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과 문방구에 대한 회상
찻길에 있었던 문구점. 쇼윈도에는 전투기, 헬리콥터, 탱크, 그리고 다양한 만화영화 속 로보트들이 즐비했다. 고무동력기, 학용품, 물체주머니, 과학상자. 햇빛에 바랜 완구들이 있기도 하고, 가게 앞에는 아이들을 유혹하는 뽑기가 있거나 불량과자가 있기도 했던 곳. 향기 나는 볼펜, 모양자, 각도기, 콤파스, 변신필통. 문방구 혹은 문구점, 완구점. 동묘에 있는 도매상가가 아닌 초등학교 인근에 곳곳 박혀 있던 작은 문방구들. 그 문방구 아주머니와 아저씨 분들은 모두 어디로 가셨을까? 한아름문구사, 김혜수문구점, 대왕문구점, 몇몇 간판들이 생각난다. 100원이면 팔만 움직이는 로보트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 1500원이면 본드로 조립하는 완구 구매가 가능했고, 3천 원, 5천 원이면 정교한 톰캣트 전투기나 에어울프 헬리콥터 같은 것도 살 수 있었다. 용자 라이덴, 쟈크 2, 아졸바, 철인 28호. 이런 플라스틱 친구들이 있었지. 딱지도 있었고, 뱀주사위놀이, 에디슨과학, 아카데미과학, 사다리, 코끼리. 이런 업체들이 있었다. 졸리게임이라 불리는 보드게임들. 오백 원짜리 해적판만화책. 10원이면 슈퍼에서 껌하나를 낱개로 구입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고, 껌봉지에는 판박이 스티커가 있던 시절이었다. 슈퍼에서 사 먹는 과자류에도 완구가 함께 동봉되었던 때였으니 문방구는 아이들로 북적이는 어린이 세상이었다. 그 많던 문방구가 이곳저곳 지하와 지상에 어두컴컴하게 자리하던 오락식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얼마 전 공덕동의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문방구'라는 간판이 붙은 문방구를 보고 어찌나 반갑던지.
대동책서점, 서울책서점, 통인문고, 동네에 있던 작은 서점들의 간판. 동아백과, 표준백과, 치크백과, 다양한 아동용 교육사전, 수학과 국어 문제집은 물론 다이나믹콩콩코믹스, 소년중앙, 보물섬, 만화왕국. 이런 만화책과 아동잡지를 구입하던 때부터, 학생과학, 컴퓨터랜드, 게임라인, 키노, 스크린, 키키, 유행통신, 쎄씨의 청소년 시절. <드래곤볼>, <괴도세인트테일>, <러브러브> , <뱀프 1/2>, <캠퍼스러브스토리>, <명탐정 코난>, <원피스>. 그런 만화류를 구입하던 서점이 있었다. 때로 학교 인근 서점들은 문제집이나 도서류를 함께 판매하거나 심지어 '길보드 차트'라 불리던 불법복제 음반테이프를 팔기도 하였다. 97년 일본문화 부분 개방으로 애니메이션 관련 가게가 학교 앞에 자리하기까지 학교 인근 서점과 문방구들은 학생들의 유행을 좌우하던 아동-청소년 문화의 메카였던 곳이다. 광화문에 자리한 대형 서점들도 변화를 겪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종로에 있던 오랜 서점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언젠가 국문학-인문 서적들이 책장 두세 개로 줄어들더니, 근래에는 1칸에 모두 들어차게 되는 형편이 되었다.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출간된 웹툰 만화와 쇼핑몰을 연상케 하는 전자기기 매장. 슈퍼마켓에 있던 '종합선물세트'의 구성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서점과 문방구는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온라인에서 책을 사고, 무인가게에서 문구류를 구입하며, 쇼핑몰에서 완구류를 사는 2024년. 지금의 아동들과 10대 청소년들은 어떤 추억을 어디에서 쌓고 있을지. 떡볶이 대신 마라탕을, 뽑기 대신 탕후루를 먹는 친구들과 만들어가는 아이들에게는 훗날 마라탕과 탕후루가 기억 저편의 아이템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는 이제 황학동 풍물 시장과 인사동 골목에서 아무 말 없이 그 시절을 노래하고 있다.
서점과 문방구는 주인과 손님으로, 같은 학교 친구로 '교류의 장'이 펼쳐지던 곳이기도 했는데, 이제 무인가게들의 키오스크가 그 교류를 대신해 주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사도 무인, 문구류를 사도 무인이다. 어쩌면 가게 주인이 키오스크 자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때로 아이들은 CCTV앞에서 무인가게 안에서 절도와 같은 범죄, 일탈을 행하기도 한다. 가게에 주인이 있다면 적어도 '대화'가 있었을 것이다. 말없는 가게에서 아이들은 말없이 어둠을 만나는 것이다.
서점과 문방구는 정부 정책으로 생겨날 수 있는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시절의 틈바구니에서 피어나던 '잡초'와 같던, '야생화'같은 들풀이고 들꽃이었다. 골목이 대단위 단지로 바뀌어버린 2024년. 골목문화도, 반상회문화도, 옥상문화도 사라진 마을 공동체에는 서점도 문방구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온라인쇼핑몰과 복합쇼핑몰이 자리할 뿐이다. 아이들은 쇼윈도의 잡지들, 쇼윈도의 알록달록한 장난감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의 이미지에만 눈을 앗긴다. 두뇌계발과 무서운 형들이 공존하던 오락실이 사라진 것처럼. 빛의 공간이던 서점과 문방구도 사라지고 말았다. 2,30대들이 찾는 힙스터들의 독립책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큐알코드로 구매를 대신하는 무인문구점을 이르는 것도 아니다. 오늘 수업은 어땠느냐고 물어보는 아저씨가 있던, 그거 요즘 유행하는 샤프라고 알려주시던 아주머니가 계시던 그 서점과 문방구를 말하는 것이다. 뽑기 방의 뽑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챠퐁의 뽑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드르륵드르륵, 옹기종기 모여 서로 무엇이 나왔는지 비교하며 다투기도 하던 문구점 앞의 뽑기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제 껌포장지에서 판박이 스티커를 볼 수가 없다. 추억의 풍선은 8,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모두 터지고 말았다. 지구에 서점과 문방구가 사라지고 있음이 기후위기 못지않은 문화위기는 아닐까 싶다. 2024년 2월. 일본 요코하마 롯카쿠바시 상점가에서도 80년대 느낌의 문방구는 고령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단 한 곳이 전부였다. "할아버지, 철인 28호가 있을까요?" 마흔이 훌쩍 넘은 청년이 묻자, 80대 할아버지는 30대 청년이 되어 이렇게 답해주셨다. "자, 그건 여기, 여기에 있어!" 동네서점과 동네문방구는 어디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