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과의 갈등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던 나날들.
수행평가도 기말고사도 없이 한가로운 날만이 반복되었다.
우리는 이런 나날에 즐거워하며 여행 떠날 계획이나 잔뜩 짜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난 아침부터 지훈과 놀다 지쳐 오후부터는 집 안 구석에 박혀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물론 그때에 지훈도 나와 함께 있었다.
우리는 아빠가 집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같은 공간에서 바로 옆에서 잠들었다.
둘 다 공기 맑은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해 오후까지 신나게 노느라 정신이 붕붕 떠있었고, 점점 의식은 흐려져 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 누운 것을 마지막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훈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난 날 흔드는 손길에 정신 못 차리고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인 광경은 겁에 잔뜩 질린 지훈뿐이었고, 그 외에는 없었다.
난 그런 지훈에 의아해하며 지훈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지훈은 무언가 일이 있으면 입을 잘 열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잔뜩 겁을 먹은 상태이니 더욱더 그랬다.
"무슨 일인데?"
내가 묻자 지훈은 벌벌 떨던 손으로 말을 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난 지훈을 따라 물음표 가득한 얼굴을 한채 집을 나섰다.
밖은 벌써 어둡고 하늘이 칙칙하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아홉 시쯤 된다.
학교 안 벤치에 앉아 지훈과 대화를 시도했다.
지훈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빨간 눈가만 비비며 나를 본다.
"무슨 일이냐고. 말 좀 해봐."
내 말에 지훈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까 너 잠들고 아버지께서 방에 들어오셔서는 엄청 화내셨어."
난 그 말에 놀랐다.
평소에도 내 남자친구와 노는 것에 참견질을 해댔던 아빠였기에 내 걱정은 더 해졌다.
그런 아빠와 달리 엄마는 내 연애 이야기를 소설 보듯 잔뜩 기대하며 들을 뿐, 아빠처럼 아예 간섭하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난 머리를 싸매며 골똘히 생각했다.
지훈은 내 옆에서 내 팔이나 붙잡고 멍하니 차가운 바닥만 바라본다.
충격이 컸었던 것인가?
눈물이 워낙 많았던 지훈인지라 눈가는 이미 빨갛고 눈물은 상가 빛에 반사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눈물을 눈 밖으로 흘리지는 않았다.
난 이 사실을 알리려 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는 요즘 밖에 나가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엄마는 아마 지금 이 사태를 모를 것이다.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연락을 하니 엄마 또한 깜짝 놀랐다.
아빠가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간섭할 줄은 몰랐던 걸까.
난 지금 집에 없는 엄마를 원망하듯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집에 있었더라면 아마 아빠의 화가 덜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빠는 예전부터 엄마가 집에 없으면 우리에게 평소보다 더 못되게 굴었었다.
엄마에게 잡혀 살던 그간의 노여움을 풀고 싶었던 것인지 우리에게 갖가지 짜증이란 짜증은 다 냈고, 냉장고에 박혀있는 음식의 주인이 누구이든 간에 닥치는 대로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어렸던 내가 그것에 대해 속상해하면 뻔뻔하게 역으로 화를 내며 나를 때리곤 했었다.
난 전부터 그것에 대해 매우 불편해하고 있었고, 이것은 둘째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동생은 나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았다.
나는 첫째에다가 하나뿐인 여자애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친절하게 날 대해줬었다.
그리고 막내는 막내대로 예쁨 받았다.
하지만 둘째는 별로 큰 애정을 받지 못했다.
마침 둘째가 사춘기를 맞은 터라 상황은 더 심각했다.
아빠는 하루가 머지않고 둘째를 욕하고, 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둘째는 우리 집에서 거의 찬밥 신세였다.
첫째인 나와 막냇동생처럼 부모님과 나가서 시간을 보내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집에서 둘째가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둘째가 지훈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하긴 둘째가 아빠의 편을 듣는 것이 더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친분도 없는 지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하기야 지 잘못도 모르고 나를 가해자로 만드는 아이도 있는데 이런 일쯤은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화가 났다.
요즘 지훈은 몸이 안 좋다.
자꾸 심장이 아프다고 하질 않나... 가끔은 길을 가다 비틀거리리도 한다.
매일 밤을 새우고, 기타만 죽겠다 연습하는 지훈이기에 몸이 안 좋아지는 게 맞았다.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지훈은 어째선지 병원에 좀처럼 가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병원에 보내면 항상 안 좋은 결과를 들고 헤벌레 웃으며 내게 온다.
지금도 그렇다.
일주일 전쯤, 내 권유로 반강제 적으로 병원에 다녀온 지훈이 안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
지훈은 현재 심장이 약해졌고,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몸은 혹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당분간 쇼크 받는 일 없기 하라더라."
지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또 뭐가 좋은지 깔깔 웃어댔다.
그런데...
지훈은 지금 굉장히 큰 충격을 받은 듯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왜인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였고, 일어설 때마다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심지어 아까 학교에 들어오며 갑자기 심장 쪽을 붙들고 주저앉기도 했다.
난 그런 지훈에 걱정과 함께 아빠에 대한 분노가 휘몰아치게 되었다.
난 정말 아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의 행동은 마치 뇌가 없는 사람이 행동 먼저 하는 것 같았다.
난 최악적인 아빠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채로 지훈을 부축했다.
지훈의 몸은 나에겐 너무 컸지만 어찌어찌 안간힘을 써 겨우겨우 부축을 해냈다.
지훈은 몸이 안 좋고, 집에 가기에는 상황이 별로라 난 서진이를 찾아가기로 했다.
서진이네 집은 한창 추석 맞이를 하고 있다.
약 8시간 전, 서진이에게 한 메시지가 왔었다.
-오늘 고모 오신대. 추석이라 다들 우리 집에 모이기로 했나 봐.
-잘됐네.
-잘되긴 뭐가 잘됐다고? 고모 오시니까 오늘은 내 방 대 청소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긴... 서진이의 방을 치우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진이의 방의 꼴은 좋게 말하면 돼지 우리, 나쁘게 말하면 쓰레기장이었다.
나는 서진이의 메시지에 웃음으로 답한 뒤, 지난 추석 날의 일화를 들려달라고 했다.
-지난 추석에는 엄청 웃긴 일이 많았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
-큰 아빠가 식당에서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계속 우리 아빠한테 배고프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아빠가 기다리라고 하면서 큰 아빠랑 싸웠지.
근데 음식이 나오고 나서 고모가 갑자기 "쳐 먹어!"라고 하셔서 다들 조용히 밥 먹었어.
-뭐야 그게! 넌 맛있게 먹었고?
-야, 말도 말아. 그런 분위기에서 밥을 어떻게 먹니?
-그렇긴 해.
-근데 우리 오빠는 그 상황에서 눈치 없게 혼자 우걱우걱 밥 먹고 있었다니까?
-뭐야, 너희 오빠 참 웃기네.
서진이와 이런 잡담을 나누며 소소한 재미를 얻는 것이 참 좋았다.
그런데 현재에는 그런 재미 하나 못 느끼고 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 버린 지금.
난 서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지윤아.
서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고 나니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국 나도 지훈 따라 붉은 눈이 되었다.
눈이 뜨거워지니 목소리도 흐트러져 우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
서진이는 그런 나를 걱정했다.
서진이는 나를 만나러 아파트 앞, 편의점으로 날 만나러 나왔다.
지금 막 집에서 나온듯한 잠옷 차림의 모습.
아주 익숙한 실루엣에 포근함이 느껴진다.
서진이는 나를 위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나는 울먹이며 서진이에게 사정을 전부 털어놓았다.
서진이 또한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내 말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지훈은 서진이와 편하게 이야기 하라며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지훈을 날 추운 밤에 혼자 내보려 두는 것이 좀 신경 쓰였지만 괜찮다는 그 은은한 미소에 맡겨 서진이에게 다가갔다.
"너희 집에 가족들 모여있는데 이렇게 나와도 괜찮은 거니?"
"아빠한테 사정 다 말하고 왔지. 그랬더니 아빠가 빨리 나가보라네."
서진이는 아주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했다.
덕분에 내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곧 서진이를 이만 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대화하고 즐겁게 떠드는 것은 정말 좋다.
하지만 그만큼 헤어질 때의 아쉬움이 크다.
난 공허한 마음으로 서진이에게 손을 흔들고는 지훈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어두운 밤, 우리가 갈 곳은 없었다.
집에 들어가긴 죽어도 싫었지만 멍한 얼굴로 허공만 응시한 채 힘 없이 걷는 지훈을 마냥 방치하고 있을 스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 생각했다.
이대로 지훈을 붙잡아 둘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희생해 집에 들어가서라도 지훈을 집에 보낼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두 번째를 선택했다.
지훈이 아무리 날 위해 뭐든지 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무리하면 나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난 몇 분이라도 더 빨리 지훈을 집에 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제 집에 가야지. 몸도 안 좋잖아 너."
내 한마디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멍한 안광 없는 눈동자도 빛에 비춰 반짝였다.
난 그렇게 지훈을 집에 보낸 뒤, 나 또한 집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평온한 집안의 분위기와 공기이다.
난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조용히 고요함을 느꼈다.
텅 빈 방과 책상 위, 쓰레기 더미는 여전했지만 어째선지 마음은 파도가 치듯 울렁거렸다.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내가 평소 느껴보지 못한 그런 느낌.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감정이 생긴 기분이었다.
불쾌한 느낌에 몸부림치다가도 어느새 그 기분에 익숙해져 허공만 바라보게 되었다.
어쩌면 오늘을 계기로 또 하나의 감정을 느끼고, 성장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