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사고 싶은 책이 생겼다.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과 사지가 분해된 유해로 가득한 구덩이, 청동솥과 그 안에 담긴 두개골의 정체를 철저한 학술적 고증을 통해 밝히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게 된 배경에는 '주지육림'으로 대표되는 지배계층의 향락 때문이 아니라, 시체를 버리는 구덩이가 생길 정도로 만연했던 희생제사에 대한 반발이 있었음을 흥미롭게 풀어낸 역사책이다.
가격 38,700원
쪽수 936쪽
크기 161 * 225 * 70mm / 1516g
까짓 거, 시원하게 구매 버튼을 누르기엔 가격과 분량이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중고로 보자니 아직 매물이 없는 신간이고, 이북은 수록된 사진자료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까봐 꺼려졌다. 사, 아님 말어? 갈팡질팡하다가 책꽂이에서 썩히고 있는 책을 팔아서 새 책을 사는데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호스, 민법강의 22판, 고슴도치의 고민,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트레인스포팅, 2019년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 젊은 남자...... 먼지 묻은 책이 종아리 중간쯤까지 쌓였다. 이 정도면 중고서점까지 짊어지고 갈 때 고생은 하겠지만, 새 책을 사고도 돈이 남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한 권 한 권 바코드를 찍어가며 매입가격을 확인했다.
팔아 치우려고 했던 책의 태반이 매입 불가 품목이었다. 팔 수 있는 책에는 고작 몇 백 원 내지는 천몇 백 원의 가격이 매겨졌다. 7만 원 주고 산 책이 7천 원으로 전락했다. 팔 수 있는 책은 모두 합쳐 만 삼천 원의 가치가 있었다. 서점에서 집으로 오가는 버스비를 빼면 수중에 만원이 떨어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새 책을 사야 할지는 더 이상 고민이 아니게 됐다. 몇 년을 먼지 맞힌 헌책들의 거취가 문제였다. 하이고, 고민할 것도 없지. 본전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지만, 책을 먼지 받이로 두느니 새 주인을 찾아 주고 만원이라도 건지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 일이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이걸 어떻게 고작 만원을 받고 팔아? 식식대며 널부러진 책들을 펼쳐봤다. 오래 방치하긴 했지만, 어떤 생각으로 책을 사들였는지 모조리 기억이 났다.
첫 월급을 받고 워 호스를 산 것, ‘자격증 따서 이 바닥 뜬다.’ 홧김에 영풍문고 코엑스몰점에서 배낭으로 민법강의를 짊어지고, 나는 왜 이렇게 사교성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고슴도치의 고민을 주문한 것이나, 직장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트레인스포팅을 다 읽고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블라인드 심사로 전원 여성작가가 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수상작품집을 샀다가 밤마다 주부가 버려진 킥보드를 타고 배회한다는 내용의 그날 밤을 빼고는 취향이 아니라 실망했던 것, 젊은 남자보다는 부록으로 딸려온 아니 에르노의 노벨상 수상 소감문이 더 좋았던 것.
땅 파다가 나온 거북이 배딱지나 죽은 사람 뼛조각엔 어떤 실용적 가치도 없다. 솥에 넣고 곰탕을 끓일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뼛조각 그대로가 아니라, 은폐된 유골이 인류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발견하려는 역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가치가 드러났다. 문명은 무분별하게 인명을 희생하는 관습을 버리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현금교환을 단념했을 때, 먼지 앉은 채로 꽂혀 있던 책의 가치를 볼 수 있었다. 그건 무의미한 일상을 가치 있게 보내려는 내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허구로 도피하거나, 역량을 키우려 하거나, 취향을 탐색하거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는 결코 아니지만, 책장에 꽂힌 책에 한 때 나를 깊이 사로잡은 고민과 감정과 생각이 남아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미련을 만원에 처분 할 수 있을리가. 헌 책을 팔지 않기로 결심하고, 바닥에 늘어놓은 책들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이 모든 것은 본전 생각에 배가 아파 감가 당한 책들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겠다는 결심에 부치는 구질구질한 변명이다. 쉽게 썩는 종이가 껴묻거리로라도 발견될 일이야 없겠지만 내가 책 보다 빨리 썩는다면, 이 글이 남겨진 책들의 의미를 알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