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제주로!! 나는 그렇게 호기롭게 제주도로 입도했다.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떠나고 싶은 그 제주도로 정말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떠나왔다. 10년간 운영하던 체육관을 정리하고 34년간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던 인천을 떠나 제주도로 이주했다. 그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들, 제주도에 내려와 새롭게 알게 된 친구들이 묻는다.
"왜 하필 제주도예요??"
이 질문에 나는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한다. 나는 서핑을 취미로 하고 있다. 벌써 햇수로 5년째인 애증의 취미이다. 서핑만큼 실력이 안느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서퍼들은 공감을 할 것이다. 좋은 파도를 찾아 먼 길을 다니지만 허탕을 치는 날이 더 많다. 요즘은 세상이 정말 좋아서 어플로 파도 차트를 미리 확인할 수 있고 심지어 바다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파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파도가 들어오는 양양, 부산, 만리포, 제주도 등과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확인되는 파도는 의미가 없다. 날씨 예보를 보듯 일주일치 파도 차트를 확인하며 좋은 파도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먼 길을 떠난다. 차트가 맞아떨어지면 신나게 서핑을 하지만 뻥차트인 경우가 더 많다. 나는 인천에 살았기 때문에 보통 양양으로 서핑을 많이 다녔다. 매주말 인천에서 양양까지 3시간씩 운전을 하며 서핑을 다녔는데 주변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미친놈이라고 했다. 맞다 미친놈. 서핑에 완전 미친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매주말 그 시간과 돈을 써가며 양양을 다닐 수가 없다. 양양이 지금이야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아졌지만 내가 서핑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조용한 시골마을에 찐서퍼들의 문화가 가득한 멋진 곳이었다. 해변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며 아침엔 텐트에서 나와 보드를 들고 바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낭만 넘치던 양양이 지금처럼 변한 것을 보면 많이 안타깝다.
인천을 떠나 제주도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2023년 여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다. 한동안 못 갔던 양양을 오랜만에 큰 마음먹고 찾아갔다. 코로나를 겪고 운영하던 체육관 상황이 많이 안 좋아져 다시 회복하느라 평일, 주말 없이 체육관에 올인했었다. 많이 회복되고 상황이 좋아졌지만 고민거리들을 끝없이 생겨났다.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서핑과 캠핑을 하기 위해 양양 설악해변으로 갔다.
텐트를 설치하고 신나게 서핑을 하던 중이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변했다.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고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는 모습이 보여 서둘러 퇴수 했다. 텐트에서 갈이입을 옷을 챙기고 샤워를 하기 위해 서핑샵으로 들어가던 순간 "쾅!!!!" 하고 고막이 터질 듯한 큰 굉음이 들렸다. 생전 들어보지 못 한 큰 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머리를 감싸고 자세를 낮춰 몸을 움츠렸다. 순간 북한이 쏜 미사일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사람들이 해변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해변에 벼락이 떨어졌어!!!" 순간 내 머릿속엔 텐트에 있는 여자친구와 반려견이 스쳐 지나갔다.
서둘러 텐트로 달려가니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여자친구가 서있었다. "오빠 나 벼락 맞았어"
이때까지만 해도 벼락소리가 너무 커서 맞았다고 착각하는 줄 알았다. 벼락 맞은 사람이 이렇게 멀쩡하게 서있을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서둘러 중요한 짐과 반려견을 챙기고 서핑샵으로 몸을 피했다. 여자친구는 해변에 있는 서핑보드를 가져오기 위해 걸어가던 중 순간 눈앞이 번쩍하면서 뒤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바로 일어나서 텐트로 도망쳐왔지만 아직도 그 충격에 몸을 떨고 있었다. 해변에 벼락이 떨어지고 모래가 젖어 있어 해변 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벼락이 떨어진 곳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피해가 너무 컸다. 한 명은 하반신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고 한 명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심폐소생술을 하며 구급차를 기다렸고 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해변을 떠났다.
전쟁 같던 밤이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한 명이 끝내 의식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충격은 바로 다음 일어났다. 돌아가신 분이 알고 보니 나와도 몇 번 만나 인사를 나눈 주짓수 사범님이었던 것이다. 평소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에 계신지도 몰랐는데 그 소식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할 말을 잃었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와 여자친구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짓눌려있었다.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고 그동안 가지고 있던 고민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죽음 앞에 그 고민들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죽음은 나와 먼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동안 뻔하고 식상하게만 느껴졌던 철학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니체는 그 당시 나에게 신적인 존재처럼 다가왔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랑하라", "지금 이 삶을 그대로 다시 살아도 좋을 것처럼 살아가라"라는 말은 죽음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문장이었다. 오늘을 온전히 사랑하며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관련 책을 읽고, 영상을 찾아봤다.
명상에 빠지게 되었고, 마음공부를 하며 현존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영감을 준 멘토는 에크하르트 톨레이다.
처음 이주를 생각했을 때 양양도 후보에 있었다. 오랜 시간 양양을 다니다 보니 양양에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주말마다 각 지역에서 서퍼 친구들이 놀러 오기 때문에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양양으로 이주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먹고 살 돈벌이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어쩌면 제주도보다 더 심할 것 같다. 두 번째는 바로 미련 때문이다. 양양으로 이주한 삶을 상상해 보았다. 양양에서 살면서의 행복도 분명하겠지만 내 마음속엔 항상 제주도에 대한 미련이 있을 것 같았다. '아 제주도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 여행이 아닌 제주도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할 것 같았다. 그런 미련 때문에 결국 나는 제주도로 가게 될 것 같았다.
"그래! 후회해도 일단 제주도로 가자! 살아보고 정말 아니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 되고 그럼 제주도에 미련도 남지 않을 테니까"
마음을 정하고 나는 제주도로 내려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10년간 운영하던 체육관을 정리했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1년, 2년 미루다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제주도를 가겠다고 마음먹고 유튜브, 블로그, 책을 통해 제주도에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찾아보았다. 제주도 이주에 대한 장단점부터 제주도 삶을 포기하고 다시 육지로 올라가는 이유 등 대부분 부정적인 콘텐츠가 더 많았다.
그중 가장 많았던 것이 바퀴벌레, 습도, 살인물가, 텃세였다. 이 부분은 본편에서 하나씩 풀어갈 예정이다.
마음먹은 자는 두려운 게 없는 법. 제 아무리 주변에서 뭐라 하고 겁을 줘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런 단계는 몇 년 동안 고민을 하며 지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성격은 원래 꽂힌 것은 일단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잠시 어릴 적 얘기를 해보겠다. 나는 어릴 적부터 동물을 정말 좋아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까 아마 6살, 7살 정도 되었을 것 같다. 그 당시 동네에 수레(?)를 끌고 동물장사를 하러 오는 아저씨가 있었다. 동물장사라는 표현을 싫어하지만 정말 단어 그대로 동물을 팔기 위해 오는 아저씨였다. 이구아나, 햄스터, 앵무새 등 그 당시에 흔하게 접하기 힘든 동물들이 많았다. 친구들은 다 술래잡기, 경찰과 도둑 등을 하며 뛰어놀 때 나는 그 아저씨를 매일 찾아가서 매일 동물을 구경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구경 오는 손님들에게 신나서 동물의 장점을 설명하며 호객행위를 했다. 심지어는 영업이 끝나고 정리하고 돌아가는 아저씨를 따라 수레를 밀어주기도 했다. 그런 어린아이가 커서 6학년이 되었다. 그 성격이 어디가랴 갑자기 '페릿'이라는 동물에 꽂혀서 밤새 인터넷으로 페릿을 검색하고 동호회 카페에 가입하여 사람들이 올리는 페릿 사진을 구경했다.
그리고 6학년 어린 나이에 동호회 형, 누나들을 따라 홍대, 일산, 코엑스 등 가리지 않고 정모에 참석했다. 그런 내가 신기하고 귀여웠는지 그 당시 수족관을 운영하던 형이 페릿을 한 마리 키우라며 선물해 줬었다.(물론 이것도 매일 같이 찾아와 시키지 않아도 매장을 청소하고 동물들 밥을 챙겨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온라인 동호회 활동을 하던 중 알게 된 동갑 친구과 말이 잘 통해 빠르게 친해졌다. 부산에 살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본인에 집에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부산이 얼마나 먼지 몰랐던 나는 엄마에게 부산이 어디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지도를 꺼내 들고 내가 사는 인천과 친구가 사는 부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행히(?) 어린 나이의 내 눈엔 작은 지도상에 인천과 부산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엄마와 친구의 어머니가 통화를 했고 친구 어머니는 너무나 흔쾌히 나를 보내도 좋다고 하셨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산 가는 날이 가다 왔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부산 가는 무궁화호 티켓을 구입하고 마침내 기차에 올라 부산으로 향했다. 이때 놀라운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아들을 아무도 영등포역까지도 데려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땐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는데 커서 생각해 보니 부모님들이 나를 버리려던 것인데 내가 눈치 없이 돌아왔나?? 싶었다...
그렇게 생전 처음 혼자 부산여행을 하게 되었고 무사히 도착하여 친구와 일주일 동안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았다. 그 후 방학 때면 나와 친구는 서로 인천과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추억을 쌓았고 여전히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하나에 꽂히면 꼭 해봐야 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때도 있다. 그리고 항상 행동엔 책임이 따르는 법이기에 감당하기 벅찬 상황들이 뒤따라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겪으며 지금까지 잘 살아왔기에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고 나면 다 좋은 안주거리라는 것을 배웠다.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책이라고 한다. 나를 한 권의 책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책 내용은 나름 재밌다고 볼 수 있다. 25세 다소 어린 나이에 주짓수 체육관을 오픈하여 10년간 운영해 봤고, 어릴 적 혼자 부산을 오가는 모험도 해봤고, IMP로 가정이 박살 나며 집에 빨간딱지가 붙는 것도 경험해 봤고, 올드카 감성에 미쳐 오래된 볼보 웨건을 구입했다가 양양 가는 고속도로에서 엔진이 퍼져도 봤고, 34살 여름 양양에서 벼락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써 여질 페이지들을 생각해 보았다. 인천에서는 더 이상 재미난 페이지를 써 내려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단물이 다 빠져버린 풍선껌 같은 느낌이었다. 더 흥미롭고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나를 내던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비로소 큰 세상을 경험하고, 갑각류는 껍질을 벗고 나와야 더 크게 성장한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을 벗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껍질을 벗어야 할 때를 아는 갑각류처럼 그런 성장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12,410 페이지로 쓰인 나라는 책의 1장은 대부분 내가 아닌 남의 선택으로 쓰였다. 태어난 나라, 태어난 시기, 태어난 동네, 태어난 가정, 지어진 이름, 다니던 학교 등 내 선택이 아닌 것들로 쓰인 게 더 많다.
그러니 적어도 1장의 마무리는 내 선택으로 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2장부터 쓰일 내용은 내 선택으로 쓰일 내용들로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