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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우소 May 27. 2024

상관없는 거 아닌가?

책과 함께

상관없는 거 아닌가? 엊그제 아무 기대없이 꺼내들었다가 즐겁게 끝까지 단 번에 읽은 가수 장기하의 산문집 제목이다. ‘나만 그런 거 아니지?’ 하고 짧은 수다를 떨며 얻는 작은 위안같은 걸 동년배라는 사실 외에 전혀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은 모르는 아저씨에게서 얻다니.


나는 기억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더욱 그냥 하루하루 본능에 의존해 살아가는 편이다. 신이 던진 공을 그 때 그 때 쳐내는 공놀이를 하는 느낌으로. 어떤 목적을 갖고 촘촘한 계획을 세워 하나씩 순서에 맞게 실행에 옮긴 뒤 예상한 일들이 착착 일어날거라 기대하려면 일단 적정 수준의 기억력이 필수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수십 년 전의 어떤 일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어떤 스트레스 때문인지 바로 방금 전에 일어난 일조차 되새기기 어려운 지경이다. 건망증으로 인해 어려운 점도 많지만 내가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나니 주어진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 느끼고 뭐든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며 흘려보내는 연습을 덕분에 잘 하고 있다.


기억력 문제 때문에 내 인생은 온갖 즉흥적 선택, 우연한 만남과 깨달음으로 가득하다. 나는 내 주변의 그 누구나 무엇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얜 이렇고 저건 저래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저 주어진 순간에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와 시시각각 펼쳐지는 상황에 따라 그 날의 인상이 즉석에서 내 마음 속에 스케치되었다 사라질 뿐이다. 즐거웠다면 그 느낌이 숙성되듯 무르익는 시간을 좀 가질 때도 있지만 그 마저도 얼마정도 지나면 곧 사그러들고, 불쾌했다면 다행히 금방 잊혀진다.


알 수 없음은 누군가에게 불안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 내가 아직 모른다는 사실, 어떤 침묵과 여백은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또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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