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에 긴 글이 쉴 틈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심연의 코드를 발견해 낸 누군가는 원망과 분노가 응축되어 있는 마음을 눌러내며 글을 써 내려갔다.
아마 글을 쓰고 있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돋도 피가 고일 것이다.
보통 살인청부를 의뢰하는 것은 웬만한 원한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심연은 오늘도 분노에 억눌려 몸 못 가누고 속에서 염불 터져 눈물 흘릴 누군가를 위해 칼을 갈고 있다.
심연 또한 그랬으니까.
곧 심연의 컴퓨터에 이메일이 도착했다.
[청부 살인 대상]
이름: 임라희
나이: 스물여섯
사기 결혼으로 많은 돈을 빼돌림.
청부 살인 대상의 정보였다.
의뢰자는 이 여자에게 당한 것일까.
심연은 무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우선 의뢰자와 대화를 시도했다.
청부살인 대상과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해 본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청부살인 대상에 대해 잘 알 것이다.
-안녕하세요, 의뢰자분.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그 여자를 죽여준다는데 뭣들 못하겠습니까.
모든 질문에 답해드리겠습니다.
-그 여자의 특징이 있나요? 범죄 수법이라던지 자주 가는 곳이라던지...
-그 여자는 사거리의 한 클럽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만난 남자를 붙잡고 번호를 딴 뒤에 계속 연락하여 술을 마시자고 하죠.
그 후에 술에 취하게 하여 지갑에 있는 돈이나 신분증등을 빼앗고 심지어 가지고 있는 소지품 중에 명품이 있으면 그것 또한 빼앗습니다.
이게 그녀의 첫 번째 작전입니다.
-첫 번째 작전이요?
심연은 의아해하며 더욱더 자세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첫 번째 작전이라...
'이 여자 생각보다 더 치밀하게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인가'
심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뢰자의 다음말을 들었다.
-첫 번째 작전에서 실패할 시에 두 번째 작전을 펼칩니다.
저는 첫 번째 작전과 두 번째 작전 모두 당했고요.
아마 제가 술에 강해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두 번째 작전이란 무엇인가요?
-이제 범죄의 대상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통장 비밀번호나 금품 등을 훔치죠.
전 그렇게 제 어머니의 병원비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신고하려 했으나 이미 똑같이 당한 사람만 다섯 명이라고 경찰도 혼란스러워하더군요.
그 여자는 정말 미쳤습니다. 그것도 미친 사기꾼이라고요.
-음, 잘 알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심연의 컴퓨터 화면이 꺼졌다.
심연은 책상 위의 널브러진 겉옷을 몸에 두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사진관 안에 있었다.
의뢰 외의 모든 일에 귀찮음을 느꼈던 심연이었기에 간단하게 숨길 목적으로 사진관의 창고 안에 계단을 박아두었다.
루진은 그것을 가지고 심연에게 항상 잔소리를 해댔었다.
무뚝뚝하고 말없는 심연과 달리 루진은 말 많고 시끄러웠다.
루진은 섬세하고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예민했고, 심연은 둔감하고 뭐든지 대충대충 해결했다.
그렇기에 루진은 항상 심연에게 궂은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런 루진에도 심연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나갔다.
오늘 만큼은 루진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심연은 오늘 밤, 의뢰를 받아 의뢰 대상을 살해하려 나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심연은 사진관을 나서서 의뢰인이 말한 클럽으로 찾아갔다.
검은색 승용차, 심연의 자동차였다.
루진이 어디선가 구해온 낡은 차였다.
출처 없는 자료와 마찬가지인 차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심연의 일 수행에 도움이 되었다.
심연은 30분이나 도로를 달린 뒤에 마침내 클럽 앞에 도착했다.
상가 아래에 조그마한 출입구가 있었고, 외부에서 보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듯했다.
심연은 클럽 앞의 사진을 찍은 후, 유유히 클럽 앞을 떠났다.
"이번 의뢰는 어때? 좀 쉽지 않나."
"내가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것이 아닌데도 이번일은 쉬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겠어."
"그래, 그깟 사기꾼 한 명 죽이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니."
루진은 심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사진관을 떠났다.
심연은 오늘 밤이 다가올 때까지 사무실에서 홀로 의뢰 대상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고, 손이 덜덜 떨리더라도 반드시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신체능력이 좋은 것도,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을 죽여도 무감각한 정신력 덕분에 지금껏 청부살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심연의 독한 정신력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 독한 정신력으로 만만치 않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심연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심연이 어째서 청부살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심연은 저절로 깜빡거리는 눈을 손등으로 비벼대며 종이자락을 팔랑 넘겼다.
잊고 싶은 과거라도 있는 듯 종이를 가득 채운 징그러운 글씨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료를 정리하고 계획을 짜기 시작한 지 3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사무실 문 앞에 놓인 소파와 책장 구석진 곳에 빅혀 있는 먼지투성이 책들만 봐도 속이 울렁거린다.
심연의 속 어두운 틈에서 과거에 묻어 놓았던 기억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왜지?
의뢰 대상이 클럽에 죽고 못 사는 여자라서?
의뢰자가 그 여자를 사기꾼이라 칭해서?
"하..."
심연은 머리를 부여잡고는 겨우겨우 어두운 기억을 숨겼다.
머리에 구멍이라도 난 듯 쑤시고 아파왔다.
입 밖으로 더운 숨을 뱉어내도 고통은 가시지 않고, 이제는 심장까지 두근거렸다.
심연은 손을 떨며 서랍 안의 진통제를 한입에 털어 넣었지.
진통제의 양이 꽤 되었지만 상관없다.
지금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덮쳐올 것만 같은 커다란 파도와 같은 고통을 삼켜야 했으니까.
어느덧 시간은 10시가 되었다.
미세한 진동으로 떨리던 손이 멈췄다.
심연은 진정된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마치 태풍이 온 뒤 엉망으로 어질러졌지만 잠잠한 거리 같았다.
심연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소파에서 휴식을 취했다.
똑똑똑
루진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왜 들어왔어?"
"노크했잖아."
"노크하는 것뿐이 아니야. 노크를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것에 이유도 있나. 그 이유가 뭔데?"
"누가 문 너머에 있나 확인하고, 출입의 허가를 받기 위해서지."
루진은 심연의 말을 듣고 머리를 긁적였다.
"넌 다른 것에는 다 둔감한데, 이런 부분에서는 좀 예민하더라. 혹시 나한테 숨기고픈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루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심연을 툭툭 쳤고 심연은 그런 루진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시 머리에 불이 나듯 뜨거워지는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입만 나불거리는 졸부 딸의 저 얇은 목을 부러뜨려 버리고 싶었다.
"됐다. 내가 너랑 뭔 대화를 하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결국 심연은 루진에게 백기를 들었다.
루진은 항상 심연을 이기고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보과 키가 비슷한 심연을 쳐다보곤 했었다.
루진의 키는 보통 여자보다 조금 컸다.
그녀의 키는 다른 평범한 남자들과 비슷했기에 거리에 나가보아도 루진보다 키가 큰 남자는 보기 힘들었다.
심연은 그런 루진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제 사무실 문 닫을 테니까 들어오지 마."
"뭐야, 벌써 일 시작하는 거야?"
"그래. 1시 전에 들어올게."
"잘 다녀와. 경찰 조심하고."
심연은 사무실을 나섰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아까 그 클럽 앞.
의뢰자를 통해 전달받은 사진 속 얼굴을 찾아 헤맨다.
'벌써 클럽 안에 있나?"
클럽 입구 앞에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심연은 차려입은 화려한 사람들 속에 섞여 클럽 틈새로 몰래 잠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클럽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고막을 강타했다.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춤이나 추고, 술을 마시는 거지?'
심연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위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다.
심연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클럽 중앙으로 향했다.
그런데 심연을 스쳐간 한 여자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묘한 향기가 느껴졌다.
맡으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면서도 코 끝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그런 향이었다.
마치 아름다운 향과 모습을 가진 장미의 줄기에 단단하고도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것 같았다.
심연은 무의식적으로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클럽 건물 뒤편으로 휙 돌아 모습을 감췄고, 심연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에 들어섰을 때쯤, 갑자기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골목 반대편에서는 상가의 빛이 새어 들어와 여자를 비췄다.
심연은 멈춰 선 여자를 쳐다보며 심연 또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의뢰 대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조차 사라져 버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곧이어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마침내 몸을 완전히 돌려 심연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살랑살랑 심연에게 다가왔다.
아까의 알 수 없는 향이 풍겨오며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맞은편 상가에서 빛이 들어와 후광 탓에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심연은 눈을 찌푸리며 여자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여자가 심연의 바로 앞까지 다가오고, 극도의 긴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기... 왜 저를 따라오신 거죠?"
잔잔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심연의 눈앞까지 다가오자 여자의 얼굴이 환해지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여자는 웬만한 여자 가수 뺨칠 만큼 아름다웠다.
시원하고 큰 눈, 오뚝한 코, 적당히 오밀조밀한 입술까지.
좋게 말하면 예쁘고, 나쁘게 말하면 꽃뱀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혹시 저희 어디선가 마주친 적 있지 않나요?"
"글쎄요."
"혹시 술 좋아하시면. 저랑 술 한잔 하실래요? 제가 잘 아는 술집이 하나 있거든요."
심연은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를 따라나섰다.
여자가 도착한 곳은 달빛 상가였다.
아까와 달리 가게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고, 사람들은 가게 안 테이블을 꽉 채우며 시끌벅적 떠든다.
심연도 그들 사이에 섞여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홀짝댄다.
"맥주 좋아하세요?"
"아, 사실 제가 술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어머. 몰랐네요. 커피를 마시는 편이 나았을까요?"
"하하. 아닙니다. 이까짓 술 마시면 되죠."
심연은 큰 컵에 담긴 술을 한껏 들이켰다.
여자는 그런 심연을 보고 또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저희 통성명도 안 했군요."
"그렇네요. 그쪽 성함이?"
"서심연입니다. 제 이름이 참 특이하죠?"
"그렇네요. 저도 좀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여자는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잠시만요."
심연은 손을 뻗어 여자의 입가를 닦았다.
"어머, 무언가 묻어있었나요? 부끄럽네요."
"하하. 별것 아니었어요. 걱정하지 마요."
심연은 술잔을 들고는 싸한 눈으로 여자를 흘겼다.
여자도 그런 심연을 무언가 수상하게 여길만 했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즐거운 듯 대화를 이어갔다.
"제 이름은 에밀리아예요."
"특이한 이름이네요. 혹시 혼혈이신가요?"
"아뇨. 혼혈은 아니고,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그렇군요. 뭔가 특별하네요."
심연은 무언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과하게 반응하며 웃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여자에게로 쏠렸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아, 그럴까요?"
심연은 술잔을 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도 심연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댁이 어디시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이 근처 주택가에 있어요."
심연과 여자는 상가를 벗어난 어둠으로 향했다.
가로등 하나뿐만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두운 길에 뛰어든 심연과 여자는 한 빌라 앞에 멈춰 섰다.
"여기에요."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심연이 돌아서려는 그때, 여자가 심연을 붙잡았다.
"이 인연을 더 깊게 쌓고 싶은데... 혹시 제가 당신에게 차 한잔 대접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럼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심연은 여자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 시간은 1시 반.
그 시각 루진은 제 방 침대에 누워 손톱을 물고 있었다.
천장과 가까운 벽에 걸린 둥근 시계만 바라보며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루진은 심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주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둘이었지만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중학생일 때부터 지금까지 우정을 쌓아왔으니 말이다.
루진은 제 손톱이 몽땅 잘리고 나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연을 찾아야겠어.'
루진은 주차장에서 아빠의 차를 훔쳐 탄 후, 무작정 달렸다.
차바퀴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루진의 손은 핸들을 꽉 잡은 채 움직였다.
'무슨 일 생긴 것은 아니겠지...? 위치추적 어플을 다운로드해 놓아서 다행이야.'
루진은 계속해서 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도로를 내달렸다.
그렇게 루진은 한 빌라 앞에 도착했다.
신축 건물인 것인지 이곳저곳에 '분양'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심지어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까지 열려있었다.
덕분에 루진은 손쉽게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은 것도 여기까지였다.
'몇 층으로 가야 하지..?'
이 건물은 6층으로 한 층에 최대 두 가구가 살 수 있었다.
이 건물을 일일이 다 뒤져볼 수는 있었지만 루진에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심연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루진은 망설이다 결국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버튼이 무언가 이상했다.
6층 버튼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에 범벅이 되어있던 것이다.
"이게 뭐야..? 분 가루인가."
루진은 의아했지만 6층의 버튼을 눌렀다.
띵
6층에 도착한 루진은 빠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 개의 문을 살폈다.
역시나 오른쪽 집 문 손잡이에 분가루가 묻어있었다.
루진은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을 감안하고서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현관문은 생각과 달리 힘없이 열렸고, 집 안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왔어?"
"으악! 깜짝이야."
루진은 귀신을 본 것 마냥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심연은 혹여나 누가 들을까 재빠르게 루진의 입을 막았다.
"미안."
심연의 뒤에는 여자가 바닥에 몸을 눕힌 채로 죽은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모를 모양으로 엎어져 있었다.
심연은 곧 여자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질질 끌었다.
여자는 비명도 안 지르고 심연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바닥을 훑었다.
아마 여자는 이미 몇십 분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루진은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거대한 어둠에게 집어삼켜지는 듯한 느낌이 루진을 덮쳤다.
이렇게 싸늘하게 죽어있는 시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여자 가족이 없어. 어렸을 적에 전부 사고로 죽고 할머니한테 길러졌었나 봐. 그나마 있는 가족은 남동생 한 명인데, 그 마저도 이 여자가 사기꾼인 것을 알고서 연락을 끊고 살고 있나 봐. 심지어 임라희라는 이름도 가짜야. 진짜 이름은 이지선이네."
심연이 손에 구겨진 하얀 서류를 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죽여놓고 사연이 딱하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내 말의 의미는 오히려 좋다는 뜻이었어. 이 여자는 사기꾼에다가 가족도 없으니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신고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잖아."
루진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심연을 보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충격을 받고 머리가 띵했다.
"욱..."
"뭐야, 속 안 좋으면 나가있어. 방해하지 말고."
루진은 심연에게 등 떠밀려 건물 밖으로 내보내졌다.
루진은 곧 헛구역질을 몇 번하더니 결국 이전에 먹었던 것을 전부 게워내고 말았다.
루진의 머릿속에 자꾸 그 여자의 처참한 몰꼴이 떠올랐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 창백한 피부, 목에 드러난 붉은 밧줄자국까지.
엄청난 두려움과 고통이 루진에게 찾아왔다.
멋모르고 가시 밭길에 뛰어든 느낌에 발버둥 치는 루진의 뒤로 심연이 다가왔다.
"이쪽 업계 사람한테 뒤처리를 부탁했어. 우리는 이만 이 자리를 떠나면 돼."
루진은 기세등등했던 아까와 달리 축 쳐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연은 그런 루진을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떴다.
다음날, 심연의 통장에는 백만 원의 돈이 찍혀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의뢰인이 남은 적금까지 싹싹 긁어모아 바친 돈이었다.
청부살인으로 나마 복수할 수 있어 기쁘다는 의뢰인의 성의였다.
-마음 같아서는 백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드리고 싶은데, 시중에 돈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이만큼이면 됐죠.
그렇게 세 번째 의뢰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