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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선생이 교실을 빠져나가자마자 공산이 하모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답답한 귀공자 반장님아. 영어는 네가 제일 잘하잖아. 편하게 읽지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순둥이 닭대가리 저 자식도 그렇지. 자기도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으면서 어쩜 꼰대들하고 똑같을까. 그리고 넌 또 왜 그걸 새로 샀다고 말을 안 하고. 아휴 답답해.”
공산이 자신이 수모를 당한 것처럼 핏대를 세웠지만, 하모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직 영어 본문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만이 하모의 머릿속과 몸 전체를 에워싸고 있을 뿐.
건너편 자리의 최강욱이 하모와 눈이 마주치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공산이 그에게 다가갔다.
“최강욱, 아까는 신세 졌다.”
“신세는. 친구끼리, 당연한 거지.”
최강욱의 말에 공산이 갑자기 눈을 치켜떴다.
“뭐? 친구? 난 너 같은 나이롱환자를 친구로 둔 적 없어. 그건 하모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리고 나서지 좀 마라. 아프다는 놈이 학교에는 영웅 놀이라도 하려고 나오냐? 심심하면 병원 가서 놀아. 학교 물 흐리지 말고.”
최강욱은 어이없어하며 하모를 쳐다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모가 고개를 돌려 공산을 쳐다보았지만, 공산도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최강욱은 몸이 안 좋다고 했지만, 어디가 아픈지는 아무도 몰랐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거머리가 그의 이야기를 했다. 몸이 안 좋아서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집에서 공부하다가 시험 때에만 학교에 나올 거라고. 본인도 어디가 아픈지는 말하지 않았다. 거머리가 나가고서야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아픈 것은 거짓말이고 검사인 아버지의 입김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뿐이라고. 선생들 실력이 형편없으니까,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고 학력고사 준비를 하는 거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욕하는 공산의 말에 아이들 모두가 최강욱을 재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재미없게 생겼다. 민 선생 있을 때는 스트레스 안 받고 좋았는데. 그런데 그 여자도 정말 웃긴다. 애 낳느라 쉰다고 얘기하면 어디 덧나나?”
공산이 투덜대자, 옆에 서 있던 기만이 끼어들었다.
“그런 생각하는 선생이 어딨어? 다들 똑같아.”
“아니야. 몸이 안 좋아져서 갑자기 휴가를 낸 건지도 모르잖아. 민 선생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민 선생을 두둔하는 하모의 말에 공산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야, 조하모! 넌 순진한 거니 아니면 민 선생이 그렇게 좋은 거니? 항상 민 선생 편만 들고. 근데 좋아해 봤자 소용없다. 널 배신하고 결혼하더니 애까지 낳는 거 아니니. 잊어버려. 거머리 말대로 대학 가면 널린 게 여자다.”
“알았어, 민 선생 이야기는 그만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는 하모에게 기만이 맞장구치며 다시 나섰다.
“하여간 선생들 다 똑같다. 뽀미는 또 어떻고? 미친년, 내가 뭐 자기가 좋아서 편지 쓴 줄 아나?”
“편지? 그건 또 뭐야?”
“참, 그게 있잖아.”
머쓱해하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기만을 보며 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년 여름 방학 때 뽀미한테 편지를 보냈거든. 그때 엄마랑 아빠 사이가 무지 안 좋았어. 집에 가면 아빠는 큰소리치고, 엄마는 울고불고. 그래서 뽀미한테 위로받고 힘 좀 내겠다고.”
“그래서? 답장은 받았어?”
“답장은 개뿔. 개학하고 교무실로 부르더라. 다른 꼰대들 앞에서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다른 애들도 다 힘들어. 그냥 버티는 거야. 대학 가려면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러더라. 옆에 있던 꼰대들 다 웃고 떠들고. 배신감이 이런 거구나 싶은 거 있지. 내가 뭐 연애편지라도 보낸 줄 아나? 미친년!”
“그러니까, 왜 하필 뽀미였어? 차라리 민 선생이 낫겠다.”
공산이 기만을 보며 답답해했다.
하모는 겨울 방학에 민 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기만의 마음과 같았다. 연애편지가 아니었다. 그저 잘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모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오늘 일은 잊어버리라니까. 닭대가리는 내가 혼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모는 야자도 빼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닭대가리 생각뿐이었다. 갯장어라고 부르는 것은 무시하면 끝날 일이다. 문제는 사전이다. 사전이 깨끗하면 공부를 안 하는 거라는 터무니없는 편견, 사전으로 제자의 머리를 툭툭 치며 우습게 여기는 태도에 화가 나는 거다.
하모는 책상 서랍을 열고 일기장을 꺼냈다. 분하고 억울한 오늘의 사건을 기억 속에서 꺼내어 일기장에 영원히 파묻고 싶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훌훌 털고 일어서고 싶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닭대가리
갯장어
별명
사전
사전
사전
용서
‘용서’라고 적고 나니 너무나 억울했다.
‘내가 왜?’
용서라는 두 글자에 가위표를 하였다.
그는 다시 ‘저주’라 적었다.
조금 겁이 났지만…,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