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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Apr 08. 2024

그런 생각

'흐름'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옛날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문처럼. 어떤 물리학자는 '과거'라는 것은 없고, 다만 '기억'이 있어서 그 기억으로 인해 '과거'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물리적이거나 물리학적인 대상이 아니다. 다분히 일상적인 개념이며 시간에 대한 측정 단위이기도 하다. 시간을 평행선으로 보아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이 시간여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니 과거, 현재, 미래는 허상이며 허구의 대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시제와 같이 언어문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비가시적인 개념이며 상당히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물리학에서 '없다'라고 단언하면 정말 과거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과거는 존재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찰나마다 '과거가 되어버리고' 만다. 기억은 두뇌의 어느 곳에 전자정보처럼 저장된다. 


나는 받아들이는 죽음이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이 있지 않은가 한다. 죽음은 시간을 멈추게 만들고, 과거에 종속되게 한다. 받아들일 수 있는 죽음이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정서 문제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선명하고 분명한 미래 운명 하나를 부여받는다. 그것이 곧 '죽음'인 것이며, 소멸에 관한 것이다. 어렵게 연명하던 노인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미디어 지인은 그가 '재미없게 살다가서' 불쌍하다며 눈물을 훔쳤다. 혼인을 앞두고 거리를 함께 걷던 커플이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부모와 함께 물놀이를 온 아이가 부모 모르게 숨을 거두기도 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질병으로, 사고로, 폭력으로, 범죄로, 각기 다른 사유로 인해 저마다 다른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생애라는 흐름의 끝자락이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심리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죽음충동과 다르지 않다. 살인과 자살은 동의이음어가 아닐까. 타자의 생 흐름을 끊고 싶다는 충동, 자신의 생 흐름을 멈추고 싶다는 충동. 보편적인 시각에서 비뚤어지고 잘못된, 그릇된 이 충동은 폭력적인 죽음을 불러온다. 안락사 역시 이러한 충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존재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부재가 도리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물리계의 이야기로는 해소될 수 없다. 부재가 자연스럽다면 존재는 어째서 존재하는가? 왜 멸로의 저항으로 생이 놓이는가? 


무언가의 탄생은 그만큼의 위험과 죽음을 전제로 한다. 반드시 시작은 끝을 전제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탄생과 함께 소멸에 이르는 흐름을 재촉한다. 자녀가 먼저 소멸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부모는 자녀의 잉태를 자신의 생명과 교환하듯 이러한 흐름을 갖는 것이다. 후손은 남지만 조상은 떠난다. 그 후손 역시 이러한 생과 멸의 순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과 멸사이에 놓이는 것이 불안과 공포이며 이것이 그릇된 방향을 타게 되면 '폭력'이 된다. 규모에 따라 그것은 테러 혹은 전쟁이라 불리기도 한다. 생애는 어마어마한 위험을 떠안는 것이다. 이 위험을 납득하고 이해해 보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역학, 역술, 점성술 등의 오컬트적 행위이다. 샤머니즘을 통해서도, 애니미즘을 통해서도, 제도 종교를 통해서도 납득과 이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흐름은 '영원한 괴력난신'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숙명인 것은 그 대상이 알 수 없는 괴력난신인 까닭이다. 상처에 붙인 연고와 반창고처럼 신문지면의 '오늘의 운세'를 보며, 타로 점을 보며, MBTI를 분석하며 우리는 정신과 마음의 괴력난신을, 운명이라는 괴력난신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보다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의 사이를 '장사'로 이용하는 것이 오늘날의 '힐링'서비스들이다. 다양한 카운슬링과 카운슬러, 오만가지 상담과 치유가 사실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다. '자기 계발'로 분류되는 것 역시 생과 멸 사이의 불안과 공포를 주요 고객으로 삼는다. 이들의 강연과 서책은 '부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리분석은 말로, 신경정신과는 화학적 약으로 때로는 수술을 통해 '부적'과 '굿'을 동원한다. 기독교와 불교 역시 무속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들의 콤플렉스이다. 인간은 괴력난신을 이해해 보려고 귀를 만들고 신을 만든다. 그리고 나아가 과학을 만들고 숭배한다. 


어떤 이성과 과학(이공과학만 과학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역시 과학이다.)도 이 괴력난신을 해설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 자신이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괴력난신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더라도 괴력난신을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신의 피땀으로 이루지 않은 손쉬운 이익과 소득은 티끌처럼 빠져나가고 사라진다. 스스로 헌신한 적이 없기에 더욱더 쉽게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다만 나는 '마귀'라는 것이 현존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악마, 마귀, 사탄, 귀신, 괴물, 요괴, 무엇이라 부르거나 이 어두운 존재는 허구나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 마귀들도 공존하는 것이다. 

흐름과 운명이 있다고 하여도, 이공학적으로 그런 것이 없다고 하여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흐름과 운명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네'라는 타령은 마귀의 탄식이다. 이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어쩔 수 없는 괴력난신을 수용한다.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겠다는 기복신앙이 아니다. "도대체 왜 이러시나이까"할 만한 그 괴력난신을 받아들여가는 과정이 성숙이고 숙성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옛날 옛적에 가 된다. 


모든 순간은 모든 시간은 모조리 '옛날 옛적에'이다. 시커먼 우주에 푸른 점 하나 지구가 있었다는 것 역시도 언젠가 우주 공간 속 '옛날 옛적에'가 될지도 모르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대부분의 범박한 범인이자, 소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럴듯한 샤먼을 찾고, 하다못해 챗GPT에게 물어보기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오라클도 이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응답할 수가 없다. 


과거가 단지 '기억'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그 기억을 붙들며 '리멤버 미'를 노래하는 것이다. 

잊어버려도 어디엔가 그 기억은 잔존하게 된다. 다만 그 파일을 불러들이지 못할 뿐이며, 포렌식조차 불가할 뿐인 것이다. 


옛날 옛적에... 는 그리움의 주문이다. 이 주문을 외우면 우리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그랬지, 그런 시절이 있었지. 없었던 것이 아니지! 하고 말이다. 졸졸졸 흐르는 지금을 우리는 애틋하게 여겨야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사람의 생애는 애틋하다! 주사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구르고 있다. 옛날 옛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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