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첫 번째 외전-3
라면을 두 개 끓였고, 아직은 어린 남매 둘과 엄마가 붙어 앉았습니다. 세 식구 끼니로 두 개 끓였습니다. 한 개 값을 아껴야 했던 탓입니다. 먹는 내내 눈치를 봤습니다. 적게 먹으려고요. 엄마도 남매도 서로 배부르다 했습니다.
남매는 부모의 지인 집을 떠돌기도 했습니다. 아빠 사업이 쫄딱 망한 뒤로 채권추심 전화를 피하려구요. 기울어 가는 사업을 물려받아 안간힘을 쓴 아빠였지만 파탄을 막지 못했습니다. 남매는 어느 해 오천 원짜리 여름 티셔츠 한 장을 못 사 입고 사촌 옷을 돌려 입었습니다. 일을 수습하려 동분서주하던 아빠는 없는 듯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맨 엄마는 부채에 허덕였습니다. 싱글맘처럼 남매를 돌봤습니다. 어느 해 친정 언니네에서 더부살이를 벌인 덕분에 간신히 남매를 맡길 수 있었고 잠시라도 일을 나가게 됐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잇몸만 상하며 점점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엄마는 르완다 소년과 볼리비아 소녀를 오래 결연후원해 오고 있었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이 절절했던 지라 해외아동 결연후원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지 시름이 깊었습니다. 계란 하나 못 푼 라면이나마 1인분도 온전히 못 먹던 괴로운 끼니를 때워 온 남매가 답했습니다.
엄마, 우리가 돈 안보내면
그 형, 누나는 굶어서 배고프잖아.
죽으면 어떻게 해?
맞습니다. 천사 같습니다. 그렇긴 한데 천사 같다고만 하고 지나기엔 영 찝찝합니다.
돈을 안 보내면 굶고 굶으면 죽죠. 누구나 압니다. 근데 그 너머의 감정까지 담긴 대답 같아 보입니다. 1) 제일 먼저 ‘두려움’의 감정이군요. 어린 애들이지만 돈 없는 무서움과 그게 부를 고통을 전율스러울 정도로 확실히 느끼고 있네요. 2) 그런데 그 두려움이 이기심이 되지 않고 ‘남이 겪게 될 괴로움을 향한 동정심(연민)’이 됐습니다. 3) 마침내 후원을 계속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있구요.
1) 두려움을 느끼게 된 건 쉽게 이해됩니다. 느껴보면 느끼니까요. 2) 근데 ‘두려움이 이기적 집착이나 자기연민에 갇히지 않고 대체 어떻게 남의 두려움을 향한 동정심과 연민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가’는 참 어렵군요. 그걸 들여다보는 건 솔직히 좀 꺼끌꺼끌하기도 하구요. 그래도 암만 해도 찝찝해서 좀 들여다봐야겠습니다ㅠㅠㅠ
2)의 원리는 수학공식처럼 명료하질 못합니다. 괴로움은 누구에게나 심연 같으니 말입니다.
좀 돌려서 물어야겠습니다. ‘남의 고통에 동정심이 생기려면 뭐가 필요할까’로 말입니다. 평생 캐딜락 뒷좌석에 포옥 잠겨 샤토 마고 와인만 홀짝이던 이는, 결식아동이 스쳐 지나가도 절대로 진심 어린 연민으로 공감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굶주리는 두려움은 느껴봐야 느끼니까요. 오로지, 자신에게 닥쳤거나 닥칠 지 모를 두려움을 일부라도 느낄 수 있는 한에서만 남의 두려움을 내 두려움 같이 연민할 가능성이 생기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근데 자기 괴로움을 향한 예민한 연민을 느낀 이라 해도 남의 괴로움을 향한 연민으로 저절로 건너가지는 않더군요. 반대이기 십상이지요. '괴로움의 등급 매기기?'에서 보셨듯 자기 괴로움의 폭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얼마나 어렵던가요. 깊을수록 벗어나기 어렵고 떠올릴수록 끈질기더군요.
신체적 통증은 시간으로 흐려진다 쳐도 새겨진 상처는 겁나게 오래 가지 않던가요? ‘생각’은,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사라졌음 하는 상처를 분노와 혐오와 아픔의 이름으로 영원히 붙들어 놓지 않던가요. 대체 고통 한가운데 있는 이에게 생각이란 그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짐이던가요. 무한 반복 기억들의 집단 괴롭힘으로부터 마침내 한 발 내딛는 용기란 또 얼마나 초인적인 말인지요.
그게 그리도 어려운지라 괴로움에 푹 젖거나 그냥 토닥여 달라 하게 되더군요. 그조차 괴로워지면 외면해 보자 하구요. 외면은 집착의 뒷면 아니던가요. 괴로움은 그렇게 ‘나'만을 향해 집착의 채찍질을 가하고 몰입의 당근을 줍니다. 고통의 검은 양날이되 한쪽 날은 좀 더 서 있는 검이더군요. 자기 아닌 이들로 향하게 하기는커녕 그들이 자기만을 봐주기를 바라게 하지요.
3) 그런데도 두 남매는 결단했습니다. 자기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어쨌든 르완다 형과 볼리비아 누나에게 닥칠 두려움으로 눈길을 돌려 건너갔고 결연후원을 끊지 말자 결단 내렸습니다. 갇혀서 고립되기 십상인 두려움을 자기 아닌 이의 두려움과 만나게 했습니다.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를 짓누르던 두려움과 자기연민에서 어느 새 벗어나게 되는 일 말입니다. 남의 고통에 마음 아팠던 이 누구나 척 하면 안다는 일 말입니다.
어떻게 그리 되는지 보기 전에, 아리스토텔레스 흉아의 간지 좔좔 설명부터 들어볼까요. ‘비극적 드라마나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의 큰 슬픔을 보면서 마음 속 불안감, 우울함,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며 마음이 정화되는 일’을 ‘카타르시스’라 했었지요. 한 괴로움을 향한 연민이 또 한 괴로움을 향한 집착을 씻어 내리는 쾌감이라는군요. 고통과 슬픔을 진정 치유하는 건 또 다른 고통과 슬픔을 향한 연민이니, 누군가들의 더 큰 슬픔과 만나 넘치도록 울어야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음과 같은 원리입니다.
자기 고단함과 두려움을 끝내 감내하며 진심 어린 봉사로 헌신한 이, 그러니까 나만의 골방을 나와 수많은 너들의 고통에 미력한 한 몸을 보태며 모두에게 닥칠 지 모르는 보편적 괴로움에 참여하는 이가 느끼는 것도 그런 기분 아닐까 합니다. 그간의 괴로움이 차라리 별 거 아니었음을 아프게 깨달은 뒤에 얻는 '그저 웃지요'의 명랑한 굳건함이랄까요.
몇 십 년을 봉사하고 후원해 온 분에 비하면 민망하기 짝이 없슴다만 저 역시 두 가지 경험 속에서 수렁 같던 공황과 우울증세로부터 벗어나는 기쁨을 맛봤지요. 사무실을 정리한 뒤 몇 개월 간 깻잎 농가로 내려가 허드렛일을 하며 농가의 애환에 함께 젖은 일, 그리고 지역 치매안심센터와 치매전문병원에서 1년 남짓 환우 인지보조와 중증환우가족 말벗 활동을 하며 얻게 된 슬픔 속 기쁨 덕이었습니다.
그런 기쁨이 거창한 봉사에만 있는 건 물론 아니지요. 사무실로 배달된 1회용 음식 용기의 찌꺼기에 손대자니 찝찝해서 괴롭더군요. 괴로움이 인도하는 길은 두 갈래입니다. 그냥 내놓는 분, 혹은 누군가의 찝찝함에 마음 쓰여 닦고 씻어 내놓는 분. 두 번째 분을 종종 뵙는데, 그걸 씻는 번거로운 과정 중에 1회용 용기 문제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심각한 근심거리라는 고민에까지 동참하시게 되더군요. 더 깊고 넓은 괴로운 진실에 동참하면서 그보다는 급이 까마득히 낮은 순간적 찝찝함 같은 괴로움은 홀연히 사라집니다.
그냥 그렇게 하시는 분입니다. 거창한 뭐가 있어서라거나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 르완다와 볼리비아 아이들을 걱정했던 남매처럼 그냥 하는 분들입니다. 어리석다, 잘났다 수군거림 당하면서도 그냥 그렇게 하는 거. 그게 의연함이자 명랑함이더군요. 자기연민이나 집착, 혹은 미련이나 후회 같은 시시콜콜한 괴로움에 붙잡히기 싫으실 뿐이더군요. 확실히 그건 자유롭고 숭고한 긍지 같아 보입니다.
눈앞의 두려움과 괴로움에 굴하지 않고 건너갔다는 기쁨의 긍지입니다. 자기감수성과 성찰이 일상 속의 더 근원적이며 보편적 진실에 가까워지며 넓어졌음을 느끼는 벅찬 뿌듯함이기도 합니다.
남매는 자기만의 배고픔이라기보다 세상의 더 깊은 배고픔과 연결돼 있음을 저보다는 깊게, 하지만 아프게 배워왔던 듯하니, 늘 비좁되 어쩌다 대범한 저와 달리 어쩌다 비좁되 늘 대범하지 않을까 합니다. 실제로 그 아버지가 매일 말기암 통증을 내지를 때조차 짜증 한 번 없이 자기들 일을 척척 해냈다더군요.
내 한 몸에 고립된 괴로움에 묶여 제자리걸음하기보다 더 근원적인 모두의 괴로움과 대면하면서 어제와 다른 나로 한 계단 올라섭니다. 나의 괴로움이 너의 괴로움을 통해 우리의 괴로움 속에서 씻겨나가는 유대감과 긍지가 나를 다시 보게 합니다. 고기 맛을 한번 본 이는 자꾸 먹습니다. 긍지도 그럴 듯합니다. “결국은 나를 살렸다”고 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계속 미룬 답변이 있습니다. ‘다 알겠는데, 그래서? 편협한 괴로움에 붙들리는 이를 자기 아닌 이들의 괴로움으로 넓어지게 하는 솔루션이 대체 뭔데?’ 말입니다.
여전히 확실히 알지 못하겠더군요. 그런데 그냥 보여줘 버리는 분들은 많더군요. 주변의 불행에 마음 쓰거나, 신앙을 통하거나, 학문을 통하거나, 집요한 성찰을 통하거나 혹은 슬픈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다 신념과 행동으로 굳히시더군요. 그외 여러 가지를 통하기도 하구요. (물론 "화투는 슬픈 드라마야<타짜>"라며 일확천금을 벌어서 한번 해보겠다는 분도 있긴 합니다만;;;)
솔루션은, 어쩌면 ‘근원적 욕구’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바람은 있습니다. 근원적 욕구들 속에, 흔히 떠올리는 그런 욕구만 있는 건 아니지 싶어서요. ‘인생? 까이 꺼 살아보니 어려울 거 없더만!’ 하는 의연한 기쁨에 젖고 싶은 욕구도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요?
욕구란 말이 좀 그러면, 근원적 능력이나 용기라는 말도 요청해 보고 싶습니다. 그게 어른의 요건 같습니다. 두 ‘착한 천사’의 실체가 어쩌면 그걸 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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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벗작가님들 안녕하세요. 무당벌레입니다^o^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의 첫 번째 챕터 '어른 vs 아이를 저울질하기 (모비딕 편)'의 외전을 이렇게 마칩니다. '짧막한 챕터에, 게다가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를 하는 챕터에 웬 뜬금포 같은 긴 외전이냐?' 싶은 분도 계시겠으나... 아무튼 그렇습니다^^;;; 부자관계를 말하되 그것만 말하려 한 책은 아니다 보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