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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Apr 12. 2024

아무 생각

유산의 흔적에 관한 단상


외조부는 부채가 되셨고,

외조모는 이불이 되셨고,

엄마는 담요가 되셨다.


소요산보(逍遙散步)를 또 하나의 별호(別號)로 삼으련다.


오늘도 나는 생각과 마음의 산과 언덕과 들판을 유유자적 거닐고, 걸음걸음을 옮긴다.

'없음'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으면 '있음'에 대한 상상이 되곤 한다.


서소문 밖, 경기중군영 자리 너머의 땅 언덕 언저리는 지리적 좌표가 아니다. 그것은 심상지리의 좌표이다.

천마산 능선 아래에서, 함춘원 자리에서, 새문안로의 언덕에서, 그렇게 호흡이 었지만

그것은 다만 몸의 호흡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몸'을 중시했던 철학자이며 현상학자였다.

신체성은 '전부'일지도 모른다. 정신도 몸에 담기기 때문에 몸은 정신의 그릇이다.

하지만 몸성만이 전부라면 넋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소요산보는 부채를 들고 이불바다에서 담요배를 타고 논다.


다섯 살 무렵에 서예학원을 다녔다.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서면 백발 할아버지가

붓을 잡게 해 주셨다. 무엇을 썼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를 않는다. 다만 붓질을 했다는 것이 기억의 전부이다.

다섯 살 묵의 붓질은 열아홉에 수채화 붓질로 옮겨갔었다.

플럭서스가 될 뻔한 오단계라는 미술학원에서 나는 석고상 데생과 정물 수채화를 그려야 했다.

습유서실도, 완미당도, 소요산보도 모두 그런 것의 흔적이다.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른다.

다만 내가 물려받은 부채와 이불과 담요는 그것이 나를 별세계로 이끌어줄 유일한 방주라는 것.

다만 그것을 아는 것이 전부이다.



실제의 옥녀봉에 가더라도 심상지리의 강경이 펼쳐질 것이고, 거기에는 메뚜기 잡는 소녀가 있을 것이다.

구름을 잡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강인순 할머니도 계실 것이다.

덕분에 손녀는 강인해졌다.


나에게 유산은 505호에 온 강경 젓갈 할머니의 새우젓 냄새에 있고,

네 살 무렵에 처음 본 505호에 걸려 있던 양반탈의 미소에 있다.

505호는 지금 '허공'이 된 지 오래되었다.


닭이불과 악어칫솔이 함께 걷는다.

야광운동화를 신고, 훨훨 날아본다.


나는 '소요산보'인 것이다.


이 세상에 누가 부채와 이불과 담요를 물려줄 것인가.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소녀가 있었고,

70년대에는 아가씨가 있었다면

80년대에는 어머니가 계시다.

2020년대에는 할머니가 된 어머니가 계신다.


강경과 대구와 서울과 평택

그 네 곳의 꼭짓점을 외손과 장자가 이어 본다.

나에게 별자리는 시커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아란 땅 위에 그려진다.

강경-대구-서울-평택

이것이 소요산보의 별자리이다. 이를 '어머니 자리'라고 부른다.

소요산보의 아들 자리는 서울-부산-대전-아산-안동이다.

어머니 자리와 아들 자리가 밤하늘을 수놓는다.


AFKN으로 '다이나스티'를 보던 여신은

아들의 한마디를 듣는다.

'온더, 훕훕, 했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는 뜻)

올림픽을 올림핑으로 발음했던.

아비가 쌀가마니를 들면 울었다던

눈이 파아랬다는 아가는

별자리를 바라본다.


연분홍 욕조에 장난감 배들이 띄워지면

그곳에 파도가 일기 시작한다.

석유난로가 하늘을 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림동에는 자동차를 탄 모자가 있다.

용산을 향하고, 이촌을 향할 것이다.

Gate14로 가기 위해서 그렇게 달린다.



누가 나를 '소요산보'라고 지어주었는지 모른다.

나는 다만 생각의 언덕을 넘고 넘는다.

삼만리를 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가을 들판을 바라보며, 낡은 가죽가방과 해바라기의 비명을 보며

재의 수요일을 보내는 여신이 그곳에 있다.

홍옥을 들고 홍시를 들고 서 계실 것이다.


나는 마술부채와 마술이불, 그리고 마술담요를 안고 있다.

파스포장지로 만든 실패가 유산의 하나이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이다.

금융자산에 포섭되지 않는 대상들이다.


행당산의 5층 515호에서 소요산보는 자판을 누른다.


이제 그만 백부가 되어버린 아가는 여전히 보행기를 탄다.


언젠가 소풍에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울음을 터뜨렸다.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몸이 없다고 넋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넋을 붙드는 것이 바로 샤만이다.


샤머니즘은 굿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당의 전유물도 아니다.

참 샤머니즘은 기억과 추억에 있다.

떠올리는 순간 넋이 살아 숨 쉰다.


부채와 이불과 담요로 이어진다.


소요산보는 음유시인이다.


나무를 붙들고 노닌다.

감나무 한그루.


그립고 보고 싶거든 거울을 보렴.

거울 속에 모두가 있단다.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보며

내 코로 맡는다.

내 입을 통해 말한다.

내 손을 통해 붙잡고

내 발을 통해 이동한다.


사람의 역사는 모두 한 편의 시다.

우리는 알고 보면 시의 주인공인 것이다.


오늘의 시를 통해 나는 이름을 얻었으니

소요산보이다. 이제 꿈속을 거닐게 되리라.




號)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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