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판 떠나기, 그리고 자율성
나는 보드게임이 좋다.
내가 이기고 있을 때 특히 좋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물었다.
"체스 게임에 참여하고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이기는 것 빼고."
대부분 사람들은 체스 같은 게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이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단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질 것이 뻔할 땐 빨리 끝내고 싶고, 지고 나면 '한 판 더'를 외치게 된다.
"근데 그 체스판에서 꼭 끝을 봐야 할까요? 잠깐 멈추고 나가서 월드콘 하나 사 먹는 건 어떨까요?"
그냥 내 기분부터 챙기고, 좀 천천히 돌아와도 되는 거 아닐까?
좀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무책임한 거 아니야?', '도망치는 거 아니야?'
이건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다.
이기거나 지거나의 프레임 안에서만 반응하는 대신, 그 프레임 자체를 벗어나는 용기.
이기려고 애쓰기보다, 나답게 반응할 수 있는 자유.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자율성(autonom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율성은 단순히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동기화된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을 말한다. 자기 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자율성은 인간의 심리적 기본 욕구 중 하나로, 외부의 압력이나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가치, 감정,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 비로소 충족된다.
관계 안에서도 자율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고, 내 감정과 욕구를 인식한 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 힘. 즉, 무조건 끝장을 보려 하기보다, “지금은 내 감정이 올라오니까, 잠시 시간을 갖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상대가 “그래, 잠깐 쉬자.”라고 말해줄 수 있는 관계. 그건 서로가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부분 체스판에 남아서 끝을 보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감정은 ‘조절해야 하는 것’으로 배웠고, 갈등은 ‘해결해야만 하는 것’으로 배웠다.
하지만 어떤 감정은 바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갈등은 잠깐 멈춰야 풀린다.
그 멈춤의 순간,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나를 돌보는 그 시간에 뜻밖의 통찰이나 부드러운 마음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렇게 나를 돌아보고 나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관계는 처음보다 더 깊어져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든 체스판을 떠날 수 있다.
그건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내가 나를 돌보는 방식이고,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월드콘을 사 먹을 자유, 공원을 산책할 자유,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울 자유, 그냥 아무 말 없이 혼자 있을 자유.
그 자유를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나를 이해하고, 조금 더 건강하게 연결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