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뒷골목을 마치며
어린 시절에는 마을에 골목이 참으로 많았다. 혈관처럼 이곳저곳을 골목이 이어주고 있었기에 온 세상이 골목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할 정도였다. 생각에도 골목이 있을까? 흔히 딴생각이라고 하는 '샛길'이 머릿속에는 너무도 많았다. 하여 브런치 매거진의 테마로 삼아보리고 했던 것이 <생각의 뒷골목>이었던 것.
외조모의 손을 잡고 재래시장에 들어서면 천막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곤 했다. 부침개, 번데기 등을 사주시곤 했는데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간 시장골목의 재미는 상인 분들이 파는 물품만큼이나 다양했다. 그 시절의 냄새와 소리가 아직도 동네 시장에 남아있지만 규모는 예전만 하지 못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간 수입상가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외제 캔디, 초콜릿, 그리고 다양한 영양제, 사물들. 이제는 두 분을 손을 잡지 못하지만 외손과 장자는 여전히 골목을 해 집고 다닌다.
보행기에서 세 발자전거로, 보조바퀴 네 발 자전거에서 두 발자전거로 그리고 네 바퀴 자동차로 내 몸을 이동시켜 줄 수단은 세월 따라 변했지만 변함없는 것은 다만 나의 두 다리이다. 야광운동화부터 주황색부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발을 거친 내 발은 지금도 동네방네를 다니는데 문제가 없다. 다만 이제 적지 않은 나이인 탓에 전에 비해서는 힘에 부치는 면이 조금 있다. 그래서 쉬어가는 베이스캠프가 늘었다.
나에게 기억과 추억은 거대한 대로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좁고 협소한 골목들 사이사이에 숨어있다. 그 골목의 실공간은 굴레방다리의 언저리일 수도 있고, 중림동 약현골의 어딘가 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재개발과 부동산투기 붐이 지나는 곳에도 아직 골목이 돌담의 야생화처럼 살아있다는 것에 안심한다.
Cogito, rego sum. 데까르트의 한마디처럼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는 생각에 앞선다. 존재하고 있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비존재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마음은 반드시 몸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넋과 혼이라는 것도 육신을 갖고 있을 때라야 가능하지 않는가? 더 이상 몸이 없다면, 존재가 없다면, 넋도 혼도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닐지. 생각은 달리 표현하면 '기억'이고 '기록'이다. 이로 인해 생각을 통한 '소환'이 가능하다. 비존재를 떠올리는 순간 비존재는 다시 육신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먹고 말하고 무언가 입고 벗을 수 있으며 배설이 가능한 냄새나는 존재. 아 배고프다 먹을 것 좀 다오. 했다는 부활 후의 예수처럼 육신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기억을 통한 상상에서 뿐이다. 우리는 몸을 잃게 되는 순간, 생각을 잃게 된다. 정말로 생각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몸이 없을 때이다. 아직도 생각이 있다는 것은 몸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어디에 붙들려 있는가? 그 붙들림의 대상이 참으로 중요하지 않은가 한다. 밝은 대상도 있을 것이고, 어두운 대상도 있을 것이다. 밝은 것에 붙들리거나 어두운 것에 붙들리거나 우리는 그 붙들림에 시달림을 받기도 한다. 감사도 불평도 사랑도 미움도 모두 생각에서 온다. 그리고 그 생각과 감각에 따라서 몸도 영향을 받고 이동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때리는 것에 익숙한 몸과 생각이 있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맞는 것에 익숙한 몸과 생각이 있기도 하다. 그 사이에 '폭력'이 놓인다. 그 너머에는 보다 고차원적인 '평화'가 놓이기도 한다. 생각을 속이면 몸도 속게 된다. 그것이 긍정적일 때에는 플라세보가 되기도 하지만 부정적일 때에는 착란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어서 머리 밖으로 끄집어내어 볼 수도 없고, 감각되지도 않지만 분명 신경회로 어딘가를 오가는 빛보다 빠른 그 녀석이 곧 '생각'이다. 갈대처럼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암석처럼 단단히 정박하기도 한다. 그것은 성향과 경향을 이루고 성격을 만들며 인격을 형성한다. 염기서열의 유전인자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인류라고 하는 동물이 이루어낸 진화의 성과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뒷골목에는 골목대장이 있으니 그 대장님 이름이 '생각'이다. 생각은 우리의 시선과 청력과 미각과 방향을 모두 장악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이르고 싶은 곳을 향한다. 운명의 방향타는 '생각'이다.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기도 하고, 생각하지 못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좌뇌 우뇌는 부지런히 생각을 옮기고 또 옮긴다. 수면 중에도 생각의 조각을 모을 정도이니 말이다. 흔히 생각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유명한 조각이 하고 있는 '포즈'는 사실 고뇌이다. 고통을 생각하고 있기에 그의 포즈는 자세히 볼수록 부자연스럽다. 번뇌의 고통. 삶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 역시 '생각'에 달린 것이다. 해석은 생각의 산물이다.
우리의 삶은 '좋아요'/'싫어요'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생각에 달렸다. 우리의 인생은 '댓글'이 아니라 생각에 달렸다. 자신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무엇을 담아두고 있는지, 무엇을 '줍줍' 줍고 있는지, 그 수집한 것에 따라 우리의 자화상은 변화한다. 이 변화무쌍한 골목대장의 머리 위에 설지, 발밑에 복종할지 여부는 신만이 아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복잡 미묘한 것인데, 실상은 단순한 것이다. '의지'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의지'를 넘어서는 '습관'으로의 관성이 있다. 자꾸만 반복하게 되는,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것. 그것이 당신을 장악한 골목대장이다. 공자가 이르지 않았다는 괴력난신 역시 생각이 아닌가 한다. 생각만큼 괴력난신한 존재도 없다. 그 정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생각. 그럼에도 그 괴력난신은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뒷골목을 배회한다. 이 녀석의 움직임이 범인을 만들기도 하고 위인을 만들기도 한다. 선과 악도 이 녀석의 자취이다. 윤리의식도, 성취도 모두 이 녀석에게 달렸다. 꿈과 욕망 그리고 탐욕이 모두 이 '놈'의 짓이다. 그리고 그 '놈'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이 생각인 것이다. 옛 성현들도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라고 했다. 자신을 다스리기가 타인을 다스리기보다 힘들고 버겁다고 하였다. 그것은 생각을 다스려야 하는 탓이다.
생각을 다스리는 방법에는 '행위'가 있다. 이것은 '실천', '실행'을 말한다. 행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대로 행하기도 하지만, 행하는 대로 생각하기도 한다. 생각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뒷골목의 풍경을 바꾸겠다면 곧 생각을 바꿀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어보는 것이 더 이로울 듯하다.
딴생각의 기록을, 잡념의 기록을, 그 일부를 이곳 브런치에 남겨본다. 그럼에도 생각은 포획된 적이 없다. 언제쯤 뒷골목의 골목대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