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한 일들이 생각날 때마다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미국 정신과 의사 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캇 펙은, 자신의 저서 <거짓의 사람들>에서 나르시시스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완전한 공포 속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더 이상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언니에게 당했던 일들이 생각나 너무 분하고 속상해서 두 사람에 대한 복수심이 들 때마다, 스캇 펙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분노가 가라앉고 마음이 편해졌다.
나의 나르시시스트 엄마 언니가 어떻게 지내던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이미 두 사람은 지옥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 대상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엄마 언니에 대해 잊고 이젠 남편과 행복하게 살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오히려 엄마 언니에 대해 집착하듯 그 둘에게 당했던 끔찍한 경험을 나 스스로 계속 곱씹은 적도 많다.
도대체 엄마와 언니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두 사람은 도대체 왜 그랬던 거지? 두 사람에게 욕이라도 시원하게 더 해주고 싶다.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이를 닦다가, 술을 마시다가, 남편과 쇼핑을 가는 차 안에서도 갑자기 문득 두 사람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가끔은 두 사람에게 내가 들었던 악담과 폭언 그리고 두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말을 했을 때와 비슷한 무언가로 인해 트리거가 되어서 엄마 언니와 있었던 일이 기억나기도 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가스라이팅과 이간질, 중상모략, 착취를 당한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나르시시스트와 관계를 맺는 중에, 또는 관계가 끝난 후에도 그동안의 경험이나 일어난 상황에 대해 반추하고 몰두하게 된다.
'저 사람이 나한테 왜 그랬지?'. '도대체 뭐가 문제였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지?' 등의 질문을 스스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고 그 관계 안에 더욱 매몰되기 쉽다. 또한 이미 물리적으로 관계가 끝났더라도 나르시시스트를 계속 생각한다면, 그 관계에서 진정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 원은수, 토네이도, p155>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원은수의 책에 나온 것처럼, 나는 엄마 언니와 연을 끊고 물리적으로 거리 두기는 성공했지만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떠올리며 지냈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진정 두 나르시시스트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원은수 전문의는 책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에서 나르시시스트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한 일을 반추하고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거야! 엄마 언니가 한 말과 행동들이 전혀 상식적이지가 않으니까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계속 그 경험을 생각하게 되었던 거야!
내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 봐도 원인 파악은커녕 문제 해결 방법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이유는 엄마 언니가 비상식 적이어서 그런 거구만!
원은수 전문의는 위 책에서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알려준다.
원은수 전문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나르시시스트와 관련된 경험에 대해 집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혼자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인지 아닌지를 돌아보고, 상대 나르가 소통이 불가하고 비 상식적이라면 그냥 그 사람과의 경험에 대해 곱씹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르와 나르에게 당했던 기억들에 집착할 시간에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일들을 더 시도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내 에너지를 나르시시스트 말고 더 좋은 곳에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그 기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나르시시스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떠올리기도 싫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르시시스트와 노 컨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르와의 기억을 아무 일도 없던 일처럼 잊을 수는 없다.
많은 전문가 들은, 상담을 받을 것을 권한다. 나 또한 대학교 때부터 회사 생활을 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았다. 물론 엄마와 언니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알기 전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불면증과 낮은 자존감을 고치기 위해 상담을 받다 보면 그 중심에는 늘 엄마와 언니와의 관계가 있었다.
정신의학과에 가면 생각보다 진료비가 저렴한 것에 놀랄 수도 있다. 물론 내과에 가서 감기인 거 같아요라고 의사와 면담 후 내는 진료비와 약값보다는 조금 더 비용이 나간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정신의학과는 진료비와 약값을 포함해 단 한 번도 진료비가 4만 원 이상을 넘은 적이 없다. 스스로 심리적으로 힘들다면 꼭 정신의학과에 방문해 볼 것을 권한다. 나는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전문가들이 다음으로 나르시시스트 피해자들에게 권하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이 글로 자신의 경험을 적는 것이다. 손으로 노트에 일기 쓰듯이 적어도 되고, 순서와 전후 관계를 따지지 않고 그냥 무작위로 생각 나는 대로 힘든 경험을 폰이나 노트북 메모장에 적어도 좋다.
나르시시스트 피해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나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과 나르시시스트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담을 받는 경우는 물론 상담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더더욱 자신의 감정을 글로 적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과거의 어린 나에게 편지 쓰기와 같은 것을 권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게 도움이 된다면 이것도 추천한다. 나의 경우에는 너무 오글거려서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할 말은 하는 애여서 계속 엄마에게 "왜 엄마는 늘 불만이 많고 아빠랑 우리를 막말로 괴롭혀?" 등등의 말을 해서 엄마에게 많이 맞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딱히 해줄 말이 없다. ㅎㅎ
나의 경우 어린 시절의 나에게 편지 쓰기 방법보다는, <You're Not Crazy It's Your Mother>이라는 책의 저자가 추천하는 것처럼 학대자 나르시시스트에게 편지 쓰기가 더 효과 적이었다. 그때 왜 나에게 그런 행동을 했냐고 엄마에게 쓰던 나의 편지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브런치 글이 되었다.
나르시시스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모든 연락도 끊고 나르시시스트들에게 전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거라고 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이미 지옥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지옥에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 계속해서 떠올릴 필요가 없다.
하루하루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지 고민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 그나저나 오늘 남편 퇴근하고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넷플에서 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