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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Apr 18. 2024

사고의 수면

알베르 까뮈, 캐서린 앨렌 생떼, 그리고 뽕띠


  잠이 깜빡 들었다. 꿈에 아버지가 등장했다. 원래 살던 집의 베란다 부분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채 텅 비어 있었다. 8살 때부터 쓰던 책상이 조각만 남겨놓고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에게 성을 냈다. 도대체 내 오래된 책상과 베란다가 어디로 간 것이냐고! 그리고 깨었다. 깨고 나서야 꿈인 줄 알았지만 박살 난 베란다는 총천연색으로 선명한 풍경이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듯하였다. 생전 어머니는 꿈에 등장하셔서는 미국으로 땅을 사러 간다고 하셨던 적이 있다. 땅을 확장하는 어머니와 땅을 박살 낸 아버지. 그것은 내 꿈에 등장한 부모의 잔영(殘影)이다. 신체가, 몸뚱이가 잠에 채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생각의 '조각모음'이 꿈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시리즈로 꿈을 연달아 꾸기도 하고, 일전에 꿈에서 나왔던 장소에 다시 가보기도 한다. 꿈에서 맴도는 운명은 실존에 있어서도 맴돈다. 이 회전이 공회전이, 그만 무의미와 부조리의 돌고 도는 팽이와 같다면 허망과 허무는 우리의 들숨과 날숨이 아닐까. 잠시 기이한 신화를 보자.


신들은 시지프에게 끊임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과하였다. 그러나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다시 산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무익하고도 희망 없는 일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것이었다. (중략)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내버려 둔다!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인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뛰어난 성실성을 가르쳐 준다. 그도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그 후부터 주인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불모의 것도 하찮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산의 금속적인 빛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알베르 카뮈著 · 이가림譯, <시지프의 신화>, 문예출판사, 1996, 158~163쪽.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와 캐서린 엘렌 생떼(Catherine Hélène Sintès, 1882-1960) 둘은 모자(母子)이다. 좋을 호(好)의 형상처럼. 까뮈는 이방인(L'Étranger, 1942)에서 "오늘 엄마가 죽었다(Aujourd’hui, maman est morte.)."라고 운을 떼었지만 청각장애가 있던 까뮈의 엄마는 그때 온전히 살아계셨다. 교통사고로 마흔여섯에 운을 달리 한 아들 알베르. 이들 모자는 피에타(Pietà)의 성모와 예수가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엄마(maman) 캐서린은 8개월 후 아들 곁으로 간다. 소설에서 어머니(mère)가 아니라 엄마(maman)라고 붙인 호칭만큼이나 알베르에게 캐서린은 세상 전부였다. 캐서린에게도 알베르는 세계였으니 그 상실은 소설가의 외침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울부짖음을 할 수밖에 없는 아들 잃은 어머니의 것이리라.(소설가의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되어있지만 이는 거짓이다. 그 진실은 의료계의 비밀이다. '마취과 의사'였던 아들과 주변 동료들만이 진실을 안다.) 까막눈이자 귀머거리인 엄마를 사랑했던 문학청년은 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엄마와 이별을 해야 했다. 이것이 까뮈에게 내린 신의 형벌이었을지. 시지프는 데구루루 굴러오는 바위를 정상 꼭대기에 '원위치' 시켜야 하는 노동을 영원히 반복한다. 이것은 신들이 그에게 부여한 형벌이었다. 듣지 못하는 엄마를 듣게 하고, 읽지 못하는 엄마를 읽게 했던 아들은 그가 좋아했던 담배처럼, 담배연기처럼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게 되었다. 아들이 몸을 잃어버리자, 어미도 몸을 잃는다. 서로를 잃은 것보다 더한 극형이 어디 있으랴. Cookstr.com의 창립자 윌 슈발브(Will Schwalbe)는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The End of Your Life Book Club)>을 통해 모자가 함께 읽었던 책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것이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추모였을 것이다. 화가 김점선(1946~2009)에게 태블릿을 건네며 디지털 페인팅을 가능하게 했던 아들. 그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 모든 세상의 그림을 잃었을 것이다. 동화작가 정채봉의 동화세계에는 늘 '스무 살'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매월당 김시습의 방랑은 세조의 단종폐위가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된 발걸음이었다. 이 아들들에게 어머니는 세계 자체였고, '아들'이라는 인간의 언어는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세계가 없으면 이들은 그만 '비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니 그 사이에 부조리가 놓인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와 정반대로 자유의 토대를 세계의 선(先) 실존에서 발견합니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계속 무화하는 주체예요.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지점을 무화하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체이고, 자유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세계 안에 토대를 두고 있는 나를 부인할 수 없다고 봐요. 세계는 나의 자유, 주체의 전개의 개시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자유는 벗어나려는 자유예요. (중략) 메를로-퐁티도 이런 방식으로 내 집, 내가 속한 사회, 내가 자라온 곳 즉, 세계 안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 거예요. 반면 사르트르는 세계에서 벗어나는 게 자유롭다고 생각한 거고요.

철학아카데미編,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동녘, 2017, 정지은(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62쪽.


  모리스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데카르트와 달리 생각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갖고 있기에 존재하며, 세계는 모든 것에 선재해 있음을 받아들인 현상학자이자 철학자였다. 흔히 이야기는 집을 떠나야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설화학자 신동흔 교수도 민담 주인공의 영웅성은 이러한 '독립성'과 '자립' 그리고 '집을 떠나는 출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하지만 사실 옛이야기의 핵심중추는 집을 떠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것에 있다. 데까르뜨는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자유롭다고 생각하였지만 뽕띠는 세계-내-존재일 때라야 자유가 유효하다고 보았다. 세계 밖은 공기 없는 우주처럼, 무자유, 비자유의 비세계가 아닌가? 오늘도 생각이 그만 잠에 들기 시작한다. 예수를 재우는 것은 성모일 것이며, 까뮈를 재우는 이는 캐서린일 것이다. 생각이 새근새근 곤히 잠들면 신의 정령이 활동을 시작한다. 우리는 부조리에서 조리를 만들고, 무의미에서 의미를 만드는 생명체들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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