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면서 하고 싶은 것들도 많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인생은 육십부터라느니,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느껴지는 변화들을 체감하고 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사람은 발달을 하고, 발달하는 과정 중에 자기와 자아가 만난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말이고, 그냥 살아가면서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 하면 좋은 것을 스스로 알아가는 것 같다. 나의 나이와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그것들의 한계점까지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꾼다는 것을 하고 싶은 것으로 고쳐도 된다면 이 나이에도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다. 그중에서도 지금 나에겐 너무 하고 싶어서 언젠가는 이루고자 꿈꾸고 있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시골에 옛날 농가주택이나 한옥을 잘 고쳐서 살고 싶다.
환상일지도 모른다. 사실 부동산에 나와 있는 집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내가 저 집을 고칠 수 있을까?’이다. 그래도 난 예전에 시골집에서 살았던 때의 마음 잔잔하고 따뜻한 기억들이 넘치게 많아서인지 시골집에서 사는 것을 자꾸만 꿈꾸게 된다. 말갛게 드러난 서까래는 동백기름 바른 머리를 넘기는 참빗 같은 가지런함으로 그 아래에서 밥을 먹거나, 빈둥빈둥 누워서 놀다가도 자꾸 서까래를 올려다보게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조선시대 양반집 규수가 된 듯 살짝 들뜨게 된다. 약간 높은 마루 끝에 앉아 봉당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멍하니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요함에 나도 잠식된 듯 마음이 가라앉는다. 고개 들어 멀리 바라보면 푸릇해진 산들이 내 안으로 밀려올 것만 같고, 하늘 파란 맑은 날엔 바지랑대 높이 올려세우는 빨랫줄에 비치는 햇살이 눈 안으로 들어온다. 아침에 일어나 뒷마당으로 난 문을 열고 텃밭에서 올라오고 있는 채소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면 그들도 이슬을 머금은 채 생기있게 대답한다. 멀리서 손님들이 오면 밭에서 야채를 뚝뚝 끊어다가 밥을 슥슥 비벼 먹게 한 그릇 내어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 집에 이런 것도 있다~’ 하고 보여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남들은 잘 모르는 나 혼자만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 집을 고치고, 시골에서 혼자 지내는 것에 두려움이 생긴다. 하고 싶은 것에서 꿈꾸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는 코이카 봉사활동을 가고 싶다.
코이카와의 인연은 영월교육청에 근무할 때부터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코이카에 방문을 하고 코이카에서 하는 일들을 듣고 봉사단원들의 활동을 보게 되었다. 그 후로 쭉 코이카에서 하는 연수를 들으며 ‘퇴직하면 가야지!’ 하는 마음을 품었었다. 그래서 한국어 교사 자격 과정을 듣기도 했다. 아직 시험을 보지 않은 상태라서 내가 봉사활동을 하러 갈 수 있는지조차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한편에서는 ‘너가 그걸 할 수 있겠어?’라는 말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가고 싶다는 드러난 마음속 깊이에서는 하기 싫은 것과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 사람들도 “봉사는 무슨 봉사냐 그냥 집에서 놀아라, 갔다 오면 몸이 너무 아프다” 등등 만류하는 소리를 들으면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갈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볼 때면 나의 이기심을 보게 된다. 이런 말들이 내 마음 속에 있는 두 마음과 함께 나를 마냥 꿈만 꾸게 하기도 하고,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숨어들게 만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잘 죽었으면 좋겠다고 온 마음을 다해 꿈꾸고 있다. 편하고 빠르고 깨끗하게 죽기를 꿈꾸고 희망한다.
나이가 들면서 부쩍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원하고 꿈꾸는 죽음은 밥 먹다가, 죽 먹다가, 미음 먹다가 물만 먹다가 스르르 잠의 세계로 빠졌으면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사람은 누구나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고 했다. 삶의 욕망인 리비도와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목숨은 이어져가고 있는 것이라 했다. 타나토스가 작동을 잘 하지 않고 죽음의 세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에 독기가 생겨 만들어지는 것이 암이라는 심리학의 의학적 해석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살고 싶은 욕망만이 그득할 때 삶은 죽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경외심과 삶에 대한 존중을 갖는 마음이 우리의 인생을 멋지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삶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은 대화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이 나이에 많이 겪게 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음에도 가장 무거운 과제가 되었다. 주변을 보면 부모님이 90세 이상인 친구도 있고, TV를 보면 80세 이상인 분들이 너무나 정정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수명연장이 되긴 되었다 싶다.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사람도 있으나 더 긴 시간 결핍된 삶을 살아갈 사람도 있을텐데 오래 사는 것이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만 먹으면 백 년도 넘게 살 수 있는 의료체계가 있어서 더욱 그렇다. 아들과 밥을 먹고 병원에 내려주려는데 여러 대의 앰블런스가 삐뽀 소리를 내면서 들어갔다. “급한 환자가 생겼나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데 아들이 “걱정마, 다 살아서 나가요~” 한다. 응급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왠만해서는 다시 건강한 삶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좋은 걸까 싶다. 병원과 가까이 하면 사람 목숨은 연장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고 하지만 죽음의 순간이 오면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이런 과정들을 보고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파도 병원에 가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손가락 끝에 가시만 들어가도 병원으로 빠르게 가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씁쓰레한 웃음이 입가를 지나가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자연적인 삶과 죽음을 추구한다. 자연스레 살고 자연스레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을 꾼다는 것은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인데 세 가지의 꿈을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간소함을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소박한 가운데 마음 가득 들어와 앉는 욕구들이 꿈인가 싶다. 밖을 향해 자꾸만 커지던 꿈을 안으로 향해 놓으니 왠지 단정하고 정리가 된다. 가지런히 놓인 나의 꿈들이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를 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