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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딧불이

15

by 판도

여름 방학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자습 시간에 느닷없이 들어온 방 일병 때문에 엎드려 있던 아이들이 구시렁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 선생님이 왜 들어왔는지 너희도 잘 알겠지?”

그는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말하는 내내 이죽거렸다.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데 그게 너희와 상관이 있을까? 없을까?”


“네, 있어요.”


기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뒤떨어진 학업을 보충할 기회입니다.”

그가 기만의 대답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척을 했다.

“오! 바로 그거다. 이 반에서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답을 듣는구나. 그런데 너는 대학을 포기한 놈 아니냐?”

“네, 저는 포기했습니다.”


“그럼 너는 방학에 뭘 할 거냐?”


“열심히 놀아야죠. 졸업하면 바로 군대 갈 건데.”

방 일병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그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다른 말 안 하겠다. 학생의 본분을 절대 잊지 마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지만, 방 일병은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나의 행동이 학교에 피해가 가지는 않을지 조심하고, 알았지?”


아이들의 대답 대신 공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뭐야?”


그가 화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낙서 사건 이후 그는 공산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물론 아이들도 그를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서 손을 들었는데 왜 모른 척하십니까?”


“내가? 내가 왜 모른 척을 해? 그래, 뭐냐?”


공산은 그에게 꽂은 시선을 풀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학생의 본분이라는 것이 뭡니까?”


따지듯 묻는 그의 말투에 방 일병의 말투도 따라서 험악해졌다.

“교련 시간에 내가 수도 없이 말하지 않았나?”


“그게 잘 기억나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너희가 맨날 나한테 두들겨 맞는 거다. 알았냐? 네놈처럼 선생님에게 주먹질하지 않고, 건방 떨지 않는 것이 올바른 학생의 본분이다.”


“아, 그래요? 학력고사가 끝나고 졸업하면 학생 본분은 필요 없겠네요?”

“그렇지. 그때 너 같은 놈은 대학도 못 가고 날건달이 되어 있겠지. 그런 놈들이 저놈처럼 군대나 가는 거고.”

기만을 가리키며 말하는 그의 벌어진 입 사이로 하얀 이가 보였다. 공산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선생의 본분은 뭡니까?”


“뭐? 선생? 이 빨갱이 새끼가. 선생님의 본분은 네놈들을 잘 가르치고,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거다.”


“그래서 동료 교사를 모욕하고 교생 여선생들 데리고 성인 나이트에 가신 건가요? 어린 대학생들 꼬셔서 술 먹이고, 싫다는데 억지로 껴안고 춤추는 것이 선생 본분에 맞는 것인가요?”


공산이 꼬투리를 잡았지만 방 일병은 잠시 머뭇거렸을 뿐, 안 선생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다면 처음부터 그림 낙서 따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잘못에 대한 뉘우침도 없었다.


“그래서, 너처럼 선생이나 패는 놈이 감히 스승의 방과 후 사생활까지 참견하겠다는 말이지?”


방 일병은 히죽거리더니 재킷과 넥타이를 벗어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양팔의 셔츠 단추를 풀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진짜 군인처럼 명령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교실 앞뒷문을 닫는다. 창문도 닫고 커튼을 내린다, 실시!”


겁에 질린 아이들의 원망 가득 찬 눈초리가 일제히 공산을 향했다.

“좋다. 이제 모두 의자 위에 올라가서 뒷짐을 지고 책상에 대가리를 박는다, 실시!”

아이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의자 위로 올라갔다. 방 일병이 괴물처럼 씨익 웃었다.

“오냐오냐하니까 애들이 겁이 없어요. 잘 됐다. 한 달이나 쉬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뭐야? 너 지금 껌까지 씹고 있는 거야? 넌 오늘 죽었어. 선생이나 두들겨 패는 빨갱이 새끼. 너 때문에 내가 개망신을 당하고 정직까지 먹었어. 넌 앞으로 나와 새끼야.”


교단 앞으로 나온 공산의 얼굴을 향해 방 일병의 해탈봉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공산은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권투 선수처럼 두 팔을 올려 몽둥이질을 막아냈다.


“햐아, 이 새끼 봐라. 권투를 배웠다고 했지?”


방 일병은 해탈봉을 내던지고 순식간에 공산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어디, 계속 피해 봐라. 이 빨갱이 괴뢰 새끼.”


방 일병은 오른손으로 사정없이 공산의 뺨을 갈겼다. 한 대, 또 한 대, 그리고 다시 한 대가 날아들었다.

“옛말에 군사부일체라고 했어. 스승은 임금과 아버지와 동급이라는 거야. 알아? 이 새끼야. 네가 감히 스승을 엿 먹이려 들어?”


공산은 말없이 고개를 쳐들고 피식 웃었다.


“웃어? 이 새끼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그래, 갈 데까지 가보자.”


다시 방 일병이 세차게 공산의 뺨을 갈겼다. 교탁에 부딪혀 휘청거리는 그를 향해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방 일병이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쳐들었다. 교실 구석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개새끼!”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졌다. 여기저기에서 욕설이 이어지며 교실에 가득 차 있던 공포가 서서히 분노로 바뀌어 갔다.


“정말 이 새끼들이 돌았나? 지금 욕한 새끼도 나와.”

방 일병이 악을 쓰며 해탈봉으로 교탁을 거칠게 두드리는데 누군가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그만! 제발 그만하세요.”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최강욱이었다. 모처럼 학교에 나온 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놀란 방 일병이 동작을 멈췄다.


“산이가 잘못 말한 것이 있나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때리세요?”


방 일병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욕을 하고 친구들을 때리면 아버지에게 전부 이야기할 겁니다. 공부하게 그만 나가세요.”

그는 당황하여 변명을 늘어놓았다.


“강욱아, 어쩜 선생님의 마음을 그렇게 몰라 주니? 다 너희 잘되라고 하는 건데.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내가 좋게 말하면 저놈들이 들을 거 같니? 오죽하면 내가 이러겠어. 분명히 네 아버님도 내 심정을 다 이해하실 거다. 너도 선생님의 노고를 생각하면.”


“그만하시라니까요. 선생님 지금 껌 씹고 계시죠? 선생님은 저희와 뭐가 그렇게 다른가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세요?”


최강욱의 말처럼 방 일병은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었다. 다시 뒤에서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맞아.”


“빨갱이 새끼.”


“강욱아, 아빠 불러.”


쏟아지는 아이들의 원성에 방 일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재킷과 넥타이를 챙겨 허둥지둥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함성을 질렀다.


“최강욱 만세!”


다만 한 아이만이 교탁 옆에 서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최강욱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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