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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딧불이

14

by 판도

어느새 안 선생과 공산은 앙숙이 되어버렸다. 서로가 상대의 입에 공기주입펌프를 꽂고 미친 듯이 바람을 넣고 있었다. 누군가가 먼저 터져야 끝나는 게임이었지만 어리숙한 안 선생이 상대하기에 공산은 너무나 영악한 아이였다.


새날이 밝았다. 세상의 심기가 불편한 날이었다. 검은 구름은 환한 태양을 삼켜버렸고 바람은 사나워 운동장에 일으킨 흙먼지로 노는 아이들을 내쫓았다. 아침부터 정전이 된 교실에서 하모의 담임은 전기를 빼돌린 누군가를 저주했으며, 해탈봉을 손에 쥔 방 일병은 오늘의 제물을 찾아 학교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곧 일어날 그 사소한 사건을 걱정하듯 교정을 둘러싼 것 하나부터 열까지가 여느 때와 달랐다.

1반의 영어 수업 시간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아이들 모두가 숨죽여 교실 앞문을 주시했다. 공산이 책상 위에 노트를 올려놓고 무언가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고 있을 때,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드디어 안 선생이 교실로 들어섰다. 수업 종도 울리기 전이었다.


안 선생은 공산부터 찾았다.


“공산! 숙제 가지고 나와.”


공산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노트를 들고 안 선생에게로 갔다. 그가 자리로 돌아와서 하모를 바라보며 윙크하는 바로 그때였다.


“이게 정말!”


안 선생이 공산의 노트를 교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걸 기만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주워 들었다.


“공산! 너 이 자식, 이리 나와!”


그는 주먹을 쥐고 공산의 얼굴을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야, 거기. 대걸레 가져와. 빨리.”


안 선생이 기만과 공산을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이건 폭력이 아니다. 선생을 능욕한 죄에 대한 정당한 체벌이지. 엎드려.”


공산이 씩 웃으며 칠판에 두 손을 얹고 비스듬히 섰다. 선생의 대걸레 자루가 공산의 교복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안 선생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설 때마다 공산의 엉덩이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는 대걸레 자루를 내려치며 실성한 사람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선생을 가지고 노는 나쁜 새끼!”


“머리를 자르라고 했는데 자르지도 않고.”


“수업 분위기만 망치는 이기적인 새끼.”


선생의 성난 팔이 몇 번이나 허공을 갈랐을까. 공산이 돌연 몸을 일으켜 안 선생의 대걸레 자루를 낚아챘다.

“그만하시죠.”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그만해?”


“선생님은 이미 이성을 잃으셨습니다.”


“이성을 잃었다고? 그럼 너는 제정신으로 나를 괴롭혔니? 그래 한번 붙어보자. 내가 태권도가 몇 단인 줄 알아?”


흥분한 안 선생을 피해 공산이 달아날 것이라는 하모의 짐작은 착각일 뿐이었다. 공산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잔혹극을 블랙 코미디로 바꾸어 버렸다.

“저는 권투를 배웠거든요, 권투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산의 쭉 뻗은 주먹이 닭대가리의 콧날을 향해 날아갔다.


“어이쿠.”


소리와 함께 그의 코에서 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자식이 치사하게 말도 없이 선빵을 날려?”


그는 공산에게 달려들었다. 둘은 한 덩어리로 엉켜 손과 발을 마구 내뻗었다. 태권도 대련도, 권투 시합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난장판에 아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교실 앞문 쪽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들 해요.”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 어느새 해탈이 들어와 서 있었다. 뒤엉켰던 두 사람이 손을 풀고 해탈을 바라봤다.

“산이 너는 어머니가 그렇게 걱정하시는데 도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릴 거냐? 네 자리로 가라.”


교장은 교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반 반장이 누구지?”


하모가 손을 들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래, 너는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교장실로 오너라. 안 선생도 내 방으로 와요. 얼굴부터 씻고.”


해탈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모는 담임에게 달려가서 마구잡이 난투극의 경위를 보고했다. 선생과 학생이 싸움질까지 하다 교장 선생님에게 걸렸으니 정말 큰일이라며 성질을 부리는 그를 남겨 두고 하모는 해탈방으로 향했다. 입학하고 3년이 다 되어 가지만 하모가 그 방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방은 어두웠다. 책상 위에 탁상용 전등 하나만이 달랑 켜져 있었고, 교장은 진보랏빛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촛불 하나 켜 놓은 동굴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둥근 갓 속의 전구만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서 있지 말고 앉거라.”


교장이 자상한 목소리로 책상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탁자 위에 노트가 있지? 거기다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적으렴. 물론 영어 선생님과 공산이 녀석 사이에서 있었던 일 말이다. 살다 살다 내가 별일을 다 겪는구나. 학생이 선생을 때리다니.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똑똑 노크 소리에 하모가 일어섰다.


“됐다. 넌 어서 써라.”


그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들어와.”


안 선생이었다. 부어오른 콧잔등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교장이 엉거주춤 서 있는 안 선생에게 다가가는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해탈봉이 하모의 눈에 들어왔다.


“엎드려.”


“네?”


“엎드리라고 새끼야. 너 같은 병신 새끼는 뒈져야 해.”


해탈은 당혹감에 머뭇거리는 안 선생의 정강이를 구두 앞 코로 냅다 걷어찼다. 으악! 하며 안 선생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무심코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하모마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개를 돌려 탁자 위의 노트에 눈을 맞추려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볼펜을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목이 뻣뻣해졌다.

안 선생이 고통에 겨워 낮게 신음을 흘렸지만, 해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몇 번이고 그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스승의 위신이 서지 않고 망나니 같은 애들이 학교에서 날뛰는 거야. 똑바로 서.”

이번엔 엎드리라는 말이 아니었다.


“네? 네. 사, 삼촌.”


안 선생이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 하모는 안 선생이 해탈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 삼촌? 여기가 어디라고 이 새끼가 정신 못 차리고. 교장 선생님이라고 불러, 이 새끼야.”


이번에는 해탈봉이 안 선생의 머리통을 갈겼다. 빡 소리가 났다.


“악!”


안 선생의 비명이 하모의 두 귀를 파고들었다. 해탈은 안 선생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해탈봉을 휘두르며 악을 썼다. 하모는 악마의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너, 이 새끼. 학교발전기금 얼마 냈어? 불쌍해서 받아줬더니 코흘리개한테 두들겨 맞고 다녀? 스승이라면 그림자도 밟히면 안 되는 거야, 새끼야.”


하모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거듭 해탈봉이 만드는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 으악.”


“네 아버지도 한심하다. 도대체 자식을 어떻게 키운 거야.”


“삼촌, 아니 교장 선생님.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머리를 감싸 쥐고 쓰러진 안 선생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모가 두 귀를 손으로 막고 웅크리고 있는데 갑자기 해탈이 하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장아, 너는 그만 나가봐도 된다. 교실에 가서 써오너라.”


그는 태연스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하모에게 말했지만, 안 선생을 향했던 검고 어두운 빛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의 두 눈에 남아 있는 것을 하모는 똑똑히 보았다. 하모의 온몸에 소름이 바늘처럼 돋았다. 불쌍한 안 선생을 남겨 놓고 그는 정신없이 해탈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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