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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Dec 20. 2023

중국 도시의 원형을 탐구하다 - 대당서시③

수·당의 방시제도(坊市制度)

·당의 방시제도(坊市制度) -()  


우리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의 헤이조쿄(나라의 평성경)와 헤이안쿄(교토의 평안경)는 수·당의 장안성을 그대로 모방하여 건축된 것입니다. 신라의 금성은 당시 이미 600년 역사를 가진 완성형 도시였으므로 그런 식의 모방은 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 신라는 일종의 도심 재개발을 통하여 장안성의 장점 반영하려 했습니다. 주변국들이 이렇게 장안성을 모방하려 한 것은, 물론 장안이 세계 최강 패권국의 수도라는 사실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 장안성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방시제도라고 답할 것입니다.


거대한 규모, 시원시원한 주작대로, 급수를 위한 인공 수로, 동남쪽이 높은 주변 지형을 고려한 도시 배치, 도시방어를 위한 성벽 구조, 체계적인 황성과 궁성의 구조, 음양오행의 원리 등도 모두 장안성의 중요한 요소라 하겠지만, 현대 중국에까지 흔적을 남긴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이 방시제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시(坊市)제도무엇일까요?


방시제도란 성읍을 주거 지역인 방()과 상업 지역인 시()로 엄격히 나누고, 이를 기초로 성읍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일대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말하는 것입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성읍 밖의 촌민들은 함부로 성읍으로 들어와 거주할 수 없었고, 성읍 백성들도 함부로 다른 방으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밤이 되면 성읍 전체의 출입문뿐만 아니라 각 방의 출입문도 모두 걸어 잠그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막았습니다. 말하자면 수·당의 백성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는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민의 이동을 이렇게 엄격하게 관리한 까닭은 촌민들이 함부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동시에 거주민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치안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장안은 108방, 낙양은 103방의 거주 구역을 두고 있었습니다. 장안의 인구가 100만에 달했다는 언급을 그대로 믿는다면 각 방에 평균적으로 대략 9,260명이 살고 있었다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홍콩섬 같은 초고밀도 구역 뿐만 아니라, 홍콩 신계와 같은 저밀도 구역도 존재하였다고 하니, 장안의 번화가는 홍콩섬 코즈웨이 베이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을 것입니다.


당나라 시대의 방(坊)을 재현해놓은 영흥방. 섬서성의 향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2022년 2월 1일 촬영

   

각 방은 나름대로 저마다의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관료들이 주로 거주하는 방, 공주 등 황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방, 도사 등 종교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방,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방 등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방은 마치 각각 하나의 독립된 성채처럼 기능하였는데, 당나라 이후의 왕조들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 현대 중국의 아파트 단지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발견됩니다. 


코로나 방역 시기 정부는 시안 시내의 모든 아파트 단지의 출입문을 동시에 열거나 닫음으로써 도시민의 이동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면 당나라시대의 도시관리가 어땠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 장안성. 확대하여 보면 각 방이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수 있다. 2022. 5. 20. 촬영

    

신라는 금성의 왕경 지역의 도로를 격자형으로 바꾸고, 남북과 동서의 직선도로로 구획된 공간의 외각을 담장으로 둘러쳐 방(坊)으로 삼고, 이 방을 기본단위로 하여 도심지역을 재편하였습니다. 이는 장안성을 본딴 것이었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당나라로 이주한 신라인들은 성읍 밖에서는 신라촌을 세우고 성읍 안에서는 신라방(新羅坊)을 건설하였습니다. 이 신라방은 대당 무역의 전초기지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장보고와 청해진을 다루는 역사 수업에서 배우신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우리 민족에게 그러한 촘촘한 방식이 불편했는지 어쨌는지 신라시대 이후 그와 같은 도시 구조는 찾아보기 어렵니다. 아무래도 중국인들과 우리 민족의 기질이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

     

조선 정조 시기 연암 박지원은 북경 및 열하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보고 들은 바에 대해서 생생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책이 바로 열하일기입니다. 박지원의 일행은 1780년 6월 24월 의주를 떠나 7월 10일 심양에 도착하였고, 그 직후인 7월 14일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요양에서부터 내성 둘레 3, 외성 둘레 5리의 소규모 성(삼리지성 오리지곽)여럿 보았는데, 시골 촌락에 지어진  소규모 성들은 대규모 성에 준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

(自遼陽以來多經小小城池而不可殫記所謂三里之城五里之郭而未必皆郡邑治所不過是鄕井保聚然其制度無異大城也, 성경잡지 편) 


군사 요충지나 행정 중심지도 아닌 시골 마을에까지 겹성을 쌓아 둔  조선 사람인 그로서는 꽤 놀라운 일이었던 듯합니다.




중국에 3년 거주하면서 제가 다른 아파트 단지를 방문하였던  단 두 차례뿐이었습니다. 아내의 동료 집에 저녁 식사 초대받은 적이 한 번 있고, 다른 한 번은 친구 집에 놀러 간 딸을 데리러 간 적이 한 번 있습니다. 두 번 모두 저의 인적 사항과 방문하려는 동호수를 아파트 출입기록부에 기재한 후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특별히 다른 아파트 단지를 방문할 일은 딱히 많지 않지만 그래도 원한다면 언제라도 단지 안으로 들어가  수 있는 반면, 시안에서는 버스를 타고 지나가더라담이 높아 단지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어서, 이점에서 두 나라의 차이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있는 담과 벽도 허물어서 분리된 영역을 합치고 흐름을 더 쉽게 하려는 우리와 달리, 없던 담과 벽도 새로 세워 영역을 나누고 흐름은 늦추려는 중국의 방식은, 사회 전반의 다양한 분야에서 두 나라 차이를 만들어 내었고, 나아가 상호 몰이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주제를  다뤄보고 싶습니다.

    

·당의 방시제도(坊市制度) - ()     


당시 장안에는 2개의 시장(东西两市) 존재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상업활동은 이렇게 동쪽시장 즉 동시와 서쪽시장 즉 서시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사거나 팔기 위해서 백성들은 반드시 동시 또는 서시까지 찾아와야 했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동서(东西)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상품, 제품  등 물건을 의미하는데,  이는 당나라의 동시 및 서시(东西两市)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나라에서 상업활동이 가능한 구역을 이렇게까지 엄격히 제한한 것은 물가를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적은 수의 관리를 배치하더라도, 동시, 서시의 물가만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도성인 장안성 전체, 나아가 당나라 전체의 물가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물가 관리 방식은 초기에는 백성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후기로 갈수록 오히려 상업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적인 방식으로 복원된 대당서시. 2022년 2월 26일 촬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일본의 간무 덴노는 794년 교토로 천도하면서 도성 내의 동사(東寺)서사(西寺) 두 국가 사찰 이외 사찰의 건립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이는 그가 호족과 결탁한 불교 세력의 도전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시대의 불교와 단절하기 위해, 동사의 주지로 임명한 이는 그 유명한 당나라 유학파 구카이(空海) 대사입니다. 이후 일본의 불교는 구카이가 당나라에서 수입해 온 진언종을 중심으로 다시 번영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간무 덴노는 도성 내에 동시(東市), 서시(西市) 두 개의 시장만 두고 경제를 철저히 통제하는 당나라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종교정책에 국한하여, 간무 덴노의 선택은 당나라에 비하여 나름 성공적이었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종교에 너그러웠던 당태종 덕분에 국교인 도교  천교, 명교, 경교, 불교의 이른바 4대 외래 종교가 모두 번성하였고, 외래 종교의 활발한 활동은 당나라의 번영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끝까지 유지되지 못하였습니다. 불교 세력의 지원으로 즉위하였으나 그에 휘둘리는 건 싫었던 무종 이염이 845년 단행하였던 이른바 회창의 폐불, 즉 외래종교 포교금지 조치로 인하여, 당나라의 개방적인 풍토는 극히 위축되었습니다. 70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개방성 감소는 당나라의 몰락을 점점 더 확실한 운명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당나라 무종을 화나게했던, 장안성에 범람하던 사찰들. 출처: 섬서역사박물관. 2022. 7. 22. 촬영



함광문 유적지 박물관. 동시와 서시가 오렌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2021. 11.21. 촬영


당나라 후기로 갈수록 무역이 침체되었는, 이는 개방성의 축소와 관계가 있습니다.

당나라가 번성하던 시절, 왕족이나 관리가 주로 찾은 동시와 달리, 서시에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드나들었습니다. 이란계 소그드인이나 신라상인이 서시의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당나라인과 교류하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으로부터 수입되는 갖가지 물품들이 장안성 안원문을 거쳐 서시로 밀려들었고, 당항성과 등주 간의 바닷길을 통해 신라로부터 들어오는 물품들이 서시에서 거래되었습니다. 다시 당나라의 물품은 전 세계로 팔려나갔습니다. 나라에서 딱히 물가 말고는 다른 규제를 하지 않다 보니, 서시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에서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당나라 초기의 경제정책은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그에 대한 규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의 태생적인 개방적 풍토가 뒷받침해 주니, 적절한 규제도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나라 후기로 갈수록 자유로운 분위기는 퇴조하고 규제만이 강조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를 괴롭혀왔던 자유무역의 흐름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면서도 꾸준하게 개방의 길을 선택해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방은 우리에게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무수한 반대를 뚫고 체결한 한미FTA가 입니다. 그러나, 최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주변국에 강요되는 미국발 보호무역의 기조가 다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 같은 나라는 역시 개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무역수지가 악화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중국과 무역을 하지 말자는 반응도 있는 듯한데, 이와 같은 관점이 참 우려스럽습니다. 외부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포기하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다를 게 없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자유무역의 정신을 따르되, 다만 정부는 정부대로 AI, 로봇, 빅데이터, 배터리, 반도체, 바이오 기술 등 미래기술에 과감하게 재정을 투입하고 동시에 그 대상이 대기업이든 중견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정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와줘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이 보호무역 쪽으로 가는데, 우리만 손 놓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나라의 위대함은 개방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만 우리도 이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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