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락과 공허감
[봉골레 파스타 만드는 법]
1. 바지락과 모시조개를 해감한 뒤 깨끗하게 세척한다.
2. 팬에 올리브유와 마늘, 페퍼론치노를 넣고 끓인 뒤 바지락과 모시조개를 넣는다.
3. 바지락과 모시조개가 모두 입을 벌릴 때까지 기다린다...?
4....
태어나서 이렇게 오래 바지락을 기다려본 적은 없었다.
바지락 하나가 불조절을 해도, 팬의 뚜껑을 닫아도 절대 입을 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집 센 바지락의 입을 억지로 벌렸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껍데기에 가득 들어찬 공허함이었다.
"나 아까 바지락이랑 20분 동안 씨름했는데 안에 아무것도 없었어. 정말 허무하더라니까."
"원래 비어있는 바지락은 아무리 끓여도 입 안 벌리잖아. 몰랐니?"
역시 엄마다. 엄마는 고집 센 바지락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며 텅 비었지만 입을 꽉 다문 바지락과 공허감에 대해 생각한다.
공허감(emptiness)이란 특정 상황에 대한 이유 없는 채워지지 않은 굶주린 상태를 표현하는 정신의학적 용어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 발생할 수 있으며, 일종의 우울 증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은 내면의 부족함을 외부로부터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SNS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과시할 수 있는 매체이기에 내적 허전함을 피하고 자신의 가치를 외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보다, 타인의 인정을 얻는 수단으로 SNS를 사용하는 경향이 커지며, 이 과정에서 공허감이 심화될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장소(plac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비-장소(non-place)를 제안했다. 비-장소란 이동과 통행만을 위한 공간을 의미한다. SNS도 비-장소의 예시가 될 수 있다.
비-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승객(passenger)'으로 비유하는데, 그 이유는 이 공간에 들어온 뒤에는 어떤 선택이나 결정이 주체적일 수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SNS라는 공간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대로 자신의 일상을 포스팅하고 댓글을 확인한 후 '좋아요'를 클릭하는 습관화된 이용패턴을 유지한다.
오제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SNS 상의 만남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에서의 대화는 독백에 가깝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외로움, 공허감을 많이 느낄수록 SNS 상에서 자기 노출의 양이 증가한다고 한다.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SNS에서 자신에 대한 감정을 인정받고, 치유받기를 위해 적극적으로 접속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만족은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SNS 상의 자기 노출은 자기 감시를 전제로 하기에 본질보다 과장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SNS를 통한 진정성 있는 상호작용이나 타인 간 교감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 상태에 대해 표현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솔직한 정보는 감추고 싶지만 타인의 정보는 구경하고 싶은 양면적 심리가 SNS 이용을 더욱 활성화시킨다.
나는 SNS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과 있었던 즐거운 순간들을 모아 가끔씩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올렸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뭔가를 과시하려고 하는 건 전혀 아니잖아.'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이런 작은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것도 다른 방식의 과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걸 스스로 인식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SNS 활동에는 나의 솔직하고 약한 측면은 보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는 심리가 조금씩은 들어있지 않을까.
물론 SNS는 현대인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내가 왜 SNS활동을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허구적인 자아와 나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나 자신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고집쟁이 바지락을 통해 나에 대한 한 가지를 더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