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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시험이 끝났다. 홀가분할 줄만 알았던 하모의 기분은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친구들의 얼굴에는 모처럼 생기가 넘쳤다.
“모두 수고했다. 너희 인생이 이번 여름 방학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는 정신력 싸움이다. 막판에 쓸데없는 짓거리 해서 고꾸라지지 마라. 머리 좀 컸다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거들먹거리지도 말고. 여자 친구 만난다고 시간을 낭비해서도 안 된다. 대학에 가서 마음껏 하면 된다. 알았나?”
담임은 일장 연설을 마치고 교실을 둘러보았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떨구고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 엄기만.”
담임은 맨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는 기만을 불렀다. 옆자리 아이가 기만을 흔들어 깨웠다.
“시험은 잘 봤냐?”
“네, 아주 잘 봤습니다.”
기만이 눈을 비비며 태연히 대답했다.
“어쭈. 신통한 일이네. 이번엔 시험공부 좀 했나 보지?”
“공부는 평소에 꾸준히 하는 거잖아요. 선생님이 말한 거 같은데요?”
“이놈 봐라. 그래서 네가 평소에 공부했니?”
“왜 공부를 안 했다고 넘겨짚으세요? 시험 성적이 나쁘면 공부를 안 한 건가요? 저보다 시험 점수가 높은 친구들만 평소에 공부한 건가요? 시험 망친 아이들 한 번이라도 챙겨 주셨어요?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아이들 걱정한 적 있으세요? 항상 스카이 타령만 하셨잖아요.”
흥분한 기만이 벼르고 기다렸던 사람처럼 거머리에게 대들었다. 당황한 담임이 해탈봉으로 교단을 내리치며 말했다.
“이 자식이 어디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너는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네 아버지한테 말해 둘 테니까 기술 학원이나 다녀. 꼴통 새끼, 제 부모 걱정해서 봐주니까 똥오줌을 못 가리네.”
거머리는 씩씩거리며 멋대로 기만의 진로를 정해 버렸다.
“아무튼 시험이 끝났으니까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부터 다시 달리는 거다. 그럼 종례 마친다. 반장하고 산이는 바로 교무실로 와서 선생님 시험 채점 좀 도와주고. 참, 강욱이는?”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나갔습니다.”
“인사라도 하고 가지. 제 아비만 믿고 건방을 떨기는.”
담임은 구시렁대며 교실을 나갔다.
하모와 공산이 교무실에서 채점에 정신이 없는데 등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 선생이었다.
“시험은 잘 봤니?”
그가 반갑게 말을 걸었지만, 공산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대충 봤어요.”
“공산아.”
“왜요?”
해맑은 안 선생과는 달리 공산의 목소리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선생은 더욱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아직도 기분 안 풀렸어?”
“뭐가요?”
“그거 말이야. 강욱이가 장난친 걸 넌 줄 알고 화를 냈잖아.”
“아, 그거요? 당연하죠. 선생님은 항상 멋대로 생각하시잖아요.”
“여태 그걸 담아두고. 사내자식이 정말.”
“그걸 지금까지 말하고 계시는 선생님이 더한 거 아닌가요? 선생님은 아직도 사과를 안 했잖아요.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됐다, 됐어. 그만두자.”
교무실을 나오며 공산이 하모의 어깨를 치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쪽지 한 장을 꺼냈다.
“첫 수업부터 잘난 척만 하더니, 겁쟁이 자식. 꼬리를 내리니까 재미가 없네. 참, 이거.”
“이게 뭔데?”
“너 저번에 말했잖아. 산울림의 독백 노래 좋다고. 집에 레코드판이 있는데 안에 가사집이 들어 있더라. 이거 적느라 손에서 쥐가 다 났어.”
공산이 건네준 쪽지에는 3절까지 이어지는 독백의 긴 가사가 적혀 있었다.
“이걸 손으로 다 적었어?”
“그럼 어떡해. 귀공자님이 좋아한다는데.”
“고마워. 그런데 이제 그만해.”
“응?”
“안 선생한테 말이야. 쓸데없는 짓 그만 좀 해.”
안 선생 이야기가 나오자, 공산이 돌변했다.
“뭐? 네가 뭘 안다고 남의 일에 참견이야?”
“강욱이도 말했잖아. 정도껏 하라고.”
“야, 조하모! 넌 언제부터 최강욱 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
“그게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고 넌 닭대가리한테 그렇게 당하고 분하지도 않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이제 그만해.”
“악! 악악!”
공산은 갑자기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더니 말을 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그만할게. 아까 교무실에서 봤지? 친해지자고 말투까지 바꾸더라.”
“잘 생각했어. 나도 분하고 억울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
“그래, 좋다. 울 귀공자님이 원한다면야, 내가 참는다. 가자.”
공산은 손을 탁탁 털며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