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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의 학교는 교문에서도 계단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야 비로소 운동장이 나왔다.
제법 넓은 운동장을 둘러싼 회백색 담장 안쪽으로는 키 작은 상수리나무와 어디선가 가져와 옮겨 심은 느티나무, 은행나무, 오동나무가 듬성듬성 심겨 있었다. 운동장의 맞은편에 산을 등지고 본관 건물이 있었고, 4층이 3학년 교실이었다.
본관 오른쪽으로 가면 산책로가 산으로 이어졌는데, 산책로가 시작되는 아담한 평지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야외 교실이 있었다. 등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그곳에는 테이블과 벤치가 마련되어 날씨가 좋을 때면 수업도 하고 점심시간에는 아이들이 모여 앉아 도시락을 까먹곤 했다.
등나무 교실을 지나 좀 더 산을 오르면 등산로와의 합류 지점에 거머리가 경고한 철탑이 있었다. 고압 전선을 걸쳐 놓은 송전탑이기 때문에 학교가 생길 때부터 교사와 학부모들이 옮겨달라고 전력 회사에 진정을 넣었지만, ‘곧 옮기겠다’라는 말만 하면서 수년을 흘려보냈다.
야자 시간이면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철탑 아래로 모여들어 멀리서 보면 정말 빨간 반딧불이가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작년에는 아이들이 몰려 있을 때 마침 야간 산행에 나섰던 등산객이 송전탑을 지나다 도깨비불을 보았다고 허겁지겁 산에서 내려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독고 선생이 전설의 고향 같은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며, 도깨비불은 무덤가에서 많이 피어오르는데 정작 푸른빛을 띤다고 바로잡아 준 적이 있었다.
현기증을 일으키던 자줏빛 라일락도, 숨 막히던 새하얀 아카시아도, 며칠 내린 늦봄 장맛비에 속절없이 꽃잎이 떨어졌다. 본관 앞 화단에는 붉은 덩굴장미가 해바라기 하며 겨루듯 피어나 곧 다가올 여름을 알렸다.
하모와 아이들이 야외 교실에 모여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수업 시간에는 보이지 않던 최강욱이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너희 여기 있었구나.”
하모가 오랜만에 나타난 그를 반겼다.
“강욱아, 이리 앉아. 같이 점심 먹자.”
하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산이 최강욱에게 쏘아붙였다.
“점심을 같이 먹으려면 학교부터 나와라. 학교가 놀이터냐? 심심할 때만 나오게.”
공산이 못마땅한 마음을 밉살스럽게 쏟아냈다.
물론 하모도 그가 멋대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공산처럼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오직 기만과 공산만이 오롯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들은 우회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그들의 말과 행동은 여지없이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되돌아왔건만, 그들 둘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가 육성회장인 공산은 학교 안에서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였다. 특히 교사들에게 그랬다. 건드리기는커녕 그 두 모자의 눈치 보기에 바빴다. 그러나 쌀집 아들 기만은 처지가 같을 수 없었다. 그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범접 불가의 존재는 못 되었다. 덤비고 맞기를 반복했다. 다만 최강욱이 등교한 날에는 손찌검이 없었다. 최강욱의 아버지에게 폭력 교사로 낙인찍히는 것을 선생들 모두가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는 체벌의 수준을 훨씬 넘어 있었다.
“그런데 하모야, 넌 한 여자랑 평생 살 수 있어?”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고 기만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되묻는 하모에게 기만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결혼하면 한 여자랑만 죽을 때까지 살기는 좀 지겹지 않겠냐?”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 헤어지고 다시 새 장가라도 가려고?”
하모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기만은 어디서 누구에게 듣고 오는지, 난생처음 듣는 별별 희한한 이야기들로 친구들을 웃겼다.
“그렇다는 거지 뭐. 우리 엄마랑 아빠는 툭하면 싸우면서 이혼하자고 난리 치거든. 그러면서 사는 게 웃기잖아. 둘이 헤어지는 거는 싫지만.”
“우리 집도 똑같아. 나만 없었어도 벌써 헤어졌대.”
하모가 기만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데 공산이 다시 끼어들었다.
“결혼부터 해야지. 기만이는 좋은 색시한테 장가가기는 다 글렀네.”
“내가 왜?”
공산의 말에 기만이 발끈했다.
“대학도 못 간 녀석이랑 누가 결혼하겠어? 요즘 여자들 눈이 얼마나 높은데.”
하모가 기만의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야. 요즘 기만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데. 특히 영어는 너보다 훨씬 잘할 거다. 그리고 안 선생도 그랬잖아. 대학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 가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고 싶은 애들이 가는 거라고. 결혼도 그래. 서로가 좋으면 하는 거지. 겉만 보고 결혼할래?”
여느 때 같으면 공산의 멱살을 잡았을 기만이 뜻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녀석은 조용히 도시락 뚜껑을 덮더니 일어서는 것이었다.
“기만아, 산이가 장난으로 그런 거잖아. 밥 먹어.”
하모가 기만을 붙잡는 것을 보고, 공산이 바로 사과했다.
“야, 농담한 거 가지고 삐치기는. 미안해.”
“농담하고 빈정대는 거 정도는 나도 구분할 줄 알아. 내가 그렇게 우습냐?”
기만은 공산을 쏘아보며 하모의 손을 뿌리쳤다.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기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 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하모는 입안을 구르는 밥알이 마치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말을 꺼냈다.
“있잖아, 담임이 방학 전에 자기 집에 한 번 오라는 거 있지.”
“거머리가? 자기 집에는 왜?”
공산이 가물가물 멀어지는 기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도 모르지. 방학 때 좀 할 게 있다고 하더라.”
하모의 무심한 대답에 공산은 수상쩍어하며 캐물었다.
“학교에서 말하면 되지. 왜 자기 집까지 오래?”
“그러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하모의 곁에 앉은 최강욱이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다.
“담임 집에는 가본 적 있어?”
“아니, 없지.”
“난 가봤거든. 집이 엄청 좋더라고. 우리 아버지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야.”
“아빠도 같이 갔어?”
최강욱은 안경을 고쳐 썼다.
“재택 수업 때문에 상의하러 아버지와 같이 갔었지. 하여튼 아버지보다 더 놀란 건 담임이었어. 아버지가 자기 집으로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이야기하는 내내 쩔쩔매더라.”
“돈만 밝히는 썩어빠진 교사와 부패 검사의 만남이라, 그거 볼만했겠네.”
공산의 말에 최강욱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공산, 말을 가려서 해. 너처럼 세상이 전부 엉터리인 줄 알아? 우리 아버지가 왜 부패 검사야?”
“멀쩡한 아들을 환자로 만들어 학교에도 안 보내니 그게 부패 검사 아니야? 또 거머리 집에는 빈손으로 갔겠어? 안 봐도 뻔하다. 참 끼리끼리 잘들 노네. 그러잖아도 애들 내신 갖고 돈벌이한다는 소문이 육성회에서 자자하다고 하더라. 우리 엄마가 그걸로 거머리한테 경고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네 아빠한테 똑똑히 전해.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지 않고 돈벌이하는 선생들부터 감방에 처넣으라고.”
최강욱은 공산의 트집에 넘어가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서며 엉덩이를 털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야말로 육성회장 어머니 뒤에 숨어서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고 다니는 주제에. 모든 걸 삐딱하게 보지 마. 너만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최강욱의 말에도 공산은 끝까지 사나운 말을 쏟아냈다.
“학교에 나오지도 않는 놈이 뭘 안다고 떠들어? 제발 너나 똑바로 살아.”
“똑바로 살라고? 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 줄 말인 거 같은데? 네가 착각하는 거 같아서 한마디 해 준다. 영어 시간에 내가 나선 건 널 위해서가 아니야. 안 선생이 너 같은 쫄보의 유치한 장난에 말려드는 게 싫어서였지.”
“뭐? 쫄보?”
공산이 숟가락을 내던지고 일어섰지만, 최강욱은 물러서지 않았다.
“왜? 애들부터 선생들까지 우쭈쭈 해주니까 하늘을 나는 거 같지?”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주제를 알고 적당히 하라고 조언해 주는 거다.”
“뭐? 뭘 적당히 해?”
“넌 학교가 우습지? 학교에 놀러 나오는 건 내가 아닌 거 같은데?”
“뭐라고? 이게 정말 돌았나?”
“공부하는 순진한 애들한테 바람 넣지 마.”
“너 다시 말해봐.”
“착한 선생들 괴롭히지도 말고.”
“너 정말 말 다 했어?”
“그래. 너같이 멍청한 놈도 알아들을 만큼은 말한 거 같네. 하모야, 먼저 간다.”
그는 하모를 보며 씩 웃고는 돌아서서 교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산이 씩씩거리며 악을 썼지만, 최강욱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