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을 스쳐가소서
이렇게 달리면 지각이다. 오늘은 월요일. 8시 20분 직원 조회가 있는데. 터널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오늘은 내가 발표할 게 있는데. 초조해진 나는 부장님한테 전화했다. 전화벨이 아무리 울려도 받질 않는다. 가슴이 요동친다. 어쩌지. 교감 선생님께 전화해야 하나? 그러면 부장님이 자기를 무시했다고 싫어할 건데. 나는 다시 부장님한테 전화를 걸어봤다. 이번엔 고객이 통화 중이란다. 손이 떨린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짜증 섞인 부장님 목소리가 내 귀를 때린다.
엉켜 붙은 구름이 무거워 고개를 흔들거리더니 비가 내린다. 홀가분해진 구름이 부둥켜안고 막춤을 추는지 천둥소리도 들린다. 우산이 없어 나는 뛰었다. 다친 오른쪽 무릎이 왼쪽을 따라오지 못하고 끌려왔다. 이대로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건데.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이 넓은 들판에 왜 혼자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을까?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왜? 왜? 왼발이 오른발을 힘겹게 끌고 가다 발이 꼬였다. 앞으로 넘어지려 휘청거렸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팔목이 시큰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왼쪽 팔목은 아프고, 흠뻑 젖은 몸이 춥다고 부르르 떨기까지.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발을 뻗대며 소리 내 울어버렸다.
힘들게 눈을 떴다. 꿈이었다. 자는 동안 얼마나 용(勇)을 썼는지 침대에서 일어나려니 온몸이 뻐근했다. 목도 칼칼하다. 그동안 전신 마취 시 삽입했던 관으로 인해 계속 목이 찌릿찌릿하며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약이라고. 드디어 며칠 전부터는 미세먼지 없는 날처럼 목이 술술 풀려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 한데 다시 목구멍이 따갑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꿈을 되새기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퇴직한 지가 벌써 2년째인데도 출근하는 꿈을 꾸다니. 어젯밤에도 지각하다가 쏟아지는 빗속을 헤매는 꿈으로 이어졌다. 꿈해몽을 찾아볼까 하다 관뒀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꿈을 꾸고 뒤척거리는 이유는 여전히 실체 없는 두려움이 내 주변을 맴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평안이란 단어를 품고 사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 쉼이 주는 불안감. 규칙적으로 어디엔가 매달려 노동해야 할 것만 같은 죄책감. 이런 복합적인 마음들이 밤새 단막극처럼 내 잠을 방해하는 것도 같다. 짚을 이어가며 새끼를 꼬듯이 생각에 생각이 이어졌다.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나하고는 맞지 않은 상념인지라 머리를 흔들며 떨쳐냈다. 침대 정리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아침 햇살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거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분수대를 바라봤다. 지난여름에는 아이들 덕분에 요란했을 분수대가 썰렁하다. 아침 내내 흡입기로 쓸어낸 낙엽을 담은 포대만 한 줄로 쭉 서 있다. 분수대와 놀이터 주변을 지키고 있는 잎사귀 하나 없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들이 보였다. 서로 날개와 고개를 끄덕거리며 뭐라고 질러대고 있다. 나는 빼꼼하게 고개를 내민 채 새소리에 박자를 맞추다 거실 청소를 시작했다. 일인용 의자 덮개를 벗겨냈다. 몸이 꺼지도록 앉았던 자리를 털고 붙박이장에서 가져온 새 덮개를 씌웠다. 빨간색 줄무늬가 산뜻하게 입혀진 의자를 향해 칼칼한 목소리로 '예뻐!'라고 했다.
창가 화분에 물을 주며 색깔이 누렇게 변한 잎사귀를 뜯어냈다. 연말이니 화분도 잘 먹어야지 싶어서 알갱이 영양제 10알을 흙더미 위에 골고루 얹어 줬다. 거실 정리를 끝내고 허리를 펴는데 봄날 같던 날씨가 갑자기 어둑해졌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 방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방문에 붙어있던 마그네틱 사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나는 황급히 창문을 닫고 사진을 집어 들었다. 칠십 넘은 부모님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두 분이 떠나신 지가 한참 전인데도 어제 뵌 분들 같다. 지금이라도 전화하면 들릴 것만 같은 목소리가 내 귀를 맴돌았다. 나는 사진을 손바닥으로 한번 닦아낸 후 다시 방문에 붙였다. 코끝이 시큰했다. 눈가도 매웠다.
그때였다. 애절한 곡( 哭) 같은 사이렌이 울렸다. 아! 맞다. 오늘이 그날이다. 작년 전 세계를 울렸던 대형사고일. 어제 오후와 조금 전 울리던 안전 문자가 떠올랐다. '09:03분에 12.29 여객기 참사 1주기 추모 사이렌이 1분간 울릴 예정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라남도>' 나는 얼른 고개 숙여 묵념했다. 거실에 머물러있던 바람이 고개 숙인 나를 스치며 미처 닫지 못한 부엌 창으로 빠져나갔다. 습기와 같이 창문을 들락거리던 거미도 차가운 바람을 따라 날아갔다. 어젯밤 내 꿈은 오늘을 잊지 말라는 무거움이었나 보다. 억울한 죽음 앞에 뭐라 위로할까. 나는 묵념을 하면서 빌었다. '오늘 밤에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계신 가족들에게 한 번 만이라도 얼굴을 보여주시길, 새해엔 이런 벼락같은 참사(慘事)가 일어나질 않길. 새해엔 부디 환한 꿈만 꾸길.'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아침 햇살로 내게 다가온 그들과 부모님은 차가운 바람을 남기고 그들만의 세상으로 다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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