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아빠의 마음공부』첫 번째 외전-1
외전(外傳)을 시작할 참입니다. 헐... 그렇습니다!!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는, 무려 외전까지 풍성하게 스탠바이된 저작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어 주신 분들께 드리는 저자의 사은썰!! -- 외전 그 첫 번째 편의 1부.
첫 챕터는 <모비 딕>이었지요. 천하꼰대 독불장군 에이해브 선장. 이상하게 이 인물에게 마음이 쓰이곤 합니다. 잿빛 머리의 늙은 선장 에이해브 얘기를 좀 들려드릴까 합니다. 영화 「밀양」과 소설 『신들의 봉우리』이야기도 곁들입니다.
출근했더니 느닷없이 자기 자리가 빠져있더라고 해보죠. 40년을 근속해 쌓은 자리였습니다. 어떨까요?
울겠지요. 울다가 다짐하겠지요. 둘 중 하나죠. 1) 되찾겠다! 매일 날밤 까겠다. 어쩌면 부하 직원을 몰아붙일 수도, 가정과 친구를 내팽개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목숨 걸고 싸우겠다. 못 견디겠으니까! 2) 이번 생은 포기하겠다. 적절히 순응하고 타협해 다른 기회를 보겠다.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냐. 다른 소중한 것도 많아. 견뎌 나가는 싸움을 벌이겠다.
어느 쪽이신가요. 어느 쪽이 옳은가요? MBTI나 혈액형에 맞춰 하자구요? 40년 자리를.
대개 시키면 하기 싫어집니다. 지적 받는 것도 싫지요. 무시 당한 듯한 기분도 들고, 나를 멋대로 평가하고 재단한 듯해 상대가 미워지지요. 친구나 연인로부터 일방적으로 절연을 선언 당할 때 비슷한 기분이지요. 그건 아마, 나는 여전히 '나를 유보'하고 있는데, 상대는 이미 ‘나를 정해 버린' 기분 나쁨이랄까요?
납득하지 못한 이른 결말을, 스스로 바꾸고 실패하며 찾아가려 하는 우리 사이의 결말을 상대가 섣불리 지어 버렸다는 불쾌감입니다. 상대가 내 자리와 처지를 결정해버렸다는 모욕감일 수도 있구요. '나를 빼앗겼다'는 박탈감과 모멸감...
타당한 지적이나 올바른 관계 변화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근데 진짜 그런지는 참 쉽지 않지요. 느닷없이 불행한 신세에 처한 박탈감과 가혹한 처지로 내몰리는 모멸감 앞에 의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처지(운명)의 결정권'을 빼앗겼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살아내지 못합니다. 다 뺏겨도 다 뺏긴 나를 바라보는 자의식만은 살아남아 매일 뭔가 먹으려 드니까요. 자기연민, 분노, 조롱, 복수, 현실 부정, 자해 혹은 새롭고 위대한 개척 같은 걸로 허기와 갈증을 채우지요.
모비 딕에게 왼다리가 썰려나간 에이해브는 분노로 채웠습니다. 에이해브에게 섣불리 불굴의 의지와 위대한 인간 정신의 칭호를 덧씌우기 전에 저는 먼저 에이해브를 휘감은 분노의 심정으로 건너가 보고 싶었습니다.
에이해브의 심정을 거닐려다 보면 영화 주인공 한 명이 떠오릅니다. 배우 전도연에게 칸 여우주연상을 안긴 「밀양」(이창동, 2007)의 여주인공 신애 말입니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신애는 삶의 유일한 버팀목 외동 아들과 함께 삽니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이 유괴되는데 끝내 시체로 발견되지요. 세상의 달력 말고 창자의 달력을 넘겨야만 했던 신애는 주님을 영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찢어 죽여서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범인이었지만, 신앙에 힘입어 어느덧 용서의 탑을 짓는 숙제를 하려 합니다. 교도소를 찾아가 범인을 직접 용서함으로써 그를 구원하고 스스로 지옥을 벗어나겠다 결심합니다.
그런데 놈의 표정은 이미 온화합니다. 벌써 주님을 받아들여 회개했기에 주님이 자신을 용서해 주셨다고 하며, 다 같이 주의 은총에 감사하자며 미소 짓습니다.
신애는 쓰러집니다. ‘내가 아직 용서해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 내가 어떤 지옥을 견디며 용서를 결심했는데, 벌써 신이 구원을 줬다니!!’
자식을 앗아가더니 용서까지 빼앗은 자, 병 주고 약 주더니 결국 뒤통수를 친 자, 용서조차 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몬 자, 그러고서도 죄수 너머에 숨어 온화하게 웃는 자…. 가슴을 쥐어짜며 신을 저주합니다.
줬다가 뺐으면 기분 제일 더럽지요. 용서를 결심하고자 찢어낸 달력만큼 신애는 너덜너덜해집니다. 불륜으로 교회 장로를 유혹하고 기도회에서 신중현 밴드의 ‘거짓말이야’를 틀며 분노와 조롱과 복수를 쏟아내지요. 그녀를 위한 기도회 자리에 돌멩이를 던지며 쏘아붙이지요. “너한테 절대 안 져!” 하늘을 쳐다보며 손목을 긋습니다. “봐, 보여?”
에이해브의 유일한 버팀목이며 훈장이자 십자가는 황무지 같은 바다를 버틴 40년 자긍심이었죠. 그러다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던 향유고래에게 전부를 빼앗긴 처지로 전락했다고 여기지요. 텅 빈 자리를 채워야 했습니다. 하나이자 둘의 에이해브가 태어났습니다.
우선 놈을 찾아내 따지려는 의지였습니다. 막막한 대양 깊숙히 몸을 숨긴 새하얀 어둠 모비 딕을 찾아내 검은 눈동자에 빛나는 작살을 내리꽂아야 했지요. 그렇게 운명의 탑을 새로 지어야 했으니.
대양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깨어있는 에이해브의 정신은 밤늦게까지 램프 밑에서 일렁이는 해도에만 매달리는 집요한 의지로 가득찼습니다. 우연으로라도 놈과 마주칠 수 있는 지구의 모든 항로를 계산하는 동안은 살아있을 수 있었지요. 그 어떤 고통과 시련과 운명적 굴레에도 굴하지 않으려는 자유의지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신이 가한 불가항력의 운명 앞에서 스스로 새 운명을 세우려 했던 프로메테우스의 불굴의 자유의지가 그렇게 매일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또 한편, 해도에 매달리다 지쳐 잠이 들 때는 그 의지의 대가로 지옥 같은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괴로움과 분노의 변주는 즐거움의 변주와는 달라서 턱없이 질기고 끈적하며 격렬하게 ‘이불킥’되기 때문입니다.
낮 동안 에이해브를 짓눌렀던 생각은 격렬한 악몽으로 반복됐다. 온갖 상념이 불꽃을 튀기고 충돌하고 뛰어다녔으며 불타는 두뇌 속을 소용돌이치듯 돌아다녔다. 결국 고동치는 삶의 맥박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정신적 통증이 때때로 그의 존재 자체를 밑바닥으로부터 끄집어 올렸고, 그 벌어진 어두운 틈 사이에서 여러 갈래 불길과 번개가 난무하면 저주받은 악귀들이 그 속으로 뛰어내리라며 손짓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내면의 지옥이 밑바닥에서 아가리를 벌리며 펼쳐지고 나면 고독한 야수의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이 배 전체에 울려 퍼졌고, 에이해브는 불붙은 침대에서 도망치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선실을 뛰쳐나왔다.(모비딕, 44장)
악몽은 에이해브를 아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감싸 안고 견딜 수도 없었습니다. 토해내야 했습니다. 복수하지 못하면 자기는 그냥 더럽고 괴로운 쓰레기일 뿐. 신을 저주했습니다. “잘 보라구! 전능하신 신들은 고통받는 인간을 망각했는데,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인간들은 신에 대한 다정한 사랑과 감사로 가득 차 있구나!”(125장).
“구운 벽돌처럼 뜨거워진 베개”에 짓눌려 영원히 안 올 것 같던 새벽이 밝을 때마다 복수의 광기가 서린 영혼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신에 저항한 형벌로 바위산에 묶여 3만 년 동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인 프로메테우스의 비명 역시 그렇게 매일 다시 태어났습니다. 광적이고 집요한 3년 간의 도전은 에이해브에겐 자살이자 부활의 길로 여겨졌던 듯합니다.
에이해브를 생각하다 보면 떠오르는 두 번째 인물. 일본의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신들의 봉우리』 속 주인공입니다.
'한겨울 에베레스트 남서 빙벽 무산소 단독 등반’에 도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클라이머입니다. 낮 최고 기온 영하 40도. 쉴 틈 없는 크고 작은 눈사태, 희박한 산소 속 끊임없는 환각과 환청. 짐꾼도, 자일 파트너도, 산소 장비도 없이 신들의 자이로드롭 같은 세계 최대 수직 얼음벽을 피켈로 내리찍어 가며 정상에 오르려는 인물입니다. 성공한 인간은 없으니, 신과 인간의 능력 간 경계를 금 긋는다면 딱 이 등반일 듯합니다.
이 주인공이 에베레스트 정상 근처 해발 8,000미터에서 홀로 동사하면서 남긴 수기가 인상적이었지요.
자, 일어나.
체력이 한 방울이라도 남아 있는데 자다니 용서 못 해….
잘 들어. 쉬지 마. 쉬면 내가 용서 안 해. 용서 못해.
쉬면 죽는 거야. 살아 있는 한 쉬지 마.
내가,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 하나. 쉬지 않는다.
다리가 안 움직이면 손으로 걸어.
손이 안 움직이면 손가락으로 걸어.
손가락이 안 움직이면 이빨로 눈(snow)을 찍으며 걸어.
이빨도 안 되면 눈(eye)으로 걸어.
눈으로 걸어. 눈으로 가는 거야.
눈으로 노려보며 걸어.
눈도 안 되고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정말로 안 된다면 정말로 안 된다면 정말로, 이제, 있는 힘을 다 했는데 이제 안 된다면 정말로 안 된다면 안 된다면 정말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상상해.
온 마음을 다해 상상해.
이 인물의 이름은 '하브(Hab, 일본식 발음으로는 하부)'입니다. 제 눈에는 에이해브(Ahab)를 닮은 이름이었습니다. 확인할 길 없지만 유메마쿠라 바쿠의 숨은 의도려니 넘겨짚어 봅니다. 하브가 어째서 대체 무얼 빼앗겼길래 저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삶은 과연 어떤 가치인지, 혹 궁금하신 분은 한번 읽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소설 못지 않았던 5권짜리 만화도 있습니다.) 몰입감이 전율 치는, 산악소설의 최고봉이었습니다.
짧게 쓰려 한 외전편이었는데, 길어지는군요 ㅠㅠ 에이해브를 대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심정에도 건너가 본 이야기, 그리고 박탈감이나 모욕감 같은 고통에 젖기보다 그걸 성찰하는 태도와, 고통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좀 나눠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 편에 마저 ㅠㅠㅠ
지금까지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아빠와 아들을 잇는 관계 인문학)의 첫 번째 챕터에 대한 외전의 1편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벗작가님들~~
참참참... 네이버 지식섹션 메인에 방금 제 책 소개가 떴습니다. 메인에는 블로그 글 몇 개가 순환되며 노출됩니다. 혹 안 보여도 새로고침 하시면 보입니다. 살포시 하트 한번만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