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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울 Dec 05. 2023

군대에서 기념일 보내기

D-15

네가 군대를 갔다고 우리의 연애가 휴식기인 건 아니었다.

당연히 시간은 흘렀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념일도 돌아왔다.




가장 최근 기념일이었던 2300일.

네가 외출을 나와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당일에는 시간이 안 되어서 못 만나지만 늦게나마 2300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는 만나기 직전에도, 만날 때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리가 2300일이며, 그걸 기념하자고 그날 만나기로 했다는 것을.


하지만 서운하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100일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은 더 이상 그렇게 큰 임팩트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오히려 웃겼다. 둘 다 기념일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날, 우리 집 우편함에는 네게 온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2300일을 기념한 너의 편지 말이다. 나도 네게 편지를 써야지,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2346일인 오늘, 아직도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 감동적이었던 건, 2000일 기념일이다. 2000이라는 숫자는 특별했다. 100일, 1000일처럼 딱 떨어지는 큰 숫자가 주는 느낌은 강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보다 특별한 기념일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경주 풀빌라를 예약하고 놀기로 했다.


운전을 해서 너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날 만난 넌, 갑자기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얘가 뭘 흘리고 온 건가?'라고 생각하며 차에서 널 기다렸다. 그랬더니 저만치에서 네가 꽃다발을 들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횡설수설하던 네가 귀여워 미소 지어지고, 꽃을 받던 그 감동은 파도 같이 마음에 밀려온다.


경주에 도착한 우리는 풀빌라에서 재밌게 물놀이를 하고, 평소보다 더 맛있는 케이크와 밥을 먹었다. 동궁과 월지를 보기 위해 다시 채비를 하고 밤에 나갔는데, 운영 시간이 지나버렸다. 정말 보고 싶었던 거라 아쉬웠지만, 그래도 다음에 오면 되니까 괜찮았다. 우리는 그 아쉬운 순간의 우리 표정과 몸짓을 사진으로 남기며 즐거워했다. 역시 너랑 있는 건 좋다.


그렇게 놀고 이제 우리 집으로 갔는데, 이번엔 꽃바구니가 왔다. 알고 보니 꽃바구니가 잘못 배달되어서 급하게 꽃다발을 내게 준 것이었고, 경주에서 돌아오니 꽃바구니가 도착한 것이었다. 그래서 난 2000일 기념으로 꽃을 두 개나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꽃은 식탁 위에 놓는 것만으로도 날 미소 짓게 했고, 네가 떠난 뒤로도 그 꽃을 보며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 꽃들도 시들기 시작했는데,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최대한 멀쩡한 녀석들을 골라내서 꽃꽂이도 했다.


꽃을 두 개나 받아서 감동한 건 아니었다. 네가 기념일이라고 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에 더 크게 마음이 요동친 것 같다. 현재에 충실하게 나를 사랑하는 너처럼, 나도 부지런히 사랑해야지.




군대를 보내서 기념일 같은 건 절대 못 챙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단념도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우리는 어떻게든 했다.

비록 몸이 멀리 떨어져 있고, 그로 인해 만나거나 연락하는 게 힘들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그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양으로 표현하면 그걸로 족하다.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지금처럼 상황 속에서도 유연하게 사고하며 행동하는 우리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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