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토에서의 예기치 못한 하루
여행이란 뭘까?
정형화된 틀 안에 살던 삶이, 전혀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순례를 마친 순례자에게 여행은 어쩌면 마라톤 42.195km를 완주한 선수에게 다시 바로 달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여행이라는 ‘옷’을 입을 때는, 그 목적을 잘 계획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원했던 건, 산책하듯 여유롭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햇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언어와 환경, 전혀 다른 나라에 와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휴식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그런 휴식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침 공기는 흐리지만, 간간이 햇살이 비친다. 오늘은 부디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밤새 함께 머문 숙소 메이트들의 얼굴은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쿨 호스텔에서는 아침 식사가 제공된다. 아침부터 건물 안에 퍼지는 향긋한 커피 향이 잠을 깨웠다. 식사를 위해 3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한 듯했다.
주방에서는 하우스키퍼 아주머니가 분주하게 청소를 하고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피, 구워 먹는 토스트, 시리얼, 잼, 주스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각자 그릇과 컵에 담아 뷔페식으로 먹을 수 있다.
3층 식당 한쪽 텔레비전에서는 스페인에서 발생한 이례적인 홍수와 이스라엘-하마스 공습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 하갈 언니 생각이 났다. 언니와는 점심 이후 만나기로 했으니, 오전에는 시내 중심가를 혼자 둘러볼 계획이다.
내가 중소 규모 숙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조용하고 소박한 아침 시간 때문이다.
소수의 여행자들과 함께, 서로 방해받지 않으며 오손도손 식사를 나눌 수 있는 공간.
한두 명씩 내려오는 여행자들의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테이블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과 나눈 짧은 대화들이 꽤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주로 "오늘은 포르투 어디 갈 예정이냐"는 정보 공유가 대부분이었지만,
여행을 떠난 사람들 특유의 열린 마음 덕분에 대화는 쉽게 이어졌다.
대형 호스텔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정겨움이 있다.
그래서일까, 아침의 소소한 풍경마저도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침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나갈 준비를 마쳤다.
어제 숙소에 들어오기 전, 바로 옆 골목에 있는 중고서점이 눈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꼭 들러보고 싶었다.
이렇게 오래된 서점을 보면, 어쩐지 책 속에 시간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 같아 괜스레 책을 한 권씩 펼쳐보고, 종이 냄새를 맡아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마치 영화 쥬만지나 오래된 마법서처럼, 어떤 판타지가 펼쳐질 것만 같은 정적과 신비함이 가득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다.
나는 늘, 낯선 도시에서 가장 현지의 감성과 숨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중고서점이라고 생각해 왔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포르투 풍경을 그린 일러스트와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포르투갈어를 전혀 모르지만, 이곳에서 꼭 책 한 권은 사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마음에 깊이 들었다.
마치 책장 사이사이로 시간이 스며 있는 듯했다.
컴퓨터 자판 소리가 아닌, 연필 심이 부서지며 가루가 날리고 사각거리는 소리.
그 낡고 정적인 소리가 이곳을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분명 여행지 한복판에 있는 곳이지만, 이 서점은 전혀 여행지 같지 않았다.
너무도 고요하고 조용해서, 마치 시간도 발걸음을 멈춘 듯.
아침 일찍 문을 연 책방 안을 홀로 누비며 책을 고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손에 들었던 책은 2021-2022년 포르투갈 문학이 매달 실려 있는 양장 다이어리였다.
책의 구성도, 종이의 질감도, 잉크 냄새조차도 내 감각을 사로잡았다.
한 바퀴를 더 돌아봤지만, 결국 다시 그 책 앞에 멈춰 섰다.
처음 손에 쥐었던 그 책이, 결국 내 책이었다.
사실 산티아고에서는 이미 책 두 권을 샀고,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도 공책을 하나 구입해 내 가방은 꽤 무거운 상태였다.
하지만 여행은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 또 한 권을 품에 안았다.
유명한 관광지보다, 내가 우연히 발견한 이런 숨은 장소들이야말로 내 여정 속 ‘보물 같은 기억’이 된다.
책방 한쪽에는 마법 지팡이라도 꺼내줄 것만 같은 분위기의 주인장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할인된 책 값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서점을 나섰다.
"오브리가도(Obrigado)."
감사의 마음과 함께, 나만의 기념품 한 권을 품고.
책을 들고 옷 매장들이 즐비한 거리로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거리 곳곳에서는 마치 홍대 거리처럼 버스킹을 하는 음악가들이 하나둘씩 나와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옷 구경을 하다 보니, 사람 구경도 쏠쏠하다.
명동처럼 옷가게와 음식점이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내가 입고 다니던 옷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줄곧 입었던 고어텍스 등산복뿐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일상복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노란색 고어텍스 재킷은 멀리서도 내 위치를 쉽게 알릴 정도로 눈에 띄었다.
포르투는 생각보다 꽤 젊고 세련된 도시였다.
지나는 사람마다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쓴 듯 옷을 잘 입고 있었다.
줄줄이 늘어선 옷가게에 들어가 옷을 입어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겨울 외투나 옷들을 과감히 사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날은 여러 옷가게를 혼자 돌아다니며 눈으로만 확인했고, 마음에 드는 옷 하나만 골라 두었다.
날이 점점 추워져서 베레모를 구입하고 싶었는데, 확실히 이곳은 프랑스가 아니다 보니 다양한 색깔의 베레모는 많지 않았다.
언니를 만나면 함께 봐달라고 할 생각이다.
하갈 언니와는 자라 매장에서 12시 15분에 만나기로 했다.
언니는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계속되는 궂은 날씨와 누적된 여행 피로, 유럽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 그리고 이스라엘 전쟁 발발이라는 암울한 소식까지 겹쳐, 언니의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만든 듯했다.
나는 미리 봐 두었던 베레모를 써보며 언니에게 어떤 색이 어울릴지 물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것은 부드러운 베이지색 베레모 한 개였다.
조금은 여행자 티를 낼 수 있으려나?
모자 쇼핑을 마친 우리는 어제 들렀던 카페에 다시 가 커피와 에그타르트를 즐겼다.
앉아서 오늘은 어디를 가볼지 하갈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 하면 한강이 떠오르듯, 포르투 역시 도시 중심을 흐르는 도루 강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루 강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감각적인 디자인 숍들이 줄지어 있었고,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골목에서는 성당에서 보았던 푸른 아줄레주(포르투갈 전통 타일)와는 또 다른, 다양한 색감이 혼합된 독창적인 무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포르투갈만의 개성과 미감이 거리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움직임이 많은 하루였기에 든든하게 먹어야 했지만, 우리의 점심은 에그타르트와 카페 콘 레체가 전부였다.
구시가지로 내려가는 길,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개성 있는 건물들을 구경하며 강가까지 걸어가서 맛있는 걸 먹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언니는 속이 좋지 않은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특산품은 포르토 와인, 청어 통조림, 그리고 코르크 가죽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디자인 숍, 거리의 그라피티와 일러스트들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갤러리처럼 느껴지게 했다.
상벤투스 기차역은 내가 머물고 있던 곳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갔고, 외벽 공사 중이라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외부와 달리 내부로 들어서니, 파스텔 빛깔의 상아색 페인트와 포르투갈의 풍경을 청색 타일로 표현한 벽이 독특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아, 이것이 바로 포르투갈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한국의 불국사나 고궁에 들어가 한국의 역사를 배울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많은 곳은 금세 피로감을 안겨준다. 정신없이 구경하던 중, 언제 찍혔는지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나를 위해 하갈언니가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포르토의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분위기였다. 강가로 가까워질수록 날이 흐려졌다. 테라스에 즐비한 음식점들과 노점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문득, ‘왜 산티아고를 걷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감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새로운 길을 나아갈 힘을 어떻게 얻어야 할지 몰랐던 그때.
이제는, 눈물이 조금 번지긴 했지만, 슬픔을 머금고 담담하게 이야기할 정도는 된 것 같다.
산티아고에서의 오열이 이제는 먼 기억처럼 느껴지며, 그 길을 떠날 용기를 찾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순례길을 완주하고 나서, 여전히 발에서는 열이 나고 있었다. 그동안 겪었던 사건과 사고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꽤 긴 거리를 걸었음에도 우리는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함께 걸을 수 있었다.
포르토의 명소 중 하나인 루이스 1세 다리를 건넜다.
위쪽 동네로 트램을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강가를 따라 걸으며 맞은편에 위치한 포르토 와이너리를 보러 가기로 했다. 길을 건너기 전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다리를 건너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 건너에는, 아까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플리마켓이 좌판을 펼치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그들은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렇게 비가 오면 장사가 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동병상련의 마음이 생겨났다.
비가 점점 심해져 우리는 근처의 장난감 공장처럼 생긴 매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청어통조림을 팔고 있었다.
코무르 1942
포르투갈 최초의 생선 통조림 공장은 19세기 초에 설립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당시 포르투갈 통조림 식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며, 이 산업은 당시 포르투갈 경제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저희 공장은 아베이루 지역의 무르토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베이루 석호와 인접해 있어 이 지역은 어업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석호에 풍부한 장어 덕분에 에스카베체 소스에 재운 유명한 장어 튀김이 탄생했습니다. 이 별미는 "무르토사의 튀김 판매원( Fritadeiras da Murtosa)"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1942년 무르토사 통조림 공장(Comur)이 설립되었습니다. 20세기 포르투갈의 수백 개의 다른 통조림 공장과 마찬가지로, Comur는 부문 간 무관심과 저가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쇠퇴를 겪었습니다.
2015년에 O Valor do Tempo 그룹에 합류하여 포르투갈 역사의 일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통조림 식품의 가치를 중시하는 전략을 가진 활력 넘치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코무르는 지난 80년 동안 보존해 온 전통적인 수공예 생산 방식을 유지하는 포르투갈의 몇 안 되는 공장 중 하나입니다.
https://portuguesesardine.us
자료 발췌
비를 피해 들어간 이곳은 휘향 찬란한 장난감 공장 같았지만, 사실 100년 전통의 청어 통조림 공장이었다.
호두까기 인형처럼 생긴 병정들이 지키고 있는 아기자기한 색감의 공장이 초콜릿이 아닌 청어조림을 만드는 곳이라니,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디자인에 기념품으로 구매해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뭐든 이렇게 예쁘면 손이 갈 것 같긴 하다.
비가 잠시 멈추기를 기다리며, 나는 공장 내부의 체험존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자, 강가는 점점 더 스산한 분위기로 변해갔다. 오늘도 저녁노을을 보기는 글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그타르트만 먹은 나는 근처 와이너리에서 와인과 함께 뭔가 간단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온이 떨어지면 금세 체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잘 먹어야 한다.
포트와인이란?
포르투갈 북부 도루강(Douro R.) 상류의 알토도루 지역에서 재배된 적포도와 청포도로 주로 만들어진다. 포트 와인(Port Wine)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의 수출을 담당한 항구 이름이 ‘오포르토’인데서 유래하였다. 1670년대부터 영국으로 선적되어 왔는데, 1800년대 들어와 오랜 수송기간 동안 와인의 변질을 막고자 선적자들이 브랜디를 첨가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 주정강화 와인인 포트 와인이 되었다. 최근 다른 나라에서 ‘포트(Port)'라는 이름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포르투갈산 포트 와인의 명칭을 포르토(Porto)로 바꾸었다. 1756년부터 원산지 관리법이 시행되어 세계적으로 최초로 관리되었다.
포트 와인은 대부분 레드 와인으로 제조되나 드물게 화이트 와인으로도 만들어지며 알코올 함량은 18~20% 정도이고 브랜디의 향, 견과류의 고소한 향이 난다. 주로 쓰이는 포도품종은 토우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이며 알코올 함량 75~77%의 브랜디를 첨가하여 만든다. 이때 첨가되는 브랜디 양은 발효 중 와인의 25% 정도 분량이다.
셰리 와인(Sherry Wine)이 발효 후 브랜디를 첨가한 주정 강화 와인이라면, 포트 와인은 발효 중에 브랜디를 첨가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드라이한 맛의 셰리 와인은 식전와인(Aperitif Wine)으로 주로 이용되고 단맛이 있는 포트 와인은 식후주로 주로 마신다. 포트 와인에 단맛이 존재하는 이유는 발효 중 브랜디를 첨가하여 효모가 파괴되고, 아직 발효가 끝나지 않은 포도의 당분이 그대로 남기 때문이며 이렇게 남은 잔당이 9~11%가량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트 와인 [Port Wine] (두산백과)
원래는 강가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포트 와인을 시음해보고 싶었지만, 소나기가 내리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너무 추워졌다. 게다가 테라스 테이블은 비로 다 젖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실내로 들어가 음료를 주문했다. 평소 같으면 절대 시키지 않았을 술을, 한 잔도 아니고 5잔이나 나오는 시음용 세트로 주문했으며, 안주로는 브리치즈와 올리브 무침을 함께 주문했다.
포르토 와인은 달고 도수가 높았다.
정말 한 입씩밖에 먹을 수 없었고, 도수가 높고 달아서 내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특히 색이 진해질수록 맛이 더 달아져,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로서는 이 정도 테스트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지나가던 술꾼 관광객들이 우리를 보고 웃으며
“이거밖에 안 마셔?”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언니라도 같이 마셨다면 다 마셨을지도 모르지만, 언니는 속이 계속 불편한지 탄산수만 마시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고, 언니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우리는 저녁 장을 보고 내일 리스본으로 출발하기 전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체험해보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언니와의 상태가 달라 아쉬운 만남이었지만, 이제 나 역시 움직여야 할 시점이었다.
언니와 비쥬를 하고 맞추며 인사를 나누고, 각자 숙소로 헤어졌다.
포르토는 날씨가 좋다면 여러 곳을 둘러보기에 충분히 크고 활기찬 도시였다.
잠시 숙소로 돌아와 시에스타 시간을 가졌다.
아침부터 꽤 많이 걸었고,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사실 지금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관광이 아니라 **‘휴식’**이었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탓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깊게 잠들어버린 것 같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아침에 먹은 토스트와 시리얼, 커피, 그리고 점심에 카페 콘 레체와 에그타르트가 전부였다.
숙소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허기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날은 금세 어두워졌고, 나도 모르게 잠시 눈을 붙였던 것 같다.
새벽부터 걷기 시작했을 때는 멀쩡했던 몸이, 사람 많은 도심 관광지를 돌아다닐 만큼 여독이 다 풀린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방에서 쉬고 있던 방메이트 들도 저녁을 먹으러 방을 나갔고, 방에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다인실에서 혼자 남겨졌을 때 느껴지는 그 묘한 고독감.
큰 방이 주는 정적과 어둠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비도 오고,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뜨끈한 국물의 소울푸드, 베트남 쌀국수가 간절해졌다. 나는 구글 지도를 켜고, 조용히 길을 나섰다.
마침 숙소 근처에 있던 쌀국수집을 찾아 길을 따라 걷다가, 뜻밖에 산투 일드폰수 성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연히 마주친 이 성당은 그 자리에서 조용하면서도 뚜렷하게, 자신만의 고유한 멋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나는 식사를 하기 전 성당 앞 계단에 앉아 한참 동안 그 웅장한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이런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이다. 말없이 바라보는 순간, 마음이 고요해졌다.
성당 앞에는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오래된 영화관과 함께 바탈랴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장을 둘러싼 고급 호텔들 덕분인지, 이 일대는 포르투 특유의 고급스럽고 느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성당 입구 옆으로는 좁은 골목길이 나 있었고, 그 길목에는 케밥집과 쌀국수 가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서울 이태원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어딘지 모르게 중동 분위기의 거리였다.
예전 여행 중, 케밥집을 경계로 도시의 우범지대가 나뉘는 것을 직접 체험한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항상 밤에는 한층 더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려 한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낯선 타지, 한국이 아니니까.
조금만 더 어두워졌다면, 이 골목을 혼자 걷는 것은 실제로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질적이고, 동시에 다국적 문화가 교차하며 스며든 특유의 공기가 느껴지는 거리였다.
쌀국수 집은 베트남 현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작고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가게 안은 따뜻한 조명과 소박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주인장도 실제 베트남 사람이었다.
나는 혹시 베트남 맥주가 있는지 물었지만, 아쉽게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대신 양지 쌀국수와 맥주 한 잔을 시켜, 조용히 뜨끈한 저녁을 즐겼다.
국물 한 숟갈이 몸을 타고 내려가자,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반가웠던 건, 테이블 위에 놓인 스리라차 소스였다.
포르투에서, 그것도 이런 작은 가게에서 스리라차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왠지 모르게 고향의 맛을 발견한 듯한 위로가 밀려왔다.
이날 내가 제대로 먹은 끼니는 이게 처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릇을 비워버리고 말았다.
배도 마음도 든든해져서, 느긋한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하는 길.
그런데, 어느 순간—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불길한 예감 하나.
'… 열쇠?'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를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폈지만—없었다.
숙소 출입문 열쇠가 없어진 것이다.
순간, 마치 고양이처럼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곧두세워졌다.
옷 주머니를 다 뒤적여 봤지만 열쇠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발걸음을 돌려, 아까 그 쌀국수 집으로 다시 달려갔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문이 닫힐 테고, 그전에 열쇠를 잃어버렸다면—다시는 못 찾을 수도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늘 너무 무리했던 게 이렇게 티가 난다.’
하지만, 음식점 어디에도 열쇠는 없었다.
바닥도 살펴보고, 앉았던 자리도 다시 확인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헉… 정말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혹시 숙소에 두고 나온 걸까?
포르투에 도착해서 하루를 보낸 지금까지, 이상하게도 평온한 날이 없다.
무언가 계속 어긋나는 기분이다.
하는 수 없이, 숙소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주인이 문을 열어 주며 피곤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표정엔 놀람도, 궁금함도 없었다.
마치 ‘또 무슨 일이지?’ 하고 말없이 되묻는 듯했다.
도착 첫날부터 정신없던 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계속해서 뭔가 삐그덕 대는 내 모습이, 스스로 봐도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황급히 4층 방으로 올라가, 보조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다행히도, 열쇠는 거기 있었다.
가방을 두고 가볍게 외출했던 탓에 미처 신경을 못 썼던 것이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출입문 열쇠를 거의 사용하지 않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에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 같다.
어릴 적에도 열쇠를 자주 잃어버리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가방 속에서 얌전히 있던 열쇠를 꼭 쥐었다.
내일 원래 나의 목적지인 세비야를 갈지 리스본에서 하루를 머물지 결정을 해야 한다.
지도를 살펴보고 OMIO 앱으로 경로를 확인해 보니, 세비야행 버스는 리스본을 경유해 가는 노선이었다.
만약 지금 다시 계획을 짠다면,
나는 아예 리스본을 거쳐 더 아래—바다가 펼쳐진 포르투갈 남부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사그레스(Sagres)**나 파루(Faro) 같은 최남단의 휴양지에서
햇볕을 듬뿍 받으며 조금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그 따뜻한 풍경이 문득 그리워졌다.
마침 수잔이 리스본에서 휴가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지나는 길이라면 하루쯤 머물다 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기대하던 포르투에서는 이틀 내내 비가 내려, 결국 햇살 한 줌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리스본에서의 하루는 더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다.
내일 오전 10시경 버스를 타고, 오후 1시쯤 리스본에 도착할 예정이니 이동 조건도 나쁘지 않다.
도착하자마자 하루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산티아고를 걸을 때와는 다르게, 도시에 머무는 요즘은 금세금세 돈이 빠져나간다.
유럽 물가의 위력이 도시에 들어오니 확실히 체감된다.
침대에 누운 채, 내일 아침에 떠날 버스표도 예약을 마쳤다.
아침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Porto Campanhã 역으로 가면 된다.
생각보다 간단한 동선이다.
하갈 언니에게는 안부와 함께 다음 여정 계획을 전했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여정이 평안하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포르투에 온 목적은 하갈 언니를 만나고,
따뜻한 태양과 멋진 노을 풍경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이제는 리스본.
그곳은 또 어떤 감동과 인연을 나에게 안겨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저 느낌이 이끄는 대로,
발이 닿는 대로 걸어 나갈 뿐이다.
여행 목적이
**'새로운 길을 향한 한 걸음'**이라면,
그 길 위에서 관광지를 알차게 둘러보지 않아도,
기념품 하나 사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이 여정 자체가 이미 충분한 의미가 있다.
여행이란 늘 아쉬움과 후회를 품는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야말로, 다음 여정을 꿈꾸게 만드는 씨앗이다.
나는 오늘도 그 씨앗 하나를 조심스레 품는다.
언젠가 다시 피어날, 다음 여정을 위해.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