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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Mar 28. 2024

현부(賢婦)와 우녀(愚女)의 사잇길 혹은 교차로

「成進士悍妻杖脚」, 「禹兵使妬婦割髥」에 관한 독법

글/ 용신선


‘아내’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얼마 전부터 아내와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눈물의 여왕>(2024)이 그것이다. 극 중 평범하지만 재벌가와 비교하면 어려운 처지(?)로 보이는 시골 출신의 법률가 사위 백현우 역을 맡은 배우 김수현 님과 재벌가 딸로 '퀸즈'백화점을 위풍당당하게 이끌며 투병 중인 홍해인 역을 맡은 배우 김지원 님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기에 강한 몰입감을 갖고 우리 부부는 열심히 '본방사수'를 하는 것이 근래의 일상이다. 동명의 인기 웹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내 남편과 결혼해 줘>(2024)도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두 콘텐츠의 공통점은 '부부'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만 전자는 흔한 드라마 속 클리셰(cliché)를 비틀어 남녀의 역할을 바꾸었고, 후자는 회귀물(回歸物) 장르로 남편에 대한 '복수'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차이.

  최근의 콘텐츠 못지않게 고전에서도 '부부'를 마주할 수 있다. 가령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의 ‘부부사이’에 대한 삽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곤 한다. 올림푸스의 신들 중에서도 제우스-헤라 커플이 보여주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인간보다도 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라 하겠다. 바람둥이 제우스의 곁에서 질투와 시샘으로 가득한 아내 헤라의 모습이 그런 예이다. 사실 헤라는 희랍 지역에서 ‘여신’으로서의 당당한 지위를 갖고 있던 존재이다. 그리스에 국한되어 전승되기에 이른 것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그리스 신화 속의 ‘제우스 아내, 헤라’인 것이다. 헤라는 한낱 ‘질투 많은 여인’, ‘남편을 집착하여 의심하는 여인’에 지나지 않은 캐릭터로 전락해 버렸다.

수촌은 〈천예록〉 수록 「성진사한처장각」과 「우병사투부할염」을 통해 사납고 질투 많은 아내들을 소개하고 있으니 한번 들여다보도록 하자.     



사나운 아내와 ‘쪼다’ 남편의 잔혹사     


광해군 시절에 진사 성하창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명문귀족으로 어릴 때부터 재주와 명망이 있었지만 평소 성격은 여린 데다가 찬찬하지도 못한 편이었다. 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그의 아내도 좋은 집안 출신인 데다 빼어난 재색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집안을 잘 챙겨 남편의 옷가지며 장만한 음식이 더없이 화려하고 풍성했다. 다만 문제는 성질이 사납고 난폭하다는 점이었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며 따지다가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였다. 성생은 아내가 몹시 두려웠으나 어떻게 대항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결국 아내에게 완전히 제압당해 그녀의 손바닥에 놀아나, 서라 하면 서고 앉으라 하면 앉는 신세가 되고 말아, 한 가지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집안의 종들도 부인의 호령만 듣게 되어 안주인만 있는 줄 알지 바깥주인이 있는 줄은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다.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7) 「성진사가 사나운 아내에게 볼기를 맞다」, 193쪽.      


  하창(夏昌)은 이름처럼 한창 더운 여름 ‘복(伏) 날 개 패듯’이 맞는 남자이다. 누구로부터 그렇게 폭력을 겪는가? 다름 아닌 아내로부터이다. 하창의 소년 시절 자질은 ‘맞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年少有才名(연소유재명)’이라는 구절에서 확인되듯 재주와 명망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다만, ‘而性素懦拙(이성소나졸)’ 구절에서 확인되듯 성격이 박약하고 졸렬함이 문제였다. 곧 '쪼다'남편이라는 것이다. 하창의 ‘이름 모를’ 아내 역시 남편과 마찬가지로 명문거족의 후예일 뿐 아니라, 재색이 뛰어났고 심지어 풍요로운 가정 역시 그녀의 ‘살림력’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매우 독특한 특이점이 있었으니 ‘而但其性情悍暴(이단기성정한폭)’ 구절에서 확인되듯 ‘사나운 아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성생은 어느 날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호남 먼 고을에 우리 집 노비가 살고 있지?’ 그곳으로 도망하여 숨는다면 아마도 무사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마침내 말 한 필에 몸을 실은 채 집을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천릿길을 며칠 만에 달려 비로소 그 집 하인이 사는 곳에 당도하니, 여러 하인들이 맞이하여 모셨다. 성생은 마치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점차 자고 먹는 것도 편안해졌다.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7) 「성진사가 사나운 아내에게 볼기를 맞다」, 194~195쪽.      


  도대체 하창의 재주와 명성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짧은 야담 삽화 속에서 그는 연거푸 ‘도망’만 계획한다. 가장으로서 집안의 중심에 설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집 밖으로 튕겨나갈 생각만 이어나가는 것이다. 집 안이 감옥이고 집 밖이 참다운 집이라 할 만큼 그의 집에 대한 감각과 정서는 이미 '비정상'에 가깝다. 말 그대로 '안주인'이 진정한 '주인'이고, '바깥양반'은 정말 '바깥'으로만 겉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보면 그의 도주는 그리 오래가는 편이 못되었다. 늘 아내에게 행방을 들키고는 호되게 혼쭐이 나고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의 아내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성생의 여러 벗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성 아무개가 오늘에야 살아났구나!’ 마침내 모여서 축하를 하러 갔다. 그때 성생은 부인의 상을 마쳤으나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벗들이 찾아오자 조문 온 줄로 알고 그들을 마주하여 곡을 하였다. 그러자 그중 한 친구가 손으로 성생의 뺨을 때리고 버럭 소리 지르며 야단을 쳤다. ‘우리가 축하해 주려고 왔지 조문하려고 온 줄 아느냐? 어찌 곡을 해?’ 그제야 성생은 한번 씨익 웃으며 곡을 그쳤다.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7) 「성진사가 사나운 아내에게 볼기를 맞다」, 195~196쪽.      


  아내가 병에 걸렸다. 몹쓸 병이고 목숨이 위태로운 중병이다. 과연 '쪼다'남편 하창은 '여장부' 아내의 투병을 돕고 간병을 했을까? 이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쪼다 서생은 병든 아내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을까? 끝내 그녀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창이 얼마나 하찮은 남편인지 서사 말미에 드러난다. 말 그대로 홀아비가 된 하창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벗들이 왔다? 아니다. 비로소 아내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홀아비를 위해, 자유부인 아닌 자유남편을 위해 친구들은 축하하러 왔다. 그러나 여전히 하창은 아내의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내의 사나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하창은 곡하는 '연기'를 시작한다. 보다 못한 친구의 '싸대기' 한 방에 정신 차린 성생의 미소 한발! ‘生一笑而止(생일소이지)’를 보며 독자는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이름 모를 아내에 대한 애도는 그 누구에게서도,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음 또한 씁쓸하다.          


질투의 여신이 거룩한 수염을 불태우나니     


우상중은 공주 출신의 무사이다. 그의 용기와 담력은 당할 자가 없었다. (중략) 우상중은 옷을 벗고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가 배 위로 뛰어오르더니 사공의 목을 베어 버리고 상앗대를 걸고 배를 저어 돌아왔다. 임금은 그를 장하게 여겨 그 자리에서 선전관에 제수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장수로 발탁, 승진을 거듭하여 전라수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7)「우병사가 부인의 질투로 수염이 잘리다」, 197쪽.      


  尙中(상중)은 군졸들이 숭상하는 한가운데 있는 ‘어엿한 장수’이다. 이괄의 난 때에 그는 직접 군주를 위해 배를 끌어왔다. 그런데 담력과 용기가 상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그가 벤 목은 적장이 아니라 한 백성의 목에 불과하다. 사실, 그의 용기와 담력은 당할 자가 없다고 위풍당당하게 한 문장이 남겨있으나 그 용기와 담력이 전투에서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해당 서사에서는 알 길이 없다. 여하간 그는 사공을 죽이고 군주를 위해 피난할 배를 마련한 덕분에 승승장구, 끝내 전라수사가 된다.


그의 아내는 자기 남편이 무슨 짓거리를 하더냐고 묻자, 하인의 말이 ‘기녀들을 태우고 풍악을 울리더라’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이 인간이! 나랑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따위 짓을 해? 한번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않았다간 나중엔 손을 못쓰겠군’ 하며 화를 내고, 그 즉시 전대에 건량을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미투리를 신고 혼자서 길을 나섰다. 하루에 수백 리 길을 걸어서 통영 해변까지 쫓아왔다. 그땐 우병사가 지휘하는 전함이 아직 통영에 도착하지 못한 때였다. 아내는 멀리 있는 남편을 불렀다. ‘속히 육지로 배를 대시오!’ 우상중은 이 말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내 마누라 소린데, 큰일이 닥치겠구나!’ 조급한 마음에 어찌할 줄 모르고 즉시 영을 내려 배를 해안에 대었다. 배가 해안에 닿자, 아내는 배 위로 훌쩍 뛰어올라 윗자리에 걸터앉았다. 배 안의 장졸들은 모두 피하여 달아나 버렸고, 우상중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7)「우병사가 부인의 질투로 수염이 잘리다」, 198쪽.      


  통영으로 훈련을 떠난 남편이 깜깜소식이다. 마침 본가로 온 하인이 하나 있기에 물어보니 '기녀들을 태우고 풍악을 울리고' 계시단다. 이름 없는 아내는 단 하루에 수백 리 길을 걸어 통영 해변에 이른다. 위 작품에서 웃음의 롤러코스터가 차오르는 정점은 ‘此乃吾夫人之聲也. 大變將至!(차내오부인지성야 대변장지)’ 구절이다. 배를 속히 육지에 대라! 여장부 아내의 우렁찬 소리에 수염만 멋진 장수 남편은 화들짝 놀란다. 어라! 이거 내 아내 목소리인데? 큰일 났다!       


우병사는 평소 수염이 보기 좋다는 말을 들었고 그 길이는 배까지 닿을 정도였는데, 이젠 수염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우병사가 통영에 도착했을 때 통제사로 있던 상국 이완이 그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평소 공의 수염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홀랑 잘랐는가?’ ‘나으리께서 물어보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이젠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나이다.’ 그러면서 잘린 사실을 그대로 다 아뢰었다. 알고 보니 이 부인의 용기와 힘은 우병사보다 몇 곱절 더 강했던 것이다. 얘기를 듣고 통제사는, ‘장수된 자가 자기 아내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찌 적을 제압하겠는가?’라고 화를 내면서 즉시 조정에 계문을 올려 파직시켜버렸다.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7)「우병사가 부인의 질투로 수염이 잘리다」, 199쪽.      


  우병사가 오늘날 있었다면, 면도기 광고 모델로 섭외되었을까? 멋진 수염을 훗날리던 우장군은 수하 졸병들에게 '관우'와 같은 존재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내에게 홀랑 수염이 잘리고 만다. 모두 보는 앞에서 남편은 사나운 아내로부터 곤장 30대를 피가 나도록 맞은 터였다. 그것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은 아내는 남편의 부하들 앞에서 남편의 마지막 자존심 수염을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잘린 것은 수염뿐이 아니다. 우장군의 직책도 덩달아 잘려나갔다. 한심한 남편이구나! 무슨 장수란 말인가? 에이! 권고사직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해고통보다. 해고된 우병사는 그 후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속담에 ‘맘대로 안 되는 게 마누라’라는 말이 있다. 옛날 천하의 당태종도 방현령 부인의 질투를 막을 수 없었으니, 지금 성생의 졸렬함으로야 어찌 사나운 부인을 제압할 수 있으랴? 그 죄를 들어 법을 바로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다만 용맹스러운 우병사도 자기 아내 하나 어쩌지 못해 매를 맞고 수염이 잘리는 지경이니, 어째서인가? 우병사의 아내가 여장군이 되어 적을 막도록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7), 200쪽.


  맘대로 안 되는 마누라는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우병사의 아내는 남자로 태어나 장군이 되었어야 한다? 수촌의 평은 오늘날의 눈으로 읽어나가면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마누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식이'도 그렇다. 한 장관에게 상대 의원이 '남편단속'을 이야기하자, 남편은 제 말을 듣지 않는다던 옛 정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부현녀(愚夫賢女)와 현부우녀(賢夫愚女)의 사잇길에 놓인 부부라는 신비     


  도대체 ‘부부’란 무엇이며, ‘남편’은 무엇이고, ‘아내’는 무엇일까?  옛이야기에는 대체로 어리석은 남편과 현명한 아내의 구성을 갖춘 부부들이 즐겨 등장하곤 한다. 남편이 저지른 실수는 모두 아내가 '엄마'처럼 수습하기 바쁘다. 반대로 어리석은 아내와 현명한 남편 이야기도 적지 않다. 아내의 결핍을 남편이 채우느라 역시 바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본 야담서사 두 편의 부부는 어리석은 남편과 어리석은 아내의 구성이라 할 것이다. 마이너스와 마이너스의 만남이라고 할지, 둘은 서로를 채울 수 없다. 사나운 아내는 집 안이거나 집 밖이거나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아랫사람들' 앞에서 자기 남편을 '하대'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남편은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아내에게 쩔쩔맨다. 어느 한쪽이 '사망'에 이르러서야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 얼마나 심각한 부부관계인가! '촌년이 출세했지요.' 한 정치인이 언론인들 앞에서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디가 회자된 적이 있다. '사모님'으로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이들 앞에서 남편은 아내를 '하대'하고 만 것이다. 어리석은 남편과 어리석은 아내. 그야말로 골칫덩이 부부라 만하다. 방금 본 두 서사 속에 부부의 2세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로도 채워주지 못하는 사이가 어떻게 부모의 역할로 자녀를 채워줄 수 있겠는가! 부부는 어느 시대, 어느 곳이거나 우부현녀, 현부우녀의 사잇길이다. 어리석은 남편과 어리석은 아내가 나갈 곳은 부부상담 예능프로그램 정도가 전부일지 모른다. 온 세상에 망신을 당하고서야 바뀐다면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수염이 잘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쩝. 이거 큰일이 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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