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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딧불이

3

by 판도



5교시는 민 선생의 영어 수업이었다.


열린 창문으로는 더운 바람만이 몰려들었고, 아이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천장에 매달린 실링팬은 걸핏하면 고장이 나서 아무도 고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찜통 같은 교실에 갇혀 까닭 모를 벌을 서고 있는 느낌이랄까.


창밖은 더했다. 운동장의 흙은 오븐에서 갓 구워낸 쿠키처럼 바스락거렸고, 회백색 시멘트 담장을 따라 늘어선 어린 상수리나무들은 물 빠진 초록 손바닥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책받침 속에 갇힌 소피 마르소만이 흐느적거리며 힘겹게 바람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졌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에 들어선 사람은 민 선생이 아니라 아침에 교문을 지키고 서 있던 바로 그 낯선 사내였던 것. 아이들 모두 입을 다문 채 사내를 주시하는데, 앞자리 아이의 등짝에 숨은 공산이 하모를 돌아보며 자기 머리통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반장, 인사 안 하냐?”


얼떨결에 일어선 하모가 웃음을 참으며 구령을 외쳤다.


“차렷! 경례!”


아이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반갑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교실 뒤편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들이 웃음소리가 난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거기 맨 뒤.”


사내가 출석부로 창가 맨 뒷자리를 가리켰지만, 아이들 모두 책상에 코를 박고 딴청을 피웠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방금 나랑 눈 맞추고 고개 파묻은 밤송이!”


슬쩍 고개를 들어 교실을 둘러보던 한 녀석이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자백하듯 물었다.


“저 말이에요?”


“교실에 밤송이는 너 하나뿐인 것 같구나.”


“그런데 저한테 왜 그러세요?”


“요놈 봐라. 왜 그러냐고? 일어서 보면 안다.”


밤송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조금 전에 왜 웃었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뭐가 아니지? 안 웃었다는 거냐?”


“우, 웃었어요.”


밤송이는 바로 꼬리를 내렸지만, 말투는 불퉁불퉁했다.


“그래, 왜 웃은 거니?”


선생은 끈질겼다.


“잠깐 딴생각했어요.”


“딴생각? 무슨 생각?”


선생이 물고 늘어졌지만, 녀석도 만만하지 않았다.


“딴생각하고 웃은 건 제 잘못인데요. 그런 거까지 다 말해야 해요?”


“녀석, 정색은. 그래, 네 이름이 뭐냐?”


“용기만입니다.”


그의 한마디에 아이들이 자지러졌다.


“용기만? 용씨 성도 있나?”


“아, 아니에요. 엄기만입니다.”


허둥대며 이름을 고쳐 말하는 아이를 선생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 이름이 뭐라는 거냐?”


“죄송해요. 엄기만이 맞아요. 용기만은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인데 말이 헛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 용씨 많아요.”


기만이 던진 웃음 폭탄으로 아이들은 책상을 두들기고 발을 구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모의 눈에는 일부러 과장된 행동으로 긴장의 벽을 허물려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처음부터 깐깐하게 나오는 선생이 싫었지만, 그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 또한 아이들은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과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아이들뿐이었다.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 선생도 아이들이 웃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자기 이름도 헷갈리는 애는 처음 보네. 아무튼 네 덕분에 신나게 웃었다. 어디 고3이 웃을 일이 있겠냐? 그리고 용기만, 책상 들고 앞으로 나오너라.”


“제 자리는 여기인데요?”


기만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선생을 보았다.


“나도 잘 안다. 책상만 들고 오지 말고. 그래, 의자랑 책도. 옳지.”


선생이 엉거주춤거리는 기만을 교탁 앞 통로에 앉혔다. 기만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여기가 네 자리다. 얼마나 좋니? 칠판도 잘 보이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리고.”


선생이 교실을 둘러보았다.


“또 누구, 앞에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


기만이 잽싸게 고개를 돌렸지만, 손을 드는 아이는 없었다.


“그러면 내 소개를 하마. 이름은 안순동, 앞으로 ‘티처 안’이라고 부르면 된다. 전공은 영문학으로 영국에 가서 국비 장학생으로 2년간 공부했고 올봄에 졸업했다. 참, 민 선생님은 출산 휴가로 당분간 내가 계속 가르칠 거다. 질문 있니?”


선생의 말이 끝나자 다시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럼 수업 시작하자.”


“저기요, 티처 안!”


기만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새 자리에 적응은 됐니?”


“아직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올해 대학교를 졸업한 거예요?”


“그렇단다. 올봄에 졸업했지.”


“서울대요?”


“서울대? 거기는 아닌데?”


기만이 실망한 듯 다시 물었다.


“그래요? 교감 선생님이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서울대 나왔다고 했는데. 이상하네.”


“글쎄. 선생님 모두 실력이 뛰어나다는 말씀이겠지. 중요한 건 전공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느냐가 아닐까 싶다.”


“그게 있잖아요. 담임은 그렇게 얘기를 안 했거든요. 전공은 필요 없고 명문대 가야지만 취직도 잘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요.”


“너희 담임 선생님이 누구지?”


“거머리요. 아, 아니요. 수학 가르치는 교무부장이요.”


“김 선생님이 1반 담임이시구나. 선생님은 너희가 더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말씀하셨겠지.”


기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들마저 고개를 젓는 것을 본 선생이 새삼 강조했다.


“잘 들어라. 대학이란, 공부 잘하는 학생만이 가는 데가 아니다. 공부를 깊게, 그리고 아주 많이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가는 곳이지. 즉, 학문 탐구에 열정이 가득한 학생들이 가야 마땅한 곳이다. 자 그럼, 진도 나가자.”


출석부를 훑어보던 그가 눈을 반짝였다.


“우리 학교에 갯장어가 있었네.”


눈치 빠른 아이들 모두 반장을 쳐다보았다. 교실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며 그가 물었다.


“갯장어가 누구지?”


아이들이 다시 하모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선생이 답답해 죽겠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갯장어!”


“……”


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꼬리를 올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짜증이 가득했다.


“조하모가 누구냐니까?”


“…네.”


대답하는 하모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아, 반장이 갯장어였군. 근데 왜 대답을 안 해?”


선생의 목소리가 다시 상냥스러워졌다.


“갯장어는 제 이름이 아닙니다. 저를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대답해요?”


부드러워진 선생의 말투와는 달리 하모의 목소리는 적개심으로 꿈틀거렸다. 1학년 첫 일본어 수업에서 선생은 하모를 다짜고짜 갯장어라고 불렀다. 알고 보니 ‘하모’라는 발음이 일본어로 갯장어였던 것. 그날부터 짓궂은 아이들과 선생들이 하모를 갯장어라 부르며 놀리기 시작하여 하모는 그 일본어 선생을 증오했고 일본어 수업은 끔찍한 시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쭈. 이 자식 봐라. 친해지자고 부른 건데 발끈하기는.”


선생 목소리에는 다시 짜증이 섞였다.


선생님, 친한 사이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과 누가 친해질까요? 하모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선생의 찌푸린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심장이 벌렁거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없이 하모를 바라보던 선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수업이나 하자. 반장, 네가 본문을 읽어라.”


하모가 교과서를 읽는 동안 교실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그의 자리까지 돌아온 선생이 하모의 책상 위에 놓인 영어사전을 집어 들었다. 긴장하여 머릿속이 새하얘진 하모는 선생이 가까이 다가오자 아예 입이 굳어 버렸다.

결국 하모가 한 문단도 채 읽지 못했을 때였다.


“그만!”


그가 소리를 지르더니 하모의 사전을 높이 쳐들고 아이들을 향해 휘리릭 페이지를 넘겨 보였다.


“이 녀석 사전을 봐라. 공부를 안 하니 이렇게 처음 산 것처럼 깨끗한 거다. 그러니 본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거고.”


선생이 두꺼운 사전으로 하모의 머리를 내리쳤다. 툭툭. 그리고 다시 툭툭.


“반장이면 모범을 보여야지. 공부 좀 해라. 이름 타령 그만하고, 응?”


그는 분이 안 풀렸는지 다시 하모의 머리를 툭툭 치며 토를 달았다.


“알았니? 이 자식아.”


하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이 사람은 왜 자기 멋대로 생각할까? 선생이면 학생을 우습게 여기고 상처를 줘도 상관이 없는 건가?’


그는 이를 악물고 맹세했다.


‘당신을 평생 저주할 거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


사전은 입학 선물로 받은 것이 너무 너덜거려 며칠 전 새로 산 것이었다. 억울했지만, 아이들 앞에서 제대로 읽지 못하고 더듬거린 것이 더 분했다. 선생에게 변명 한마디 못 한 자신이 더없이 한심스러웠다.


“선생님!”


한 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리 반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 반장입니다. 놀리고 창피를 주는데 누가 제대로 읽겠습니까. 선생님이 오늘 사전을 샀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전은 선생님이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깨끗한 겁니까?”


공산이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투에는 선생에 대한 반감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선생은 당황했다.


“너는 아침에 이상한 노래 부른...”


공산은 선생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들어서 기분이 좋아지고 불러주는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별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는 별명이 있습니다. 부르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상처를 받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겠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등교 시간부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생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에게 거짓말이나 하고 불러도 대답도 안 하는 놈이 지금 어디서 건방지게.”


선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공산 말이 맞습니다. 선생님을 닭대가리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이번에는 최강욱의 목소리였다. 굳었던 선생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동시에 아이들이 킥킥대기 시작했다. 기만이 웃은 이유를 모두가 눈치챈 것이다.


그의 얼굴은 누가 봐도 닭대가리였다. 머리통 위로 힘주어 올려 세운 그의 숱 많은 머리털이 마치 닭 볏을 흉내 낸 가발처럼 위아래로, 또 좌우로 덜렁거렸다. 얼굴 양쪽에 길게 드리워진 구레나룻조차 닭 볏과 비슷했다.

최강욱은 머뭇거리는 선생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선생님, 저희 모두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멋대로 부르는 별명 때문에 놀림당하기를 원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선생님도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다면서 왜 저희 생각은 안 하시죠?”


최강욱의 말투 또한 공산 못지않게 서늘했다. 아이들 모두 숨죽이며 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뭐? 멋대로? 다시 말해 봐. 안경잡이 넌 또 뭐야?”


최강욱이 일어섰다. 공산이 멋쩍게 자리에 앉으며 최강욱을 쏘아보았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제 이름은 안경잡이가 아니라 최강욱입니다. 닭대가리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떠시겠냐고 여쭈었습니다.”


그의 당당한 도발에 움찔한 선생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출석부를 더듬거렸다.


“네가 바로 최강욱이구나, 저놈은 그 유명한 공산이고.”


그는 최강욱과 공산을 차례로 쏘아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아이들을 우습게 본 일을 후회하는 것인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모를 얼굴이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움켜쥐고 있던 분필이 뚝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났다.


“반장, 아이들 자습시켜라.”


교실 밖으로 사라졌던 선생은 아이들의 우쭐대는 마음이 조바심 섞인 걱정으로 바뀔 무렵 돌아왔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좋다. 앞으로 교실에서 별명으로 너희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욕설도 마찬가지다. 다만.”


말을 멈춘 선생은 교실을 천천히 둘러본 후, 목에 힘을 주었다.


“선생의 외모를 비하하는 학생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학교가 불에 타서 선생이 죽는다고 노래하는 학생 또한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선생으로서 이 학교에 있는 한, 불량스러운 학생을 나는 용서하지 않을 거다. 너희 본분은 교사를 믿고 따르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임을 잊지 마라.”


선언이라도 하듯 비장하게 말하며 책을 펴드는 선생의 두 손이 떨렸다.


“그러면 수업 계속한다.”


교실은 조용했다. 안 선생의 탁한 음성만이 이따금 교실의 적막을 깼다.


“저기, 티처 안!”


수업이 끝날 즈음 기만이 손을 들었다.


“그래 뭐냐.”


안 선생의 목소리는 전처럼 부드럽지 않았지만, 기만은 개의치 않았다.


“있잖아요.”


아이들 모두 걱정의 눈빛으로 기만을 쳐다보았다. 쌀집 아들 엄기만은 착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불량 학생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태도가 삐딱하다고 지적하는 선생치고 제대로 된 선생이 없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보다 아이를 괴롭히는 선생이 더 무서웠다. 그들은 어른이고 하물며 선생이었다. 기만은 입이 거칠고 껄렁대면서 공부는 못했지만 아이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머리를 산적처럼 기르고 멋을 내고 다니던 녀석이 어느 날 머리를 빡빡 깎고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모두 시원하게 잘 깎았다고 칭찬했지만, 교련 선생인 방 일병만은 달랐다. 그는 선생에게 반항한다고 이유 없이 기만을 두들겨 팼다. 기만은 왜 머리를 깎았냐고 캐묻는 방 일병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가 길어지자, 견디지 못한 기만은 더워서 깎았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점심시간에 기만은 묻지도 않은 말을 아이들 앞에 늘어놓았다. 담배를 사는데 용돈이 부족했다고, 머리 깎을 돈을 아껴 담배를 사려고 머리를 밀었다고.


안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래, 할 말이 뭐지?”


“있잖아요. 아이들이 저를 용기만이라고 부르는데요. 용기는 있어서 할 말은 다 하지만 머리가 나빠서 대책이 없다고 저를 비웃는 거예요. 그런데요, 저는 아이들이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어요. 별명은 별명이고, 저는 저니까요. 선생님, 오늘 일로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친구들은 자기 생각을 말한 것뿐이에요.”


선생을 챙기는 기만의 어른스러운 말에 하모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네게 많이 배우는구나. 그러면 수업 마치자.”


“네? 아닌데요. 아직 더 남았어요.”


선생이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종이 울린 건 알지? 빨리 끝내야겠다. 화장실 다녀올 사람 다녀오고.”


아무도 꼼짝 하지 않았다. 모두가 두 눈을 반짝이며 기만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 네. 그러면 빨리 말할게요. 죄송한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안 선생이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는 얘기만 아니면 괜찮다.”


“저 있잖아요. 칠판에 글씨 쓰실 때 분필 좀 빡빡 긁지 않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목소리도 쇳소리 같아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분필까지 삑삑거리니 돌아버릴 거 같아서요.”


그제야 안 선생의 굳었던 얼굴에 잔물결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아이들도 웃으며 덩달아 합창했다.


“기만이 말이 맞아요.”


안 선생은 쥐고 있던 하얀 분필을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는 타고난 건데 어쩌겠니. 대신 판서는 잘 알겠다. 신경 쓰마.”


하모는 그가 사전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빈정거리던 사람이 맞을까 싶었다.


“그러면 선생님도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이번에는 안 선생이 더욱 밝아진 표정으로 기만을 바라보았다.


“네, 말씀만 하세요. 뭐든지 들어 드릴게요.”


“그래, 좋다. 수업 시간에 제발 다리 좀 떨지 말아 줄래?”


덜덜 떨던 기만의 다리가 바로 멈췄다.


“제가 그랬어요? 그래서 복 나간다고요?”


“복 나가는 건 모르겠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얘기하려던 걸 몇 번이나 까먹었으니까.”


기만이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이게 버릇이라. 노력은 해볼게요.”


“그래, 고맙다. 우린 서로 말이 통하는구나.”


안 선생이 하모와 공산과 최강욱을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하모를 보았다.


“조하모! 내가 지레짐작으로 말한 거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네 영어 실력은 확인된 게 없다. 네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가 다시 공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침에 말한 대로 너는 이발하고 검사받고. 다음 시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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