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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딧불이

12

by 판도


아이들이 교문에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교정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니 비로소 한 떼의 사람들이 하모의 시야에 들어왔다. 운동장 담장 아래에 교장이 보였고, 교감과 거머리와 방 일병까지 일찍 출근한 선생들은 모두 모여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 틈에 숨듯이 쪼그리고 앉아 소리 죽여 흐느끼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 최고의 미녀 선생 뽀미였다.


운동장을 향한 교실 창문에는 아이들이 매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하모에게 손을 흔들어 대는 녀석도 있었다.


뽀미가 울고 있는 담벼락에는 어제까지 교문 입구에 있던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이 왜 저기에 걸려 있지? 뽀미는 아침부터 왜 울고?’


하모는 몇 번이나 담장을 돌아보면서 교실로 향했다. 그가 교실에 들어서자, 창가에 몰려 있던 아이 몇이 잽싸게 달려왔다. 공산과 엄기만도 있었다.


기만은 하모에게 다가서는 공산의 앞을 막아서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봤어?”


“응?”


“저기 담벼락”


“현수막?”


“바보야. 담벼락에 쓰여 있는 거.”


하모에게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는 기만은 신이 나 있었다.


“담벼락에 뭐가 있어?”


기만은 아이들을 둘러보며 입술에 왼손 검지를 갖다 대고는 재빨리 메모지 한 장을 가져왔다. 그가 연필로 종이에 뭔가를 적으려는 순간 뒤에 있던 공산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뽀미는 갈보다!”


“갈보? 그게 뭔데?”


기만은 답답해하며 하모에게 꿀밤을 먹였다.


“이 순진한 녀석아. 몸 파는 여자 말이야. 창녀는 아니?”


하모는 그제야 뽀미가 서럽게 우는 이유를 깨달았다.


“작품도 하나 그려져 있어.”


이번에는 공산이 신이 나서 나섰다.


“작품? 무슨 작품?”


하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공산에게 묻자, 기만이 대답했다.


“뽀미 나체.”


“뭐? 뽀미 나체…? 대체 그걸 누가? 왜?”


하모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수상쩍어했다.


“난 아냐.”


기만이 서둘러 발뺌했지만, 공산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너 혹시 연애편지 답장 못 받았다고 복수한 거 아냐?”


“뭐? 내가 그렇게 치사한 놈인 줄 알아? 엄마 걸고 난 아니다.”


기만은 실실 웃으며 약을 올리는 공산에게 버럭 화를 냈다.


“나도 아냐.”


옆에 서 있던 아이까지 덩달아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 모두 자연스레 공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깔깔대던 공산은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당황하여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하며 말했다.


“나도 아냐. 난 내가 한 일은 했다고 말한다고.”


“그럼 누굴까?”


아이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기만이 나섰다.


“뽀미랑 잔 놈이 그렸겠지. 본 대로 그린 거 아냐?”


“뽀미랑 잔 놈이 하나면 바로 들통이 나겠지. 문제는 그게 한둘이 아니니까.”


공산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며 말을 이었다.


“한 번 세어 볼까? 우선 뽀미가 수업이 시작되었는데도 해탈방에 들어가서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아서 하모가 가서 문을 두드리려다가 보니 거기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고 했고. 또 윤리랑 야자 시간에 산에서 내려오는 걸 봤다는 아이도 있어. 미술실에 방 일병이랑 둘이 들어가는 걸 본 사람도 있었고. 참, 하모 너랑도 소문이 났었잖아?”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퍼 나르며 떠들어대는 공산에게 하모가 핀잔을 주었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


“뭐가?”


아이들이 물었다.


“뒤쪽 화장실 담도 아니고 운동장 바로 옆 담벼락에 낙서를 했는데 할배가 그걸 몰랐을까?”


할배는 경비 아저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하모의 눈을 쳐다보고 또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이 기만이 타박했다.


“이 바보들아. 할배가 밤을 꼬박 새울 거 같아? 술 마시고 퍼져 잔 거지. 그러니 바로 옆에서 무슨 짓을 해도 몰랐던 거고.”


“아. 그러네. 그럼 숙직 선생은?”


옆의 아이가 물었다.


“너도 참! 할배랑 같이 술 처먹었지.”


기만이 다시 한심하다는 듯 면박을 줬다.


“아니 그걸 그냥 둬?”


공산이 가슴을 치며 설명했다.


“정말 답답하네. 할배는 해탈이 친척 아저씨라더라. 그 자리도 빽 없으면 못 앉는 자리야. 그리고 숙직? 그냥 조용히 술만 마시면 양반이지. 옛날에는 야자 선생들이랑 숙직실에서 고스톱 치고 난리도 아니었대. 그 얘기가 학부모들 귀에 들어가서 없어진 거지. 술 마시는 거는 해탈이 알면서 모른 척해주는 거야. 선생들이 해탈이한테 갖다 바치는 게 얼만데. 그냥 넘어가는 거지.”


공산의 말에 기만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여선생들도 숙직을 서야 공평한 거 아니야? 왜 남자들만 숙직을 서는 거지?”


기만의 불평에 공산이 나섰다.


“야, 공평이 뭔지나 알고 말해. 남녀 간의 공평함이란 여자와 남자의 신체적인 차이를 구별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거야. 가령 겨울에 무거운 조개탄을 옮기는 거는 여자보다 남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이야. 여자가 무거운 거를 남자보다 잘 들 수는 없잖아. 그런데 공평 어쩌고 하면서 육체적으로 힘이 드는 일을 남녀 구분 없이 시키면 그것 자체가 불공평한 거라고. 만약에 거머리나 방 일병이 양호 선생이라고 상상해 봐. 그 늑대들이 양호실에 앉아 있는데 여자애들이 양호실에 갈 수 있겠어?”


“그건 좀 비유가 이상하다. 우린 남자 학교이고.”


“그래 방금 비유는 이상했지만, 남녀평등은 조심스러운 거야.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평등을 말해야지. 장점은 발휘하고 약점은 커버해 주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게 가장 좋을 거야.”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뽀미는 기만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평소에 미운털이 박혀 있던 기만은 미칠 지경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혼자 뒤집어쓸 처지였다. 선생들은 모두 아이들이 한 짓으로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 중에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절대 없다는 교감의 단언에 아이들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선생들은 한결같이 고매한 인격자이고, 학생들은 모두가 미숙하고 덜떨어진 존재뿐이라니.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기만을 살려준 것이 바로 공산이었다.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시각에 제일 먼저 등교하여 낙서를 발견한 것이 공산과 기만이었기 때문에, 꼰대들은 그들이 공범이 아닐까 의심했다. 공산과 기만이 숙직실로 달려갔을 때, 할배와 당직 교사인 방 일병은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었다. 그들이 술을 마신 것은 당연히 교칙 위반이었지만 범인의 혐의는 벗을 수 있었다. 누군가 몰래 낙서를 하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면 정황상 범인은 공산과 기만이었다.


모두가 두 녀석의 장난질이라는 만만한 추측으로 사건을 몰아갈 때, 공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외부인의 소행이 아니라면 범인은 학교에 남은 할배와 방 대위 두 사람 중의 하나.


공산은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언젠가 그 그림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자고 있던 방 일병과 할배를 깨워 낙서 신고를 하고, 곧 출근한 뽀미가 그것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며 범인으로 기만을 지목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공산은 그림의 기억을 집요하게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공산은 기만과 함께 교무실로 끌려왔다. 같이 있던 하모까지 얼떨결에 그들을 따라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방 일병은 아직 술이 덜 깬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교무실에 들어온 지 5분이 채 지났을까. 공산이 무릎을 치며 아이들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였다.


“생각났어!”


기만과 하모가 동시에 공산을 쳐다보았다.


“쉿!”


공산은 두 아이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한 후 살금살금 방 일병에게 다가갔다. 공산은 다짜고짜 그를 밀치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공산의 돌발 행동에 책상 옆으로 나동그라진 방 일병이 멀뚱멀뚱 공산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방 일병 붙잡아. 빨리!”


하모는 달려가서 방 일병을 잡았다. 기만도 합세했다. 그가 발버둥을 쳤지만, 아이 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이 새끼들, 안 놔? 너희들 죽으려고 환장했어?”


공산은 하모와 기만에게 그를 맡기고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손거울이며 면도기, 손톱깎이, 귀이개 따위의 잡동사니만 가득했다.


“아악!”


기를 쓰던 방 일병이 하모의 팔뚝을 물었던 것이다. 하모의 입에서는 평소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야, 이 새끼가.”


하모는 머리로 그의 눈두덩을 들이받았다.


“어쿠!”


방 대위가 비명을 질렀다.


“산아, 빨리.”


공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옆 삼 단 서랍장의 맨 위 서랍을 열었다. 인주며, 스탬프며, 볼펜 따위만 가득했다. 다음 서랍에는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해탈봉이 혼자 덜렁 누워 있었다. 바로 서랍을 닫고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낯익은 책이 보였다. 교련 교과서였다. 교과서를 집어던지자 이번에는 군사학 개론이, 다시 그 책을 끄집어내던 공산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이 새끼가 정말.”


기만과 하모는 미간이 깨져 정신이 나간 방 대위를 두 손으로 붙든 채 고개를 내밀어 책상 서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음란 서적들이 가득했다.


“정말 웃긴다. 뭐? 빼앗은 책들은 모두 소각장에서 태웠다고? 여기 다 숨겨 놨잖아.”


방 일병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빨갱이 새끼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정말 다 죽었어.”


아이들은 더욱 단단히 그를 붙잡았다. 그 순간 공산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찾았다!”


공산의 기억 속 노트는 그 양서 더미 가장 밑에 숨기듯 놓여 있었다. 공산은 그림부터 확인했다. 바로 그 그림이었다. 공산은 노트로 방 일병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이 빨갱이보다 못한 새끼!”


아이들은 낙서 사건의 증거물인 방 일병의 노트를 교감에게 넘기고 교실을 나왔다. 우쭐한 공산이 “얼굴 못 들고 다닐까 봐 덮어 준 내 잘못이지.”라며 아이들에게 지난 교련 시간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작년이었다. 교련 수업이 있던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야외 수업은 실내 수업으로 바뀌었고, 자습으로 진행되었던 수업 시간에 방 일병은 교탁 앞에 서서 노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또 쓴 것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공산이 그런 그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공산은 그가 대체 뭔 짓을 하길래 저토록 깊이 생각에 빠져 행복해하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때마침 교감의 호출에 그가 교무실로 불려 간 사이 공산은 잽싸게 교단에 올랐다. 교탁 위에는 교련 교재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공산은 교실 밖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노트의 첫 페이지부터 차례대로 넘겼지만, 진도에 맞춘 교안만이 적혀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공산은 노트를 뒤집어 마지막 페이지부터 거꾸로 펼쳐 나갔다. 곧 공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는 유치원생이나 그릴 법한 유치한 그림과 낙서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하나씩 그려져 있었던 것. 그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뽀미였다. 아니 뽀미를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어린아이가 그렸을 법한 그림이었다. 다만 그가 쓴 글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콧대 높은 뽀글이.’


‘얄미운 뽀글이.’


그리고 유치 찬란한 그림과 함께 쓰여 있는 문장 하나.


‘뽀미는 갈보다!’


뽀미는 공산과 기만에게 사과했다. 방 일병은 정직 3개월의 중징계 처분을 받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한 달 후부터 태연히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누명을 벗었어도 대체 누가 잘못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모든 것이 엉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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