 말들을 와다다 뱉어내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와, 나 정말 정지윤이랑 이지훈 그 연놈들을 아주 작살내 버릴까?-
-어떻게 할 건데-
-칼로 쑤셔 버리지 뭐~-
나민이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사실 나민이의 이런 허세에 익숙해져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진희는 나민이의 말에 기막힌 생각하나를 말했다.
"나민이 가 지윤이랑 이지훈 씨를 칼로 찌른다 했잖아. 그리고 이거 통화 기록이 녹음되지?"
"그렇지않나?"
"그럼 나민이 가방에 칼을 넣어놓고 이 녹음을 틀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모두가 그 자리에서 즉시 웃음을 터트렸다.
나 또한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따윈 잊은 채 깔깔 웃어댔다.
모두가 눈물 한 방울씩 흘리고 나서야 웃음을 멈췄다.
곧이어 나민이 가 비아냥 거리며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강훈은 거의 우는 듯 웃음을 참아댔다.
나민이 와 통화 중이라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는 순간이었기에 강훈은 제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질 때까지 끅끅 대며 웃음을 참았다.
강훈은 마치 질식한 사람처럼 보였다.
진희는 혹여나 강훈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강훈의 입에 납작하게 눌린 휴지심을 구겨 넣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아예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겨우 웃음을 참아낸 강훈은 헉헉대며 거친 숨을 몰아 쉬고는 다시 마저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나민이의 생각을 듣고 골머리를 앓았다.
이 상황에 지훈 혼자만 쏙 빠져있었다.
머리 하나 더 있다고 뚝딱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힘을 보태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