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3학년이 끝나고, 고등학교에 올라갔다.
그동안 많은 일과 사건이 있었다.
그 결과로 지훈과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던 해에 이별을 맞이했고, 별로 슬프지는 않았다.
그냥 몽롱하고도 어벙벙한 느낌.
지훈과 평생 함께 할 줄 알았던 순간도 어느새 지나가고 난 이제 26살이 되었다.
만만한 대학에 들어갔으나 도중에 중퇴하고, 앱 개발 회사의 디자인을 도맡아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중이다.
그렇게 살고 있던 중, 내 이메일로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동창회, 6월 15일]
동창회...?
바쁜 와중에 딱하고 날아온 귀하지 못한 소식이다.
하필이면 중학교 동창회를 지금 연다니.
나는 동창회를 한다는 소식에 힘이 다 빠졌다.
그리고 동시에 어렸을 적 사귀었던 남자친구의 생각이 났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때로는 좋고, 때로는 안 좋은 것이다.
이 기억은 별로 좋지 않았다.
7년 전이였다.
지훈과 사귄 지도 벌써 몇 년은 더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런가 지훈과 나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훈은 이제 내 메시지나 DM은 보지도 않는다.
난 그런 지훈이 거슬렸었다.
이제 슬슬 관심이 식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별일 있어?"
"아니, 별일 없어."
"그런데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내가 따져 물어도 지훈은 입만 꾹 닫고 있었다.
나도 안다.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진다는 것을.
하지만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나에게 해가 된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난 지훈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어도 이게 차라리 편했다.
그런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화병이 돋을 것만 같다.
그래도 내 과거에는 추억이 많았다.
난 과거의 추억을 생각하며 동창회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창회 당일, 한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시끌벅적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한 테이블을 지날 때마다 익숙한 얼굴들이 앉아있다.
난 그중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대충 물만 홀짝였다.
그때.
"뭐야 정사장?"
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훈이였다.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다.
중학생일 때 보다 더 성숙해진 것과 헤어스타일이 바뀐 것 빼고는 전부 예전과 똑같았다.
"잘 지냈냐?"
"어.. 뭐."
"넌 뭐 하고 지냈냐? 갑자기 소식이 딱 끊겨서 너 죽은 줄 알았네."
난 강훈의 섬뜩한 말에 몸을 움츠렸다.
"죽긴 누가 죽었다고 그래?"
"하하."
"그나저나 너 진희랑은 어떻게 됐냐?"
난 갑자기 진희의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강훈과 진희가 어찌 됐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 말에 강훈이 웃음을 활짝 띈 채로 신나게 떠들었다.
"나 이번에 결혼해."
"설마 진희랑?"
"당연하지 짜샤!"
강훈의 말은 정말 놀라웠다.
둘이 그 정도로 진지한 관계였는지도, 결혼까지 할지도 몰랐으니까.
난 진희가 혹시 동창회에 왔을까 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여자를 발견했다.
높고 동그란 코, 가느다란 눈, 찰랑이는 긴 웨이브 머리.
진희도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난 진희를 발견하고서 진희에게 다가갔다.
"진희야!"
긴 머리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마치 자신이 진희가 맞다는 듯 웃었다.
난 진희에게 가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진희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구...?"
"나잖아 지윤이."
"아! 정 씨?"
진희는 마침내 기억이 난 듯 목소리 톤을 높였다.
난 그런 진희에게 웃어 보이며 탁자 위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보니 기분이 붕 떠서 좋았다.
그리고 다행이게도 그는 동창회에 오지 않는 모양이다.
잘됐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술을 몇 잔 째 들이마셨다.
"결혼한다며? 축하해."
난 진희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와중에 결혼을 한다니 팔자도 참 좋다.
축하인지 비꼬는 것일지 모르는 빈말을 꺼내며 둘을 쳐다보았다.
꽤나 행복해 보이는 모습.
난 그런 진희와 강훈에 마음 한편이 따듯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신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유리문이 덜컹거리며 문 위에 달아둔 종이 울렸다.
난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기타 가방을 매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선 사람.
그는 지훈이였다.
오랫동안 보지 않았기에 낯설었다.
그도 그랬을까.
지훈과 난 눈이 딱 마주쳐버렸고, 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진희는 무언가 눈치챈 듯 내 어깨를 감싸왔고, 강훈은 왜 눈을 피하냐며 눈치 없이 크게 떠들어댔다.
진희는 그런 강훈의 팔을 팔꿈치로 치며 강훈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난 지훈을 보고는 온몸을 떨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차가운 시선과 사라진 관심은 나를 낯설게 했고, 이제는 지훈이 아예 남처럼 느껴졌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지훈이기에 더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지훈은 나를 지나쳐 남자들만이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지훈의 오래된 친구들이 가득한 테이블이었다.
"오, 이지훈. 결국은 기타로 성공하네. 너도 참 독하다."
"넌 패션으로 성공했잖아. 네가 더 독하지 않아?"
안부를 물으며 칭찬을 건네는 것이 평범한 동창회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훈의 친구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너 고등학교생 때 , 정지윤이랑 결혼할 거라고 아르바이트로 돈 벌고 그러지 않았냐?"
난 순간 그 남자의 말을 듣고 술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기분.
오랜만에 느끼는 생기였다.
난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봤고, 지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난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빠르게 술을 몇 잔이나 들이켰고, 지훈은 그런 나를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은 점점 흐려져 오고, 내 앞에 쌓인 술병도 많아졌다.
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술에 너무 심하게 취해서 그런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편의점에 도착한 직후, 평소처럼 바나나 우유 하나를 골라 카운터로 천천히 이동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더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만큼 내 속도 상해버려서 속이 쓰렸다.
내가 카운터에 바나나 우유 하나를 내려놓자 뒤에서 무언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겁고도 진지한 인기척.
그것은 지훈이였다.
지훈은 카드를 아르바이트생에게 주고는 날 보고 웃었다.
난 순간 놀라서 뒤로 몸을 뺐다.
"안녕, 오랜만이네. 왜 아까 인사 안 했어?"
난 지훈의 말에 놀랐다.
머리가 텅 빈 듯한 느낌.
이 느낌도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난 서둘러 구매한 물건도 챙기지 않은 채 편의점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지훈은 그런 나를 붙잡았다.
"내 돈 써서 사준 건데, 가지고 가."
지훈의 손에는 아까 구매했던 바나나 우유가 들려있었다.
지훈이 내게 손을 내밈과 동시에 지훈의 약지에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난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멍해졌고, 빠르게 지훈을 돌아섰다.
지훈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곧바로 나를 따라왔다.
"넌 나 안 보고 싶었냐?"
"글쎄, 우리 헤어졌잖아."
지훈을 보고 지훈과 다시 잘 지내볼 마음이 생기려 했지만 지훈의 반지를 보고 그런 마음이 식어버렸다.
어렸을 적의 사랑.
그것을 다시 되찾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난 울먹이지도 않고 지훈을 떠나려 했다.
반지도 손에 끼고 있는 지훈이 왜 나를 잡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내가 계속해서 지훈의 반지를 보고 있으니 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뭐야, 설마 이 반지 때문에 그러는 거야? 바보 같은 건 여전하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이거 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거야. 그리고 커플링이나 약혼반지였으면 왼쪽에 꼈겠지 왜 오른쪽에 꼈겠니?"
난 너무 창피해졌다.
오랫동안 홀로 지내다 보니 이런 상식적인 것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새빨개진 내 얼굴이 술 때문인지 창피하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때, 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땐 미안했어. 너한테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었나 봐."
"괜찮아. 나도 내 생각만 했는걸."
내가 이렇게 말하자 지훈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그런 미소에 머리가 마치 기계처럼 돌아갔다.
"우리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때?"
"어떻게 다시 시작한다는 건데."
"예전처럼 다시 만나자고."
지훈은 놀라운 말을 했다.
아무리 여유로운 지훈이라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진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난 기억 속의 지훈을 다시 떠올렸다.
다정했던 모습, 내게 화를 내던 모습.
생각해 보니 전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난 이 순간 지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갑자기 생긴 벽을 뚫을 생각조차 안 하고 포기해 버린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훈은 가로막힌 벽을 매만지던 나에게 사다리를 내려준 빛 같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매몰차게 버려버린 것은 나였다.
지금에서야 보인다.
지훈은 학생일 때 보다 더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래 좋아."
난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후회 없이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난 그렇게 다시 지훈과 만나게 되었다.
결혼식 당일,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한다.
친구 결혼식에 가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한껏 꾸며 입었다.
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 곧 도착해.
난 지훈의 말을 듣고 재빠르게 틴트를 입에 발랐다.
시간이 지나고, 지훈과 난 식장에 도착했다.
흰색의 큰 건물.
지훈과 난 예전과 같이 함께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식장 안에 들어서고 바로 가방에서 축의금 봉투를 꺼내 나무 상자 안에 넣었다.
식장에 들어서기 전에 신부를 잠깐 동안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나와 지훈은 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진희야."
진희는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귀여운 미소이다.
벌써 우리의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난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에 눈물을 닦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진희는 정말 아름다웠다.
교복을 입던 때의 진희를 상상해 보니 또다시 울음이 나오려 했다.
지훈은 그런 나를 데리고 하객석으로 갔다.
지훈과 난 신부의 하객석 쪽으로 갔다.
곧이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감동적인 노래와 프러포즈 동영상, 주례 등.
많은 차례를 거쳐 결혼식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결혼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부케 던지기...
난 부케에 관심이 없어 얼굴이 익숙한 친구들 사이에서 장식품 마냥 서 있었다.
그런데...
툭
내 앞으로 부케가 날아오더니 그대로 내 품 안에 들어왔다.
난 놀란 눈으로 하객석에 있는 지훈을 바라보았고, 역시나 지훈도 놀란 눈을 한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