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아빠의 마음공부』첫 번째 외전-2
경상도 사투리 능력평가시험 문항 4번.
대화 속에 언급된 ‘가스나’의 직업은?
‘끌베이가튼’ 머스마한테 실연당해 괴로움에 빠진 가스나가 있네요. 토닥이던 친구가 조언을 건네는 중이군요. “이제 좀 그만 질질 짜라.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 - 결국 ‘엥가이(적당히) 하고 말’ 괴로움이라는군요.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중 ‘모비 딕’ 챕터에 대한 외전(外傳)의 2편 시작합니다. 지난 편은 흰고래 모비 딕에게 왼다리가 잘려나간 늙은 선장 에이해브의 심경에 잠시 공감해 보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편은 에이해브의 괴로움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우리의 일상적 괴로움을 대할 때 혹시 힌트가 될까 해서요.
에이해브의 괴로움은 결론적으로, 겁나게 복잡해 보입니다. 우선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시선으로 평가해 볼까요. 에이해브가 당한 사고는 그저 레전드 고래를 잡아보겠다는 무모한 명예욕과 고래의 방어 본능이 합쳐진 결과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의연하게 산재 처리하고 내일의 태양을 맞으면 족할, ‘엥가이 하고 말’ 괴로움이랄까요.
오만과 욕심이 좌절되면서 뒤틀려 버린 개인의 피해의식을 신과 짐승의 탓으로 떠넘겼다고 평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감정적 변주는 헛되고 부당하며 위험하기까지 하지요. 선장의 싸움이 절박하면 선원의 수난은 감내돼야 합니까. 모비 딕의 머리를 따면 그 고통의 변주가 멈췄을까요. 몸속에 박힌 작살 때문에 미칠 듯 화가 나 피쿼드 호를 들이박은 건 모비 딕이라기보다 에이해브 자신일 지도 모릅니다.
근데 완전히 반대로 느껴질 때도 있더군요. 에이해브의 고통이 ‘엥가이 알아서 풀’ 개인적 고통만은 아닐지 모르겠구나, 그렇게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 평가가 그렇습니다. 에이해브의 괴로움은 종종 19세기의 야만적 서구 문명에 대한 절규를 상징한다고 평해집니다. 교회 지상주의에 장악당한 국가에 의해, 개인을 억압하는 은밀한 그물망 같은 거대한 제도에 의해, 물질문명의 안락한 오만에 젖어가는 시대에 의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자연의 위력에 의해 결국 찢겨 나간 한 인간…. 거대하고 부당한 외부 힘에 상처 입은 개인들의 가혹한 처지를 대변한다고 평해지지요.
시대 배경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에이해브의 고통에서 보편적 동질감이 느껴질 때가 있더군요. 잘린 다리로 상징되는 극심한 박탈감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낯설기만 하던가요. 향유고래에게 다리가 뜯기는 사고가 흔한 일은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그런 종류의 고통이 특별히 운 나쁘고 어리석은 이만의 불행일런지요.
에이해브의 고통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질 때도 있더군요. 비극적 운명에 처했던 『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의 인상적 탄식이 떠오르니 말입니다. “너희들의 서러운 사정은 제 한 몸을 괴롭힐 뿐 남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나라 전체의, 나 자신의, 그리고 너희들의 슬픔을 내 한 몸으로 당하고 있구나.”
저자 허먼 멜빌은 에이해브 한 개인의 고통을 빌어, 모비 딕을 평범한 사람들이 늘 겪는 무수한 괴로움과 슬픔과 분노의 총량을 한 번에 폭발시킬 대상으로 삼았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도 떠오르네요. 에이해브는 우리가 매일 매일 나눠 겪는 일상의 고통을 한순간의 극심한 고통으로 대신 겪은 비운의 영웅은 혹시 아니었을지.
에이해브의 고통이 몇 등급짜리인지 평가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일상의 괴로움 대부분은 물론 솔직히 제 괴로움마저도 마찬가지로 어렵더군요. 고통을 평가하는 일은 늘 그렇게 어려우니, 지난 편처럼 공감하고 토닥여 주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는 것일런지요. 괴로움의 정체는 왜 이다지도 모호한지요.
즐거움은 상급, 하급으로 나누기도 하던데, 괴로움은 등급을 매기기 쉽지 않은 이유. 그건 아마도 고통의 밑바닥이 아사리판, 그러니까 심연인 탓 아닐까 합니다.
얼핏 하나인 괴로움처럼 보여도, 지나가는 바람 정도인 번뇌와 다함께 연민할 가치가 있는 괴로움과 목숨을 걸고서라도 맞서야 할 고통, 그도 아니면 한낱 허세에 불과한 번민까지 한데 뭉쳐져 있지요. 개인사적, 관계적, 사회적 연원도 뒤섞여 있구요.
게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치더군요. 즐거움을 위해서는 뭔가 노력하고 기대하기도 하지요. 고통을 위해 노력하거나 기대하는 이는 없습니다. 에이해브의 다리가 한순간에 잘려나갔듯 고통은 예고없이 옵니다. 익숙해지질 않지요.
무례하게 들이닥치는 이 방문객은 심지어 주인 행세를 합니다. 하나 같이 절절하고 시급하다고 분칠한 채 칸영화제 주연상급 눈물연기를 펼치지요. ‘맞아, 내 감정은 소중하댔어’ 하며 안방과 거실을 다 내줍니다. 그러고는 온종일 찬바람을 맞으며 바깥을 서성이다 울기도 합니다. 특히나 매일 밤 에이해브를 급습했던 악몽처럼 지독한 고통들은 단번에 나를 휘두르는 폭군이 될 듯합니다. 그런 고통은 목적어로 바라보거나 다룰 수 없겠지요. 오직 주어로 군림할 듯합니다.
고통은 전할 수 없는 절대 고독 같기도 합니다. 아파서 괴로운 고통만은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지요. 오롯이 내 것으로 남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대중의 익명성 속으로 얼마든지 흐릴 수 있는 시절이라지만, 어떤 경우라도 내가 오직 나일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고유한 정체성. 그게 고통이더군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 말로 …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다. (밀란 쿤데라, 《불멸》, 민음사, 2010. 325p)
가령 사타구니가 차일 때는 우주 전체로부터 언어가 없는 곳으로 홀로 떠밀려나더군요. 극심한 생리통을 겪는 여성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폐동맥고혈압의 국내 최고 권위자라 해도, 1년 반 만에 귀국한 애인을 만났어도 숨이 가빠 키스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난치병의 고통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술자리에서 ‘너네는 몰라’ 하며 자기 고통 속에 갇히는 것. 괴로움은 그렇게 우리를 찢어서 오로지 '나'로만 갇히게 합니다.
고통의 파편화. 그게 고통의 치명적 위험이자 유혹이더군요. 누구는 허황된 괴로움에 홀로 허세 쩔고 누구는 어리석은 고통에 남몰래 연민하며, 또 누구는 어제를 괴롭히고 내일을 망설이며 제 자리를 천 번 맴도는 밤을 새다가 고슴도치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나로만 영원히 머물러 버릴 듯 두려워지더군요. 고립된 고통은 어두운 심연이며 영원히 외로운 터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저 공감하고 토닥여 달라며 때마다 휘둘릴 뿐이더군요.
누구나 자기 깊이만큼의 괴로움을 겪으며 지내기 마련이지만, 고립된 고통을 오래 겪는다고 사람이 단단해지거나 넓어지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자기를 좁히면서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긍지를 갉아먹어 가더군요. 갉아 먹히는 긍지는 종종 타인의 긍지까지 끌어내리려 하구요. 어떤 괴로움이든 외따로 떨어진 괴로움은 아사리판일 수밖에 없으니, 거기서 태어나고 변주된 것 역시 정체를 알기 힘들더군요.
자기 괴로움의 등급과 정체를 말하긴 힘들어도, 그 괴로움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참여해 서로의 고통을 연결시키는 용기. 다음 편에서 그런 이야기를 마저 정리해볼까 합니다. <모비 딕> 챕터의 외전 마지막 편이 될 듯합니다.■
이미지 _ NomeVisualizzato (Pixabay.com) / Joshua Kettle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