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km (트랙 20바퀴)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다. 한낮에 35도까지 올라갔고 저녁 8시에도 기온이 30도였다. 햇살도 뜨겁고 습도도 높았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도 밖에 나가서 달리기를 해야할까..?'
잠시 고민했다.
다음주에 "우리 가족 10km 마라톤"을 하는 날이어서 이번주는 8km를 뛰면서 장거리 달리기에 적응하고 체력과 정신 무장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아이들을 잘 다독여서 같이 나갈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큰 아들이 먼저 물어봤다.
"아빠 오늘은 8km 달리는거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3주 연속으로 동생을 이기면서 달리기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것 같다.
'어차피 더운 날씨, 운동장에 가서 땀을 시원하게 흘리고 오자'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동안 학교 축구 시합으로 달리기 훈련을 함께 하지 못했던 딸도 오늘은 함께 달리기를 하러 간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막내 아들 역시 별다른 고민 없이 같이 같다고 말했다. 오래간만에 다섯 식구가 총출동해서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지난주까지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는데, 오늘은 우리 가족이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더운 날씨에는 운동을 안하는것 같다.
출발하기 전에 큰 아들이 여동생을 조금 견제했다. 딸이 운동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하다는 사실을 온 식구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달리기 연습을 못했지만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지난주 등수에 따라서 딸이 1번 레인, 막내가 2번 레인, 큰 아들이 3번 레인, 아빠가 4번 레인에서 출발했다.
아빠의 목표는 40분, 큰 아들의 목표는 1시간이었다. 다크호스 딸은 예측이 안되고, 막내 아들 역시 얼마나 달릴 수 있을지 감이 안왔다. 출발 전에 큰 아들이 평소와 다르게 신발끈을 꼼꼼하게 묶으며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동생을 경계하는 모습이 계속 보였다.
출발을 한 후에 아빠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달렸다. 40분 안에 들어오려면 호흡을 가다듬고 열심히 달려야 했다. 첫바퀴를 1분 40초에 달렸다. 이 정도 속도를 유지하면 목표로 삼았던 40분 안에 들어올 수 있을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 바퀴가 지나고 아이들과 격차가 조금 벌어져서 트랙 반대편에서 아이들이 달리는 모습을 봤다. 큰 아들과 막내 아들은 검은색 티셔츠를 입었고, 딸은 흰색 티셔츠를 입어서 멀리서도 누가 앞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딸과 막내 아들이 앞에서 달리고 10m 정도 뒤에 큰 아들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동안 달리기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던 딸이 제일 앞에 달리는 모습에 놀랐고, 누나와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는 막내의 모습에 또 한번 놀랐고, 맨 뒤에서 동생들을 따라가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에 정말 놀랐다. 아빠가 4바퀴를 달리고 나서 아이들을 한바퀴 따라잡았다. 아무 말 없이 큰 아들 옆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내 뒤통수에 대고 큰 아들이 말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달리기 힘들어"
셋 중에 열이 제일 많은 큰 아들이 더위 앞에서 컨디션이 별로 안좋아 보였다. 막내를 위해서 누나가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해주는것 같았다. 둘이 사이좋게 나란히 달렸다. 아빠가 7바퀴 즈음 달렸을 때, 아이들을 한 바퀴 더 추월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즈음에 큰 아들이 막내 아들을 따라잡았다. 여전히 딸이 2위로 달리고 있었다. 딸과 큰 아들은 50m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10바퀴가 지날 때까지 딸은 일정한 속도로 계속 달렸고, 큰 아들은 언제부터인가 100m를 열심히 달리고 다시 100m를 걷는 패턴으로 달렸다. 딸과 큰 아들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딸이 숨을 고르며 잠시 걷는 동안에 큰 아들이 여동생을 따라 잡기 위해서 열심히 달렸다. 둘의 차이가 좁혀졌을 때, 딸이 다시 열심히 달려서 오빠를 따돌리려고 하자 큰 아들은 숨을 고르며 걷기 시작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앞서 있는 딸은 재충전을 하면서 힘을 얻었고, 뒤따라 가던 큰 아들은 점점 지쳐갔다.
아빠는 조금씩 속도가 느려졌다. 중간즈음부터 한바퀴에 1분55초 정도 시간이 걸렸고, 나중에는 2분도 힘들었다. 마지막 2바퀴를 남겨두고 속도를 올리려고 했지만 잘 안되었다. 마지막 한바퀴를 남겨두고 시계를 보니 38분 10초였다. 힘을 내서 1분50초 안에 달리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승선에 도착해서 시계를 확인해보니 40분 4초(5분/km)였다. 숨을 고르며 아이들을 향해서 계속 달렸다.
큰 아들이 15바퀴(6km)를 달리고 나서 벤치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포기하려는 걸까...?'
여동생과 반 바퀴 이상 차이가 났고 막내 동생보다는 한바퀴 정도 앞서 있었기 때문에 잠시 음료를 마시기 위해 멈추었다. 잠시 후, 힘을 내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혼자만의 레이스를 마무리하고 결승선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 지나가는 딸과 막내 아들에게 음료를 주면서 수분 공급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운동장이 어두워졌을 때, 네 사람이 거의 나란히 달렸다. 딸은 마지막 한바퀴가 남았고, 큰 아들은 두 바퀴, 막내 아들은 세 바퀴가 남았다. 딸이 마지막 100m를 전력 질주할 때, 아빠가 나란히 달리려고 했지만, 따라갈 힘이 없었다. 딸이 57분 32초의 기록(7분 11초/km)으로 결승선에 도착했다.
바로 이어서 아빠는 큰 아들의 마지막 한 바퀴를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 큰 아들은 1시간 2분 31초의 기록(7분 48초/km)으로 결승선에 도착했다. 아빠는 막내 아들의 마지막 한 바퀴도 옆에서 나란히 달렸고, 다 끝나고 보니 달린 거리가 11.5km였다. 막내는 1시간 5분 57초의 기록(8분 14초)으로 결승선에 도착했다.
지난 4주의 기록을 보면, 거리가 늘어나면서 아빠와 큰 아들은 조금씩 속도가 느려졌다. 막내 아들은 2주차에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가 그 이후로 거리가 늘어나면서 오히려 속도가 빨라졌다. 다크호스 딸은 갑자기 나타나서 달리기 생태계를 어지럽히며 오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있을까?"
그동안 꾸준하게 훈련을 하면서 노력했던 큰 아들과 막내 아들이 한동안 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던 딸보다 뒤처지는 모습을 보면서 노력과 재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재능이 있는 사람을 이길 수 없나?"
내가 찾은 답은...
어지간해서는 이길 수 없다.
예를 들어서 내가 1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노력을 하며 훈련을 해도 킵초게 만큼 달릴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재능 = 타고난 능력 + 지금까지 땀 흘린 노력"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흔적에 노력이 깃들여있다. 오랜 시간 쌓아올린 노력으로 탁월한 재능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재능을 이길 수 없다.
우리 집에서 딸은 그동안 가장 열심히 운동을 하면서 뛰어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전종목 학교 에이스 대표선수로 시 대회에 나갔고, 학교를 옮기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최근에도 학교 대표로 축구 시합에 나가서 열심히 뛰었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훈련에 참여하지 못했을 뿐이지 다른 곳에서 계속 노력을 하고 있었다.
노력으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다. 각자의 출발선이 다르고 현재까지 달려온 거리가 다르기 때문에 나의 노력을 다른 사람의 재능과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진짜 경쟁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나'이다.
이제 한주 남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다음주 "우리 가족 마라톤 10km"에서 1등 상금 $100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궁금하다. 또 한번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