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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별 Oct 03. 2023

시작은 치질이었다.

세상에 없는 계절 #01

시작은 사소했다.


"치질이 재발했는데, 내시경할 때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하니 좀 와 줘라."


좀처럼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는 아버지의 전화였다. 아버지는 대장내시경을 하면서 용종을 다섯 개나 떼어냈고, 치루 수술 후에는 배가 너무 아파서 움직이기 힘들어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이상하게 매일 어지럽고 구토가 올라온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자정이었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오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 응급실 모시고 왔는데, 입원하시게 됐다."


오빠는 밤중에 아버지랑 통화를 하다가 어지러움과 구토감을 호소하는 아버지의 말을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어서 대학병원 응급실에 데려왔다고 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피 수치가 현저히 낮은 이유를 못 찾고 있다고 했다. 밤새 경과를 지켜보며 내시경 등 다른 추가 검사를 좀 더 해봐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갑자기 입원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추가 검사를 했다.


일주일 후, 대낮에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스팸 전화라고 생각해서 퉁명스럽게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님 자녀분 되시죠? 검사 결과가 안 좋은데, 병원 오시기 전에 미리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자세한 건 더 봐야 알겠지만, 악성으로 나왔고.... 암으로 추측이 돼요. 아버님께는 아직 말씀하지 마시고 자세한 건 병원 오셔서 들으세요. 예약은 평일로...."


아! 왜 하필 지금인 걸까.


가장 일이 많은 회사 성수기인 지금 말이다. 이번 시즌은 특히나 업무가 쏟아졌고, 실적의 압박까지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아버지의 검사 결과만큼이나 나를 건드리는 건 평일 진료 예약을 위한 연차 사용 문제였다. 역시 내 인생에 도움이라곤 안 돼. 머릿속으로 불평이 먼저 터져 나왔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동시에 마음은 대책 없이 뜨거워졌다. 오래된 양가감정이었다.


아버지가 이대로 돌아가시게 된다면? 내 인생에 미칠 영향은?


나는 아버지의 질병을 마치 비즈니스인 것처럼 단순히 시뮬레이션해 봤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을 때,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상상하며 스스로 안심시키는 것은 오랜 습관이었다. 답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슬프기도 했지만 뭔가 묘하게 억울했다.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시는 건 안 된다. 아직은 안 된다. 난 아직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고, 충분히 미워하지도 못했다.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는 절대 안 되게 할 거다.



무심한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그래도 제법 다정한 성격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경시대회에 큰 상을 받게 되었을 때, 당시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만년필을 손수 포장해서 선물로 보내주셨었다. 꾸깃꾸깃한 하얀색 편지 봉투에 여러 번 서툴게 싸인 만년필에는 쪽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커다란 필체로 급히 무릎에 대고 쓴 듯한 글씨였다.


'딸아! 축하한다! 문방구 와서 그래도 제일 좋은 걸로다가 사 봤다. 나를 꼭 빼 닮아 자랑스러운 딸아! 축하한다!'


당시 나의 수험생활을 뒷바라지해 주던 어머니도 옆에서 흘긋 아버지의 쪽지를 훔쳐보았다. 나에게도 걸리는 저 말이 어머니에게도 걸렸는지, 어머니는 다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자식들 잘난 건 다 제 덕이지. 못난 건 다 내 탓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넘치는 말을 그냥 넘기는 법 없이 꼭 짚고 넘어갔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가 듣기에 너무 많은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꼭 자기 점수를 깎아 먹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지만 그 만년필은 처음부터 잘 나오지 않았다. 펜촉은 뻑뻑했고, 전반적으로 마감이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나는 그 후 오랫동안, 가족을 두고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느껴질 때면 가끔씩 그 만년필을 꺼내어 보고는 했다.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이제는 더 이상 만년필을 꺼내어보는 일은 없어졌는데도 나는 어쩐지 그 만년필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방에 불을 켜고 앉아 잡동사니 상자를 찾아봤다. 먼지가 살짝 내려앉은 종이상자 뚜껑을 열어보니, 만년필은 상자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만년필 윗부분을 둘러싼 금색 테두리 부분은 녹이 슬어 있었다. 나는 만년필에 붙은 먼지를 살짝 털어내고 내일 들고 갈 가방 안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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